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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

국모 시해와 단발령은 야만의 길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의병 대표 이미지

유인석의 격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을미사변과 단발령

1895년(고종 32) 8월 20일(음력) 명성 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그해 7월 23일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왕궁을 점령하고 국왕과 대원군을 협박하여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일본은 청과의 전쟁 구실을 찾고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면서 조선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청일 전쟁을 도발한 직후 (1894년 9월) 평양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정부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5년 청일 전쟁 이후 동아시아 정세는 일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4월 17일 청일 간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청으로부터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포함한 요동반도를 할양받았으나, 4월 23일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토록 하는 ‘삼국간섭’이 행해졌다. 그리고 일본은 5월 10일 이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하였다. 요동반도가 청에 반환되자 조선 궁정에서는 일본의 대항세력으로 러시아가 급부상하였다. 8월 25일 제3차 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에 이완용, 이범진 등 친러파가 입각하면서 박영효 등 친일세력이 제거되었다. 이에 조선 주재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소위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추진한 조선 침략정책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일본은 그 타개책으로 외교관이 아닌 군인출신인 조슈군벌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이노우에 후임으로 조선에 부임시켰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새벽, 일본 수비대의 호위 하에 일본 공사관원과 경찰대,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켄죠(安達謙藏)와 낭인 수십 명,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비롯한 조선정부 고문들 그리고 일본인 교관이 배속된 훈련대 제2대대(대대장 우범선) 등 일단의 무리들이 대원군을 앞세워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왕후(명성 황후)의 처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궁 안의 우물에 던졌다가 왕궁 밖 솔밭으로 다시 끌어내어 장작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의 주모자는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공사 미우라였다. 그는 왕후 시해를 한국군의 만행으로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다. 미우라는 친일적 색채로 해산문제가 제기된 훈련대가 대원군을 추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명성 왕후를 살해한 것이고 일본 수비대는 한국군의 시위대와 훈련대 내부 충돌을 진압하려고 개입하였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 그러나 당시 황후 시해를 현장에서 목격한 러시아인 전기기사 사바틴(G.Sabatin)과 미국인 시위대 교관 다이(W.M. Dye)가 이 사건에 대해 폭로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미우라는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서기관을 총참모장 격으로 하고 민간인 책사 아다치, 군부 고문 오카모토, 일본공사관 무관 겸 훈련대 책임자 구스노세(楠瀨行彦) 중좌 등을 참모로 동원하여 치밀한 계획을 짜고 이를 지휘한 것이다.

김홍집 내각 또한 이 사건의 진상을 숨기고 있었다. 명성 황후가 시해되었는데도 이를 숨기고 8월 22일 '왕후폐위조서'를 발표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황후의 사망을 발표한 것은 10월 15일이었고, 이 황후시해 사건의 주동자 이주희, 박선, 윤석우 등 3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한편 사바틴과 다이의 증언에 당황한 일본 정부는 외무성 정무국장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주한 변리공사로 파견하여 미우라 등 48명의 사건 관계자 전원을 본국에 소환, 진상 누설을 방지하였다. 고무라는 이들을 히로시마 감옥에 구속하여 형식적으로 취조하는 등 재판극을 연출하며, 잠시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했다.

명성 황후 시해사건이 알려지면서 국내 여론이 즉각 들끓었고 유생들 사이에 의병 봉기에 관한 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왕후 시해에 이어 ‘왕후폐위조서’가 발표되자 전현직 관료와 유생들은 폐위 조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일본군을 토벌, 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충청남도 일원에서 1895년(고종 32) 9월 18일 유생 문석봉(文錫鳳)이 처음으로 의병봉기를 일으켰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해사람 문석봉이 호서의 보은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적도(賊徒)를 성토하므로 인근 고을의 유생들이 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모여 들었으나, 그 후 얼마 안 되어 공주부에 체포되었다.” 고 하였다. 이처럼 왕후 시해로 민심은 들끓고 있었으나 아직 의병 조직 및 활동이 본격화되지는 않았다.

한편, 전국의 유생을 격동시켜 의병 봉기를 촉구한 사건은 단발령공포였다. 1895년(고종 32) 11월 15일 단발령 조칙이 내려졌다. 개화 정부에게 단발은 ‘구습’ 개혁을 성공시키는 요체였다. 그러나 유교윤리가 깊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으로 상투는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유생들은 단발령을 신체적 박해,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여 이에 대한 반감은 절정에 달했다. 무엇보다 단발은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 고종이 솔선하여 단발을 하고 일반 백성에게 권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0월 중 왜사(倭使)가 상(上)을 협박하여 머리를 자르라고 하자 상은 왕후의 인산(因山) 이후로 미루자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유길준(兪吉濬)·조희연(趙羲淵) 등이 왜를 이끌어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머리를 자르지 않는 자는 죽인다고 하자, 상이 길게 탄식하면서 정병하(鄭秉夏)를 돌아보며 네가 내 머리를 자르라고 하였다. …… 왜인이 군대를 배치하여 엄히 지키고, 경무사 허진(許璡)은 순검을 인솔하여 칼을 차고 길을 막아 만나는 사람마다 곧 머리를 잘랐다.

또한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그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확대되었고, 단발이 곧 ‘일본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의식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척사파 유생들에게 단발은 문명을 버리고 야만을 택하는 행위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삼국간섭 이후 강화된 러시아세력을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이라는 명분아래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일본의 침략행위였다. 그러나 봉건체제의 ‘개혁’이라는 점에서는 이것은 개화파의 정책방향과 일치하였다. 이에 봉건유생들에게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침략의 표상인 동시에 개화의 표상이었다. 따라서 을미의병운동은 일본 침략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이었지만, 동시에 봉건질서 해체에 대한 유생들의 위기의식의 발로였고 동시에 일본 침략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2 을미의병운동의 전개과정 : “의로써 궐기하여 적을 토벌하라”

국모(명성 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던 때에 공포, 시행된 단발령은 유생들과 일반 백성의 반일, 반정부 기운을 더욱 고조시켰다. 을미의병운동은 1895년(고종 32) 말에 발생하여 1896년(고종 33) 여름 경 거의 막을 내린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을미 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 중심이었다. 이들은 갑오·을미정권(친일정권) 하의 관찰사, 군수 혹은 경무관, 순검 등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처단하거나 문책하고, 관군 및 일본군의 진압에 항전하였다.

의병 항쟁은 춘천과 제천을 중심으로 강원, 충북, 경북의 3도 접경지역과 그 인근 에서 활발했다. 이 밖에 강원도 강릉, 경북 안동, 경남 진주, 전남 장성, 충남 홍주 등지에서도 의병이 조직되었다. 의병 항쟁을 주도하거나 지도적 역할을 맡은 인물로는 충북 제천의 유인석을 필두로 경기도 여주의 이춘영과 이천의 김하락, 충북 충주의 백우용, 충남 금산의 여영소, 홍주의 김복한과 이설, 경북 안동의 권세연, 문경의 이강년과 선산의 허위, 경남 진주의 노응규, 전남 장성의 기우만, 강원도 춘천의 이소응과 강릉의 민용호 등을 들 수 있다.

1895년(고종 32) 11월 28일 경기도 지평(현 양평군) 유생 이춘영은 포군 출신 김백선과 기병할 것을 모의하여 강원도 원주 지정면 안창리에서 창의의 깃발을 들었다. 이렇게 조직된 이춘영의 지평의병(원주의병)은 충북 제천의 이필희 의병과 결합하여 유인석 휘하에 모였다. 유인석 의병부대는 그해 12월 8일 충북 단양 장회촌에서 매복하여 공주에서 동진해 오던 관·일(官日)연합군과 접전을 벌인 끝에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유인석 부대는 1896년(고종 33) 1월 5일 일본군 병참이 있는 충주부를 공격했다. 이 때 유인석 부대는 관찰사 김규식을 잡아 처형하고 일시적으로 충주성을 점령하였으나 곧이어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제천으로 물러났다. 이후 문경에서 거병한 이강년 부대가 합세해 와 전력을 보강하여 군세를 떨쳤다.

1896년(고종 33) 4월 중순 유인석 부대는 장기렴이 이끄는 관·일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함으로써 제천의 근거지를 잃었다. 이로써 유인석 등의 의병 활동은 사실상 끝을 맺는다. 제천 전투에서 패전한 유인석은 의병운동 재기를 위해 서북지방을 전전하였으나, 의병 모집에 실패하여 국내 의병활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인석은 압록강을 넘어 요동지방으로 건너가 진영을 해산했다.

경기도에서는 1895년(고종 32) 11월 17일 김하락 등이 이천에서 봉기하여 남한산성 등지에서 관·일연합군과 교전하면서 1896년 2월 경까지 의병투쟁을 벌였다. 강원도 강릉 일대에서는 민용호가 1896년(고종 33) 1월 30일에 강릉부 관할 9군을 총괄한 관동9군도창의소를 설치하고 강릉부 경무관 고준석을 처단하면서 의병의 기치를 올렸다. 민용호 의병부대는 1896년 3월 원산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강릉을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투쟁을 벌였다. 민용호 부대는 회양, 금성(현 김화군) 등 영서지방과 황해도, 평안도 지방을 거치며 유격전을 전개했고, 9월에는 함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본군의 계속된 공격을 받아 개마고원을 넘어 만주로 들어가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충청도 홍주(현 홍성군)에서는 1895년(고종 32) 12월 초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 등이 기병하여 한때 그 일대를 지배했으나 당초 의병에 가담하기로 했던 홍주부 관찰사 이승우가 배신함으로써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경상도 진주에서는 최익현의 문도인 노응규와 정한용이 1896년(고종 33) 1월 초 순검과 중방(中房)을 타살하고 군기고의 무기를 탈취하여 봉기했다. 이들 의병부대는 4월 11일~12일 김해에서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안동에서는 의병들이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1896년 1월 20일경 권세연 부대는 군기고의 무기를 탈취하였고, 일본인 수명과 예천군수 유인형 등 친일 관료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1월 28일 도망쳤던 안동부 관찰사 김석중이 많은 관군을 끌고 공격해오자 훈련을 받지 못한 의병들은 곧 사방으로 흩어져 결국 안동부를 빼앗겼다. 1896년(고종 33) 2월 경북 김산(현 김천시 지역)과 상주에서는 허위(許蔿), 이기찬 등이 의병을 일으켜 금릉(현 김천시 지역) 등지를 점령하고 대구에 다다랐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해산하였다. 전라도의 의병봉기는 다른 지방보다 약간 늦은 3월에 시작되었다. 나주의 기우만(奇宇萬) 등은 각처의 의병을 광주로 집결시켜 호남창의군을 편성하였으나 역시 관군의 공격을 받고 해산하였다.

3 아관파천과 의병 해산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의병 봉기를 일으킬 즈음, 조정에서는 뜻밖의 정변이 일어났다. 1896년(고종 33) 2월 11일(양력) 새벽, 국왕과 왕세자는 비밀리에 궁녀의 교자를 타고 영추문을 통과, 왕궁을 탈출하여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으로 직행했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당일 러시아공사관에 중신들을 소집, 포고문을 발표하고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 친일파 대신들을 반역죄로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이 백성들의 손에 의해 타살되었고, 유길준, 조희연, 장박, 권영진, 우범선, 이진호, 이범래 등은 일본에 망명했다. 이로써 제3차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박정양을 총리대신으로 하고 이범진, 이완용이 중심이 된 친미·친러 정권이 수립되었다.

정부는 아관파천 후 조칙을 내려 의병에게 고종의 뜻을 널리 알렸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하며 의병을 일으킨 것에 대해 “역괴 난당(逆魁亂黨)이 서로 배짱이 맞아서 국모(國母)를 시해하고 군부(君父)를 협박하며 법령(法令)을 혼란시켜 억지로 머리를 깎게 한 결과 온 나라에 짐의 백성들이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충의(忠義)를 떨쳐 곳곳에서 창기(倡起)함이 어찌 명분 없는 일이라고 하겠는가.”라면서, 이제는 “난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원수를 시원히 갚고 삭발을 편한대로 하게 하였으니”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의병 해산 종용과 함께 신기선을 남로선유사로, 이도재를 동로선유사로 임명하여 지방에 내려 보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김홍집 등 친일 개화파정권이 무너지자 유생들의 의병활동은 전반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일부 의병들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정국이 변화했음에도 일부 의병들이 해산하지 않고 공세에 나선 이유는 그들의 투쟁 목표가 단지 일본 및 친일세력 축출에 한정되지 않고 개화파의 근대개혁 자체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병의 기세는 3월 하순 이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되면서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 친일 개화파정권이 붕괴되고 단발령이 철회되면서 민심이 다소 진정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종의 강력한 해산 권유와 계속되는 관·일연합군의 공세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극히 일부 세력의 부분적 저항이 가을까지 계속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6월경 의병은 대부분 해산하고 말았다.

4 을미의병의 한계와 의의 – 위정척사, 충군애국적 반침략 운동

을미의병을 주도한 지방 유생들은 위정척사사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보면 아래로는 일반 농민과 다름없는 ‘가난한 선비’로부터 위로는 대지주 양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화서학파 ·남당학파·노사학파·한주학파 등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다. 또한 송시열과 김상헌처럼 북벌론이나 척화론을 주장했던 인물과 혈연적 또는 학문적으로 연관이 깊은 유생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조선왕조 하에서 지방사회의 지배자로 군림해왔다. 특히 척사사상의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는 이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의병들은 지연과 혈연, 학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조직을 바탕으로 군사와 무기를 모아 의진을 결성했다.

유인석 부대의 지도부는 유중교와 유인석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층이었는데 이들 모두 19세기 척사파의 거두 이항로의 문하거나 그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유인석이 의병운동의 근거지로 잡은 제천은 바로 이항로의 문하 유중교가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또 김하락이 의병을 일으킨 양근과 지평은 이항로가 후진을 양성하며 그의 문인들에게 척사위정 정신을 교육하여 일찍부터 반침략의식이 싹 텃던 곳이다. 또 다른 한편 나주의병이나 해주의병처럼 유생 이외에도 서리층이나 평민들도 다수 포함되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유생이라 할지라도 몰락한 양반층이 많았다. 이러한 점은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요인이기도 했다.

병사층에는 평민 농민을 비롯하여 포수·보부상·해산군인 또는 소작농민이나 일부 동학농민도 참여하였다. 이 중 일종의 예비군 내지 퇴역군인의 성격을 띤 포군이 사실상의 주 전투력이었다. 유인석 부대에서 실제 적과의 싸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포군들로 구성된 김백선 부대였다. 지평 군수 맹영재의 군리(軍吏)였던 김백선은 포군 수 백여 명을 거느린 우두머리였다. 이 밖에도 유인석 부대에는 이문흠이 이끄는 단양 포군 수 백여 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포군은 본래 지방관이나 재지양반, 즉 지역 지배자층이 농민 등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위로부터 조직했던 무력조직이었다. 포군 중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가 없지 않았지만 포군은 사실상 용병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포군 이외의 일반 병사들은 대체로 농민 출신이었다. 이 중 지방양반이나 유생들이 거느리고 있던 소작농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허위 등이 상주, 선산 지방에서 봉기할 때는 가노(家奴) 수 백 명을 동원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이 따르지 않아 수십 명의 종사(從士)만으로 금산(金山)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농민들의 참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당시 백성들은 개화파의 매국적인 행동에 분개하고 있었기에 의병에 대한 관심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인석 의병부대도 의병이 지나는 고을마다 격문을 내어 민병의 자진 참여를 호소하였지만 좀처럼 평민들이 호응해 오지 않았다.

한편 의병의 지휘부와 병사층간의 상호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포군은 중요한 전투력임에도 불구하고 유생 의병장들은 이들을 용병으로 여겼다. 그 결과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높이는데 실패하였으며 유인석 부대에서 양반인 안승우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평민 지휘관인 김백선을 처형하는 등의 신분 차별적 태도는 전력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의병장 중 다수는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참여했던 것으로 보여 동학농민군과 의병의 정치사상적인 차이가 컸다.

을미의병의 봉기 이념은 첫째, 국수보복론(國讐報復論)을 들 수 있다. 일본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 황후의 복수가 의병 봉기의 주요한 목표였다. 둘째,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 역시 중요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존화양이론은 송시열의 소중화론, 즉 북벌론적 사고에 기초한 강한 척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을미의병은 존화양이론에 입각하여 반개화론 나아가 개화망국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배타적인 척사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된 국가로서 조선왕조를 지키는 것에 있었다. 즉 을미의병은 충군애국적 국가관으로 일관하면서 국왕을 전제로 한 국가의 독립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척왜론에 입각한 대일결전론(對日決戰論)을 주장하였다. 유생들은 청일 전쟁 이후 특히 척사의 대상이 일본으로 집중되면서 척왜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념을 실천에 옮겨 의병투쟁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을미의병은 남한지역을 중심한 전국 각지에서 치열한 반개화·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다. 을미의병의 무장투쟁은 위정자와 일본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고종은 단발령을 철회했으며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한 반대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어윤중 등 친일 개화파 관리들은 처단되었고, 일본의 의도대로 추진되던 개화정책도 일단 정지되었다.

일본 및 친일세력의 후퇴에 따라 을미의병도 표면적으로 해산하였지만 제천의병과 민용호 의진과 같이 끝까지 고종의 해산조칙을 거부하고 만주로 들어가 재기의 항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또 비록 해산된 이후일지라도 이들의 일부는 영학당·활빈당 세력으로 재편되어 반개화·반침략·반봉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의병장들은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국권과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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