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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무단통치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탈취한 뒤 시행한 1910년대의 일상적인 군사지배체제

미상

1 개요

일반적으로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는 ‘병합’에서 3·1 운동까지(제1기), 3·1 운동 이후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까지(제2기), 만주 침략에서 일본 패망까지(제3기)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무력에 의한 식민지배라는 점에서 본질상의 차이는 없으나 통치정책과 양상에 따라 각각 무단통치, 문화정치, 민족말살통치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제1기의 특징인 무단통치는 말 그대로 군이 식민 사회 전반을 통치할 뿐만 아니라 주민의 일상까지 통제하는 계엄 상태가 지속된 지배체제였다. 즉 군인인 헌병이 치안유지는 물론 행정과 사법 전반에 걸쳐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직접 주민을 통치했기 때문에 헌병경찰체제라고도 부른다. 일제는 이러한 체제에 기초하여 조선총독부의 행정관리뿐만 아니라 학교 교원들에게까지 제복과 대검을 착용하게 함으로써 군사적 통치의 실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 헌병경찰제도의 성립과 탄압

일본이 조선에서 헌병경찰 제도를 만든 것은 ‘합방’ 이전부터였다. ‘합방’을 준비하면서 「한국주차(駐箚)헌병에 관한 건」(1907.10.8.)을 만들어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은 주로 치안 유지에 관한 경찰업무를 장악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악명 높은 헌병경찰 제도가 시작되었다.

‘합방’이 되면서 조선총독부경찰관서관제가 공포되어(1910.10.1.) 일본군의 조선 주둔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警務摠監)이 되고 각도의 일본군 헌병대장이 경찰부장을 겸임했다. 또한 ‘합방’ 전에는 일본 헌병이 주로 도시에 집중 배치되었으나 ‘합방’ 후에는 분산 배치제로 전환되면서 농촌지방까지 헌병분견소와 헌병파출소를 설치했고, 여기에 순사주재소, 순사파출소까지 두어 전국의 치안을 물샐틈없이 강화했다.

헌병과 경찰의 두 조직체계가 연립하고 헌병이 최고 치안책임자로서 두 조직의 장을 겸하여 일원적인 명령계통을 유지했다. 그러나 운영에서는 양자의 특성을 살려, 경찰은 개항지와 철도연선을 비롯하여 주로 질서를 요하는 도시에 배치되어 행정·사법경찰을 주관하고, 헌병은 군사경찰상 필요한 지역, 국경 지방, 의병이 출몰하는 지방 등에 주로 배치되었다.

이처럼 일제가 헌병경찰의 배치를 분산배치제로 바꾸고 지방행정체제의 개편에 맞게 조직을 정비한 것은 헌병경찰을 중심으로 일반행정과 경찰업무를 연결시켜 중앙권력이 직접적으로 지방의 민을 관리하고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향청(鄕廳)의 폐쇄, 동리 단위까지의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전통적인 향촌 자율적 기반을 해체한 위에 조선면제, 헌병경찰제도를 정비한 것은 조선 민족에 대한 식민권력의 직접적인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헌병경찰기관의 정비와 더불어 지배망을 구축하기 위해 기관과 인원을 계속 증대시켰다. 1910년에 헌병기관 653개와 인원 2,019명, 경찰기관 481개와 인원 5,881명이던 것이 이듬해인 1911년에는 헌병기관 935개와 인원 7,749명, 경찰기관 678개와 인원 6,222명으로 증가했다. 두 기관의 인원수를 비교해 볼 때, 1911년의 경우 헌병이 경찰관보다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이는 헌병경찰이 폐지되는 1919년까지 그대로 반영되는데, 일제의 식민 통치가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3 경찰의 권한과 기능

1910년대의 식민통치를 무단통치, 또는 헌병경찰체제로 규정하고 식민지 조선 사회를 경찰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헌병경찰이 식민통치 전반에 걸쳐 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권한마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식민지 조선에서 경찰은 크게 다음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었다.

① 군사경찰 : 의병 토벌, 첩보 수집 등
② 정치사찰 : 신문지와 출판물 단속, 집회와 결사 단속, 종교 단속, 기부금 단속 등
③ 사법경찰 : 범죄즉결, 민사소송조정, 검사업무 대리, 집달리 업무, 호적사무 등
④ 경제경찰 : 납세독촉, 국경 세관 업무, 밀수입 단속, 국고금과 공금 경호, 부업·농사·산림·광업 등의 단속
⑤ 학사경찰 : 학교 및 서당 시찰, 일어 보급 등
⑥ 외사경찰 : 외국여권 교부, 일본행 노동자 및 재한중국인 노동자 단속, 채류금지자 단속, 국내외 거주이전 등
⑦ 조장행정 : 법령 보급, 납세의무 유시, 농사식목개량, 부업 장려 등
⑧ 위생경찰 : 종두 보급, 해로운 짐승박멸, 전염병 예방, 도살단속 등
⑨ 기타 : 해적 경계, 우편 호위, 도로 수축, 묘지 매장, 화장 단속, 강우량·수위 측량, 도박·무당·기생·매춘부·풍속 등 단속

위에서 보듯 식민지 경찰은 ‘경찰 본래의 사무 이외에 비상히 많은 특종 근무’를 하고 있어, 당시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경찰을 두고 “행정·사법 양부에 걸쳐 그 권력을 가질 뿐 아니라 학자의 영역에 속해야 할 언론의 지도, 교육가의 영역에 속해야 할 사회풍속의 개선, 흥신소의 영역에 속해야 할 신용조사, 실업가의 영역에 속해야 할 경제계의 연구 등” 모든 분야에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의 기능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첫째, 경찰의 가장 핵심적인 업무인 치안활동이다. 유생이 쓴 『구례유씨가일기』를 보면 “총독부의 압수령을 청탁한 헌병청 보좌원 이○칠이 출장 나와서 『매천집』 3권을 수거하여 갔다.”(1916.7.2.)고 하여 당시 대표적인 금서로서 지식계층이 소유하고 있던 황현의 『매천야록』을 헌병이 직접 출장 나와 수거해 감으로써 반일적인 분위기를 차단하려고 신경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경찰이 검사 사무를 취급하는 것으로 지방법원 가운데 검사가 배치되지 않은 곳에는 경시 또는 경부가 검사 사무를 대신 취급하였다. 검사 소양이 부족한 헌병이 검사사무를 하게 되자 권력을 자의적으로 집행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순사보나 헌병보조원까지 영장을 집행하여 조선 민중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셋째, 경찰이 민사소송을 조정하는 것으로 재판소가 없는 지역의 경찰서장은 주택·건물 또는 물품의 인도, 부동산의 경계와 2백 원 이하의 금전채권에 대해 조정할 수 있었다. 조선 전체에 재판소가 있는 곳은 55개 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161개 군에서는 경찰민사조정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홍성 같은 곳에서는 사법업무가 너무 많아 경찰 본래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다.

넷째, 경찰이 집달리 사무를 취급하였다. 경성과 기타 주요 도시를 제외한 곳에는 경찰관리가 집달리 사무를 대신 취급하고 있어, “이것도 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일로서 조선 경찰의 특수직능 중 한 가지”로 지적되기도 했다.

다섯째, 경찰이 행정사무를 지원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최하급 행정기관인 면장의 직무 집행이 아직은 유치해서 내지(일본)의 정촌장(町村長)에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자연 조장행정사무에 관해 그 의뢰가 많고, 경찰관헌도 또한 나아가 이에 응해온 인습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들 원조사무에 관해 지방인민의 경무기관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어, 일반적으로 경찰관헌의 지시명령은 확실히 준수하여 그 효과를 얻는 데에도 매우 편리한 실정”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장행정원조사무에는 주로 도로 수축, 임야 단속, 국경지방의 관세 사무, 세금징수 원조, 농업 지도, 해충 구제, 산업 장려, 부업과 저금 장려, 미취학 아동의 교양, 청년회 등의 지도, 어업 단속 등이 있었다. 이같이 경찰이 행정사무를 겸행하는 것은 조선 하급 행정기관의 직무 이행력이 부족함과 동시에 조선 경찰의 실제적 기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섯째, 경찰이 호구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조선 민중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 체제를 강화했다. 1916년 경무총감부 훈령 1호 호구조사규정에서는 호구조사의 목적을 “관내 주민의 이동을 조사하여 그 성행, 내력과 생활 상황 등을 찰지(察知)하여, 이로써 경찰상 제반의 자료를 공급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조사내용을 상세하게 규정했다. 그리고 ‘특별요시찰인과 요시찰인, 지나(支那) 또는 조선 재류 금지명령을 받은 적이 있는 자, 형사시찰인과 가출옥자, 도박 상습혐의자, 평소 조폭(粗暴)과격한 언동을 하는 자, 불량소년, 가정문란자와 방탕음일한 자, 무자(無資)무산업하며 도식하는 자’ 등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비밀리에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근대 일본의 경찰체계가 가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예방중심주의며, 예방중심주의가 '일본형 위생국가의 성립이라는 독특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특징이 식민지 조선의 경찰체제 성립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구례유씨가일기』의 1918년 3월 6일자 기록은 1910년대 위생경찰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다.

헌병 오장과 보좌원, 농잠교사, 군청·면사무소 서기 등 다섯 사람이 출장 나와 청결을 검사한 후에 측간 개량의 일에 대해 설명하니 가볍지 않다. 만약 듣고 따르지 않으면 의법 조치한다고 했다. 역시 변한 것이다. 매년 청결일이 한 10여 번 계속 된 이후 읍 촌간에서 집집마다 개나 돼지를 잡아 죽이는 작폐가 가정집에까지 돌입하여 어린 돼지라도 이를 보면 다 잡아 죽이고 값도 지불하지 않고 뺏어 갔다. 지금은 이런 일이 없으나 이 역시 하나의 변괴라 할 만하다.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위생검사에 경찰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력까지 동원할 정도로 위력을 동반하여 청결을 엄격하게 강제했다. 그 결과 심지어 집안의 가축마저 도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통치시스템이 촌락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풍경이었다. 위생검사가 비록 근대적인 의료규율의 확립이라는 성격을 가지나 이처럼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강제함으로써 경찰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식민권력의 행정체계와 행정력이 지역 말단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띠면서 관철되는 1920년대 중반부터는 경찰의 행정원조사무 중 일부가 일반행정으로 이전되긴 했으나, 행정경찰의 비중은 여전히 큰 편이었다. 이는 식민지의 행정체계가 경찰이라는 물리력에 상당 정도 의존한 체계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4 식민지 통치 법제

식민지 경찰에게 과도한 권한과 임무가 부여되어 있음은 경찰과 관련한 법에서도 잘 드러난다. 1910년대 대표적인 치안관계법으로는 보안법과 「집회취체에 관한 건」이 있다. 일제는 1907년 7월 보안법을 공포하여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경찰관이 집회나 대중운동을 제한·금지·해산할 수 있게 했으며(제2조), 문서·그림의 게시나 언동도 단속했다(제4조). 그리고 1910년 8월 25일 「집회취체에 관한 건」(경무총감부령 제3호)을 공포, 정치에 관한 집회를 금지하여 9월 13일, 대한협회, 서북학회, 진보당, 일진회 등 10여개의 결사를 모두 해산시켰다. ‘병합’ 이후에도 보안법이 적용되어 모든 정치결사·집회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식민지 지배법규로서 악명을 떨친 것은 조선태형령과 경찰의 특권을 규정한 내용이다. 1912년 3월 제령 13호로 공포된 조선태형령은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해야 하는 자와 백 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해야 할 자가 조선 내에 일정한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무자산자라고 인정될 경우, 정상을 참작하여 형 1일 또는 벌금 1원을 태 1로 계산하여 이를 과하는 것이었다. 태형의 언도가 확정되면, 집행을 마치기까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 유치하여 유치된 장소에서 비공개, 비밀리에 이를 집행했다. 이는 전적으로 봉건적 잔혹성을 지닌 ‘야만적인 형벌’이었으므로 사망자·불구자 등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그런데도 일제는 “조선 국정에 알맞고 범죄의 예방진압에 유효적절하며 범죄에 대한 제재로서 단기자유형이나 소액의 벌금형에 비해 효과가 크고 그 집행방법도 편리”하다고 강변하면서 1920년 3월까지 조선인에게만 태벌(笞罰)을 실시했다.

다음으로 경찰범처벌규칙과 범죄즉결례를 통해 경찰에게 부여된 임무와 권한을 보자. 경찰범처벌규칙(1912년 3월 총독부령 제40호) 제1조에는 무려 87개에 달하는 항목을 들어, 여기에 해당하는 자는 경찰관서에서 구류 또는 과료로 처벌하게 했다. 일부의 주요 내용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
② 단체 가입을 강청하는 자
③ 이유 없이 타인의 회담 거래 등에 간섭하고 또는 소송, 쟁의를 권유, 교사하고 기타 그 밖의 분쟁을 야기케 할 행위를 하는 자 ④ 함부로 다수가 모여 관공서에 청원 또는 진정하는 자
⑤ 불온연설·불온문서 등을 게시, 반포하는 자
⑥ 유언비어 또는 허위보도를 만들어 내는 자
⑦ 전선 근방에서 종이연을 올려 다른 전선에 장해가 되는 행위를 하거나 하게 하는 자
⑧ 투견 또는 닭싸움을 시키는 자

조선인의 반일정치운동은 물론 일상생활까지 단속·금지하는 이와 같은 규정은 “실로 우리 사람들을 구박하기 위한 음흉하고 간사한 나쁜 계책이지 미연의 방지를 위해 제정한 것은 아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위반자를 ‘태형’에 처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구류나 과료보다는 태형이 가장 많이 남용되어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켰다.

또 범죄즉결례(제령 10호, 1910.12.)는 구류·태형 또는 과료에 해당하는 죄,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백원 이하의 벌금 혹은 과료의 형에 처해야 하는 도박범과 상해죄, 행정 법규 위반자를 보통 재판소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20원 이하의 고료, 30일 이하의 구류에 처하는 일본 내에서의 법에 비해 매우 과중하고 또 즉결 처분은 성질상 간단한 절차이기 때문에 이것을 집행하는 경찰관이 법률상의 지식 경험이 없으면 남용할 우려가 있었다. 즉결처분건수를 보면 1911년에 18,100여 건이었는데 1912년에는 21,400여 건, 1918년에는 82,100여 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것은 곧 헌병경찰에게 행정·사법 등의 방대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자의적으로 권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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