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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병합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고 한민족에게 노예적 삶을 강요하다

미상

일제의 한국병합 대표 이미지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1915)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일제의 침략 정책과 전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단행과 더불어 일본의 대외정책은 대륙침략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막부사회를 주도해온 사족들의 불만은 사회불안의 최대 요인이었다. 정한론(征韓論)의 강력한 부상은 이러한 분위기와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른바 정한파(征韓派)는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기 위하여 불법적인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켰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 중에 일본내각은 한국에 대한 기본 전략으로서 ‘① 한국의 독립을 보호한다. ②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 ③ 청일 공동보호국으로 한다. ④ 세계중립국으로 한다’는 네 가지 방안을 토의하였다. 이 가운데서 일제는 두 번째인 단독 보호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 한국 정세를 감안하여 신축성 있게 대처하다가 궁극적으로 한국의 주권을 탈취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국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대한외교정책을 수립했다.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1903년 12월, 일제는 영·미의 지지 하에 한국의 식민지화 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하였다. 주요 내용은 “제국은 한국에 대하여 정사상·군사상으로 보호의 실권을 거두고 경제상으로 더욱 우리 이권의 발전을 도모” 함이었다. ‘대한방침’에 기초하여 한국 식민지화를 위해 대한시설강령(大韓施設綱領)이라는 구체적인 방안은 수립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일제는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서울을 점령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 정부에 6개조로 된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제는 대한제국 독립 보장과 영토보전을 운운하면서 한국을 자국 영토나 다름없이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한 경의선을 강제로 부설하는 동시에 서울-의주간 군용도로 건설을 한국정부에 강요하였다.

8월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顧問傭聘)에관한협정서(한일협정서 또는 제1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를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도록 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하였다. 나아가 한국 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미국과는 1905년 가쓰라-태프트협약(桂-Taft協約)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았다. 또한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조약(Portsmouth條約) 결과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 식민지화’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배경으로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高宗)을 협박하고 친일파들을 매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되어 영국, 청, 미국, 독일 등 주한 외교공관들도 모두 철수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반(半)식민지 상태로 되었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을사조약 체결 강요를 반대한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주권 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외무대신 하야시 타다스(林董)와 통감 이토로 하여금 우선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물어 퇴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순종(純宗)이 즉위한 4일 후인 7월 24일 전격적으로 흉계를 꾸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안을 제시하였다.

이완용(李完用)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7월 24일 밤 통감 이토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한일신협약(이른바 정미칠조약)을 체결, 조인하였다. 한국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次官)의 채용, 경찰권의 위임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한일신협약에 따라 일본인 고문은 한국정부 관리로서 임용될 수 있었다. 차관을 비롯하여 고위관직에 일본인 다수를 등용·실권을 행사하는 차관정치도 실시되었다. 국왕과 정부는 통감의 결정 없이 정무를 실행하지 못하였으며, 주요부서는 일본정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대신이나 차관의 직무를 실행하였다. 통감이 한국 대신들의 회의를 주재하였고, 그것조차 시정개선이라는 미명하에 이미 결정된 사항을 대신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수준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기 위해 천황의 대권을 위임받은 통감이 한국에서 국정전반에 걸쳐 최고정책결정자로서 지위와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통치권은 통감의 수중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한국 황제는 형식상의 존재일 뿐이었다.

1909년 7월에는 한국의 사법 및 감옥에 관한 사무를 통감부에 위탁하는 건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여 사법권과 행형권(行刑權)마저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법무와 감옥·재판소가 폐지되는 대신 통감부의 사법청·감옥·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경찰사무위탁에 관한 각서교환을 통하여 경찰권도 통감부 휘하로 들어갔다. 경무총감부 설치와 동시에 한국 경찰권이 모두 통감부로 귀속되었다.

2 근정전에 일장기가 휘날리다

1909년 7월 6일 일본내각은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할 최종 방침으로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결정하고 같은 날 천황의 재가를 받아 일제의 한국 ‘병합’을 부동의 방침으로 공식 확정하였다. 그해 10월 6일 이토가 하얼빈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이 사건을 ‘병합’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고, 12월 4일 일진회로 하여금 ‘합병성명’을 발표하게 하였다. 1910년 4월 30일 마침내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게(寺內正毅)가 ‘병합’을 완성시킬 임무를 띠고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한국통치에 대해 무관조직론이 확정된 것이다.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 결정에 따라 통감부 조직 문제를 놓고 일본의 지배계층에서는 무관조직론과 문치조직론이 대립하였다. 즉, 일본 육군은 과도기의 한국지배 방안으로 러일전쟁 중 일본 육군이 한국 내에서 실시한 전시군정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무관조직을 고집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한 문관들은 전후 육군의 발호를 경계하여 문치조직을 주장하였다. 결국 이토가 통감으로 임명됨으로써 문치조직으로 낙착되었다. 그러나 항일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문치주의 주장자인 이토 자신이 적극 군대와 헌병을 증강하여 군정 당시보다 더 삼엄한 군대식 치안체제를 수립하고 이를 배경으로 ‘병합’ 음로를 서두르기도 했다.

데라우치 통감은 무관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우선 경찰제도와 헌병제도를 통합하여 육군소장인 헌병대장 아카이시 겐지로(明石元二郞)를 초대 경무대장으로 임명하여 악명 높은 헌병경찰체제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강제 병합에 필요한 여건들을 최종 마무리한 일본내각은 마침내 한국을 ‘병합’한 이후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①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해 정무를 통할(統轄)하는 권한을 가진다. ② 총독은 천황에 직접 예속해 조선에서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는 권리를 가진다. ③ 총독에게는 대권의 위임에 의해 법률사항에 관한 명령을 발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단, 이 명령은 따로 법령 또는 법률 등 적당한 명칭을 붙인다. ④ 조선의 정치는 되도록 간이하게 함을 요지로 한다. 따라서 정치기관도 역시 이 주지(主旨)에 따라 개폐한다. ⑤ 조선의 관리에게는 그 계급에 따라 될 수 있는 한 다수의 조선인을 채용한다는 것 등이었다.

일본인과 차별하여 한국인을 통치하고, 총독이 천황의 직속 하에 일체의 정무를 관장하며, 식민통치기구는 될 수 있는 한 간편한 조직으로 하고, 하급관리는 한국인으로 다수 충원한다는 것이었다. ‘민도(民度)의 차이’를 이유로 열등한 한국인을 차별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한 이념을 정책으로 나타낸 이 통치기조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통감부 하의 군사적 지배방침을 계승한 이 조치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조선인 채용건이다. 1905년 이후 한국정부에서 근무한 관료들을 그대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관료로 임용하고 계급도 그대로 인정한 것은 이들을 회유하여 식민지배를 안정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들 다수가 이미 일제에 대항할 의지가 없다는 판단도 있었기 때문이다.

3 조선인의 저항과 탄압, 그리고 친일파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과 고종 퇴위, 구한국군대 해산 등은 반일감정을 크게 자극했다. 해산한 군대의 의병 합류로 반일투쟁의 무장력과 조직도도 높아져 조선 민중의 저항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의병과 일본군경 사이의 충돌회수는 1907~1910년까지 304회, 1,450회, 950회, 147회로 나타났다. 1908년과 9년에서 교전이 절정에 이른 뒤 10년부터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1909년 9월 일본군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세력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의병은 최소 사망 16,700여 명과 부상자 36,77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사망 130여 명과 부상 270여 명이었다. 가옥 67,000여 채가 소실되거나 파손되기도 하였다. 양측의 피해규모로 볼 때, 전쟁이라기보다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현저한 군사력 열세가 빚어낸 참극이었다.

한편 일제는 신문지법(1907.7.24.)·보안법(1907.7.27.)을 공포하여 침략정책을 호도하는 한편 반일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각지 이사청도 신문지·잡지 등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는 동시에 이를 활용하는 데 앞장섰다. 신문지의 발행·게재내용·정간·압수·폐간 등에 관한 권한이 모두 이사관에게 있었다. 국외에서 발행한 『공립신보』·『대동공보』·『해조신문』 등의 국내 유입은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국제정세와 한국의 장래문제 등에 관한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친일지인 『군산신보』·『조선시보』·『부산일보』·『평양일보』·『원산매일신보』·『수원신보』 등은 발간을 장려해 식민정책을 널리 홍보하는데 활용했다.

일제는 무력으로 반일세력을 탄압하는 한편, 친일단체를 이용하여 침략에 유리한 정치 환경들을 만들어나갔다. 1905년 10월 15일 일진회로 하여금 이른바 ‘한일보호조약’ 체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일진회는 외교권이양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은 선진이자 선각의 나라이다. 동양평화를 회복하는 데 뜻을 두고 십수 년 전부터 간절하게 주선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모두 의협심에서 나온 발로이다. … 독립보호와 유지강토는 대일본황제의 조칙이 세계에 공포했으니 쓸데없이 의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두둔하고 나섰다. 또한 일본은 민의를 조작하기 위해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윤시병(尹始炳) 등 친일정상배들을 앞세워 유신회·진보회·일진회 조직을 지원하였다.

친일세력들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군수물자를 함경도까지 운반하는 데 앞장섰다. 일부는 간도 일대에 들어가 러시아군의 동향 등을 파악하는 간첩행위까지 하였다. 또한 경의선 철도공사에도 회원을 강제로 동원하였는데, 그 인원이 최소 20여 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망할 순간에도 친일세력들은 한몫을 챙기기 위해 경쟁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매국행위를 벌였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이 대한제국을 최종 ‘병합’하기로 결정하기 이전인 2월, 송병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매국 흥정을 하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병합’을 주장했으나 일이 늦어지자 직접 일본으로 가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등을 상대로 흥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완용도 이에 질세라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와 ‘병합’ 문제를 교섭하였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하고 있던 송병준에게 내각을 맡기게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는 전술이었다. ‘병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다.

‘병합’에 필요한 사전 공작을 마무리한 데라우치통감은 1910년 8월 16일 총리대신 이완용, 농공상대신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러 합방조약의 구체안을 밀의하고, 18일에는 이를 각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22일 순종 앞에서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치게 한 후 그날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인을 완료하였다. 조인 사실은 1주일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마침내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을 시켜 황제의 어새(御璽)를 날인케 함으로써 칙유와 함께 합방조약이 반포되었다.

일본은 조약 공포와 함께 ‘한(韓)’이라는 국호를 폐지하고, 통감부를 대신하여 조선총독부를 개설, 초대총독에 데라우치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합방에 ‘공’을 세운 경술국적(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을 비롯한 75명의 친일파들에게 매국의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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