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임오군란

임오군란

하급 군인과 하층민, 정부의 개화 정책과 부정 부패에 반발하여 일어나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대표 이미지

별기군

National Anthropological Archives, Smithsonian Institution

1 임오군란의 개요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7월 19일부터(양력, 이하 양력 표시) 7월 24일까지 서울의 하급군관들과 도시빈민들이 개항 이후 시행된 개화정책과 집권세력에 저항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2 임오군란의 배경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19세기 말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고 있었다. 중국이 1840년(헌종 6)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인 중화체제가 붕괴하고 자본주의적 세계체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의 국제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은 1873년(고종 10) 11월에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주관하였고 고종의 비인 왕후 민씨(명성 황후)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조선보다 먼저 국제질서에 포섭된 일본은 정한론을 앞세워 1875년(고종 12) 운요호사건을 일으켰다.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1876년(고종 13) 조선에〈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강요하였다.

문호 개방 후 조선은 보수관료와 유생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조선은 외국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우선 개항 직후 1876년(고종 13)에 일본에 김기수(金綺秀) 일행을 수신사(修信使)로 파견하였고 1880년(고종 17)에는 김홍집을 2차 수신사로 파견하였다. 수신사 일생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변화한 모습과 앞으로 조선이 서양 각국과 맺을 수교에 대비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를 통해 개화정책의 중심기관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으며 군비 강화를 위해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두었다. 1881년(고종 18)에는 조사시찰단을 만들어 일본 정부의 운영과 조직에 관하여 시찰하였다. 청은 김윤식을 영선사로 파견하여 텐진의 기기국(機器局)에서 무기제조술을 배우게 하였다.

정부의 개화정책 추진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은 물론이고 개화정책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도 생겨났다. 개항 이후 단기적으로 이득을 본 자들은 서울의 관료층과 상인들이었다. 개항장을 통해 일본으로 쌀이 수출되었고 이로 인하여 쌀값이 폭등하여 서울 하층민의 경제적 압박이 가중되었다. 더구나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큰 가뭄이 들어서 쌀값이 크게 올랐고 이로 인한 서민들의 생활고는 극심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고종 19)에 쌀값은 개항 당시인 1876년에 비해 2~3배 상승했을 정도였다.

구식군인들도 극심한 생활고로 정부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는 1881년(고종 18) 4월에 군제개혁을 단행해 기존 중앙군인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으로 축소하였고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다. 별기군은 일본공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를 군사 고문을 초빙하여 일본식 군사훈련을 하였다. 창설 초기에는 5영의 군인 중에서 80명을 차출하였으나 후에는 상류층 자제 100명으로 구성하였다. 군제개혁에 따라 5군영의 상당수 군인들이 실직하였으며 남은 군인들도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하여 낮은 대우를 받았다. 종래 5군영 소속의 구식군인들은 근대적인 개혁으로 자신들의 처지가 악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란 직전에 구식군인들은 13개월 치나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3 임오군란의 경과

1882년(고종 19) 7월 19일(음력 6월 5일)은 13개월이나 체불되었던 무어영 소속의 구 훈련도감 군인들이 봉급을 받는 날이었다. 이들은 현재 숭례문 근처의 선혜청(宣惠廳) 창고인 도봉소(都奉所)로 밀려들었다. 그런데 병졸들이 받은 쌀에는 쌀겨와 모래가 섞여있던지 물에 잠겨 썩어 있었고 그나마 정량에 미치지 못하였다. 김춘영(金春永), 유복만(柳卜萬), 정의길(鄭義吉) 강명준은 이를 보고 격분하여 창고지기를 구타하였다. 당시 녹봉미 책임자였던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는 진상을 조사하고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주동자 체포를 명령하고 이들을 잡아가두는 강압적 조치로 일관하였다. 7월 22일 주동자 4인을 체포하여 동별영(현재 종로 3가 인의동)에 구금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그 중 2인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이 투옥된 이들을 살리고자 구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동별영으로 모이자는 통문을 돌렸다. 당시 서울에 상주하는 구 5군영의 하급 군졸들은 모두 도성 10리 안팎에 사는 빈민층에서 충원되고 있었다. 어영청, 동별영 훈련원 등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 지금의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일대이기 때문에 이들은 그 언저리에 자리 잡고 살았다. 즉 현재의 광장시장 주변이나 광희문 근처, 예지동, 연지동, 을지로 5~6가 일대 성문 밖 왕십리가 바로 이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군병은 봉급은 박봉으로 군졸 업무만을 해서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대부분 행상을 하거나 좌판을 벌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군비 조달이 어려웠던 정부는 이들로 하여금 장사의 길을 열어주었다. 서울에 최초 시장인 선혜청시장이나 배오개시장은 모두 군병장사치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6월 9일 동별영 앞에 결집한 군인들과 가족 그리고 이태원, 왕십리 등지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은 등소(等訴)운동을 통해서 사태를 해결해보려 하였다. 하지만 무위영의 대장 이경하가 해산을 지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성난 군중은 이경하의 부하 여러 명을 죽이고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 그의 집을 파괴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군인들은 운현궁으로 가서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무장한 군인들과 하층민들은 4대로 나뉘어져 행동하였다. 1대는 종로에 산재해있는 포도청, 의금부, 민씨 세도가, 악덕 시전상가를 차례로 습격하였고 도봉소 사건으로 구금되어 있던 주동자 4인을 풀어주었다. 시전상가와 시전상인들이 습격을 당한 것은 이들이 강력한 상권을 유지하면서 생활필수품을 독점판매하다시피 하여 하층민의 생활고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2대는 동대문 근처에 있는 남병영(南兵營) 하도감(下都監) 습격하여 별기군 교관인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를 살해하였다. 3대는 서대문 밖 경기감영으로 몰려가 전직 선혜청 당상이었던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金輔鉉)을 찾았으며 그곳의 무기고를 탈취하였다. 그들은 이어 일본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였다. 이때 일본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공사관 직원은 스스로 공사관 건물을 불태우고 서울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이 사건은 한일 양국사이에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24일 새벽 양화진에 도착한 일본 공사 일행은 오전 10시 부평에 이르렀고 오후 3시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인천에 도착해서도 주민들의 습격을 받자 일본 공사 일행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4대는 왕후 민씨(명성 황후)가 치성을 드리는 곳인 서울 근교의 절과 당집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6월 10일에 동별영에 모인 군중은 대원군의 형으로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이최응(李最應)의 집을 습격하고 그를 죽인 후 창덕궁 돈화문으로 몰려와 궁궐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들은 궁으로 피신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찾아서 죽이고 왕후를 찾았다. 이때 왕후는 궁을 탈출하여 광주와 여주를 거쳐 자신의 근거지인 장호원으로 몸을 피하였다.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하여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개항 이후 실시한 개화 조치를 모두 없애 버렸다. 군인들에게 녹봉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없애고 5군영제를 다시 설치하는 군제 복구를 단행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기존의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등 그간에 취해졌던 근대적 제도를 모두 없앴다. 대원군은 왕후 민씨의 국장을 선포하였다.

4 임오군란 발발 당시 조선의 외교정책

임오군란은 조선이 미국 등 서양 국가들과 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중국과도 새로운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인식하고 중국과 교섭하고 있는 와중에 일어났다. 이 사건은 조선과 중국 외교관계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버렸다.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즈음 조선은 새로운 국제질서가 전통적인 사대질서와 조화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조선은 중국과 기존 외교 관계인 사대질서의 변경을 추진하였다. 조선은 미국과 1882년(고종 19) 5월 22일(음력 4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 협상을 마무리 할 단계에서 중국과 구체제 청산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조선은 청에게 ‘① 청이 취해 온 해금조치를 풀고 조선과 통상할 것 ②조선이 전통적으로 취해온 청국 사신을 접대하는 제도를 폐지할 것 ③전통적인 사신 파견 제도를 폐지하고 조선 사신이 베이징에 상주하는 제도를 만들 것’ 등을 제안하였다. 청은 해금조치 해제만을 받아들였을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②의 사신 접대 제도 폐지와 ③의 사신 파견 제도 폐지는 기존 중화질서 속에서 종주국-조공국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주사신제도는 서양 국제법이 정하는 대등한 국가 간에 공사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청이 미국과 이미 조약을 체결하였고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체결하고 있으니 청국과 조선의 관계도 대등한 독립국 간의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조선의 의도였다. 이는 중국의 새로운 조선 정책과 상이한 것이었다.

5 청군의 임오군란 진압과 내정간섭

임오군란은 국내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한중일 간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중국은 1880년대 들어 국경 주변에 대한 확고한 대책을 수립하려 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국제질서가 변동하고 있는 시기에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겪고 있던 중국은 조선을 기존 “사대질서의 조공국”이 아니라 ‘서양 국제법의 속국’으로 만들려 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이와는 전혀 다른 외교 노선을 구상하고 있었다. 임오군란이 터지자 중국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중국은 베이징에 있던 조선대신 이유원(李裕元)에게 조선군주가 이 정변을 원하는가는 타진하였다. 청국은 그렇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받자 바로 조선으로 출병하였다. 책봉국의 군주가 원하지 않는 정변을 당했는데 천자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출병의 구실이었다. 청은 군사 6,000명을 출병시켰으며 왕십리·이태원 지역을 습격하여 군민을 살상하였고 대원군을 청의 텐진으로 납치해갔다. 임오군란이 진정된 후에도 청은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1884년(고종 21) 봄까지 오장경(吳長慶), 원세개(元世凱)가 지휘하는 군사 3,000명이 주둔하였고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까지는 1,500명이 주둔하였다.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은 조선에 대한 형식적 조공관계를 서양 근대 국제법상 ‘속방’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 청은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마젠창(馬建常)과 독일인 묄렌도르프(P.G. Möllendorf) 등 30여 명의 외국인을 정치·외교 고문으로 보내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였다. 1882년(고종 19) 9월에 조선과 청 간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는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명시하였다. 이후 청 상인에 대한 ‘내지통상권’도 인정받으면서 청 상인이 조선의 어느 곳에서나 자유롭게 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6 일본 및 각국의 대응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하나부사 공사에게 군함 4척, 육군 1개 대대를 주어 조선에 파견했다. 일본은 임오군란 중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일본은 이 기회에 배상금을 받아 내고 나아가 조선과의 통상 조건을 한층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할 때 조일 양국은 관세율을 정하지 못하였다. 조일수호조규 제 11관에 따라 1876년(고종 13) 8월부터 관세율에 관한 협상을 시작하였지만 임오군란 때까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 맺은 1883년(고종 20) 〈일본인민무역규칙병해관세목병해관세칙(日本人民貿易規則幷海關稅目幷海關稅則)〉(1883년 7월 15일, 음력 6월 22일)에서 수입세율은 8~10%로 정해졌다. 일본은 또한 〈한일통상장정(韓日通商章程)〉(날짜는 위와 같음)을 통하여 최혜국대우를 보장받았다.

조선과 청 그리고 일본과의 통상조건 변화는 미국 등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임오군란 이전인 1882년 4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관세율은 수입품에 최대한 30%의 관세율을 적용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임오군란 후 최혜국대우 조관이 적용되면서 관세율이 8~10%로 하향 조정되었다. 한편 일본은 공사관이 불탄 것에 대하여 50만원의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7 임오군란의 결과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조선 정부는 청에 군란 진압을 요청하였고 곧이어 청은 군대를 파견하여 군란을 진압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은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하였고 국내 정치세력은 분열되었다. 개화세력은 청에 의해 재집권에 성공한 민씨 정권과 타협하면서 조선사회를 개혁하려는 온건개화파와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급진개화파로 나뉘었다. 급진개화세력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1884년(고종 21) 조선에 주둔한 청군이 청불전쟁 때문에 일부 병력을 철수하자 청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고자 한 일본을 끌어들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