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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뒤바꾼 일본과 청의 전쟁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 대표 이미지

청일전쟁을 묘사한 일본의 목판화

안산어촌민속박물관

1 불바다가 된 평양

1894년(고종 31) 8월 17일 1만 2천 명의 일본군 병력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평양에는 섭지초(葉志超) 휘하의 봉천군(奉天軍)과 이홍장(李鴻章) 예하의 정예부대를 포함해 1만 5천 명의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당시 청군은 크루프포 등 막강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일본군이 삼면에서 벌인 입체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일본군은 오전 8시경 모란봉을 점령했고 청군은 오후 4시 40분경 을밀대에서 백기를 올렸다. 임진왜란 때에도 평양에서 명과 일본 간에 전투가 벌어진 바 있다. 300여 년 전에는 명이 평양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의 대륙침략의 야망을 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이 승리했다.

2 10년 전에 싹튼 불씨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청과 일본 사이의 결전이었다. 이 전쟁은 1894년(고종 31)에 일어났지만 그 불씨는 10년 전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 두 나라는 갑신정변 당시에도 경미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미 한 차례 군사적으로 충돌한 적이 있다. 갑신정변은 한편으로는 조선의 정쟁이었지만 청일 양국 간의 세력 다툼이라는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청은 조선을 중화제국을 지키는 울타리(藩邦)로 여긴 반면에 일본은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따라서 양국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당시 중화제국 질서는 안팎으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하여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국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이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과 손을 잡은 것도 청이 청불전쟁 때문에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은 짧은 전투 끝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은 곧이어 군함 7척과 육군 2개 대대를 증파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겉으로는 직접 청군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청군과 팽팽히 맞서는 형국이었다. 자칫 군사적 충돌로 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양국의 실력자 이홍장(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직접 협상에 나섰다. 그리고 1885년(고종 22) 4월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 두 나라는 이 조약을 통해 조선에 파견한 군대를 동시에 철수하기로 합의하였다. 조선은 군사적으로 중립화되었으며 두 나라는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울러 텐진조약은 추후에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상대방에게 통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이 조항이 10년 뒤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3 고부민란, 동아시아를 뒤흔들다

1894년(고종 31) 1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는 19세기 후반 일어난 여느 민란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파만파 파급되어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들어 놓고야 말았다.

고부민란은 당시 삼남지역에 퍼져 있던 동학 조직을 매개로 인근 고을로 확산되었다. 농민들은 1894년(고종 31) 3월 백산에서 재봉기한 후 고부, 태인, 정읍, 고창, 영광 등 여러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농민군은 고부 황토현전투와 장성 황룡촌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쳤으며 4월 27일에는 전주성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정부는 이에 충격을 받고 임오군란 때처럼 청에 군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청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섭지초(葉志超)와 섭사성(聶士成) 휘하의 2,500명의 군대를 아산만에 상륙시켰다. 청은 군대를 파견하면서 텐진조약의 규정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에 통보하였다.

조선에 개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국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휘하의 혼성여단 7,000명의 병력이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서울간의 요충지를 장악했다. 두 나라 군대가 10년 만에 조선에 다시 들어와 팽팽히 대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서둘러 농민군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이들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하였다(전주화약). 그리고 양국에게 파병의 원인이 해소되었으니 군대를 거두어 갈 것을 요청하였다. 청은 이러한 요청에 응하겠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거부하였다. 당시 일본은 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할 것을 청에 제의하였다. 청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두 나라 사이의 군사적 긴장은 높아져만 갔다.

4 풍도 앞바다에서 시작된 전쟁

일본이 1894년(고종 31) 조선에서 벌인 첫 번째 군사 행동은 6월 21일(음력)의 경복궁 점령이었다.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 친일적인 정부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청군과 직접 충돌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전쟁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이틀 뒤인 6월 23일 아산만에 있는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졌다.(풍도해전) 일본 함대가 증원 병력을 싣고 오던 청의 수송선단을 습격한 것이다. 일본이 아직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전투행위는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27일에는 성환전투에서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던 청의 육군을 격파하였다. 일본은 이렇게 서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난 뒤 비로소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게 일본이 기선을 제압했지만 아직 전세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청은 군대를 증파하여 평양에 집결시켰다. 일본군은 북상하여 그해 8월 평양에서는 두 나라 군대 사이에 총력을 기울인 결전이 벌어졌다(평양전투). 한편 이 무렵 압록강 어귀에 있는 해양도 앞바다에서는 청의 북양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이 이 두 전투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전장은 중국 땅으로 옮겨갔다.

일본군은 이후 계속 청군을 추격하였다. 평양전투를 치른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하였고 본국에서 증파된 제2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남만주에 위치한 금주성(錦州城)을 점령하였으며 제2군은 요동반도 끝에 있는 여순(旅順) 요새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이듬해 1월 산동반도에 위치한 위해위([威海衛)까지 쳐들어가 북양함대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5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발해만을 지키는 두 요새인 여순과 위해위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청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의 요청으로 강화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95년(고종 32) 3월 두 나라 사이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으로써 청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청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였다. 청은 우선 2억냥에 이르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일본에 지불해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만, 요동반도, 팽호(澎湖) 열도 등 자국의 영토도 일본에 떼어주어야만 하였다. 게다가 일본은 청 내에서 구미 열강과 동등한 통상상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기세는 곧바로 제동이 걸렸다.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의 배상조건이 너무 가혹하니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군사적 위협까지 포함된 삼국간섭에 굴복하여 요동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3천만 냥의 배상금을 추가로 받기로 하였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여 일본과 맞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획득한 막대한 배상금을 바탕으로 이후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군비확장 10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군사적 강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청은 이후 조선에서 종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축출되었으며 자국 영토까지 열강에 의해 분할되는 등 중화제국의 최종적 붕괴를 겪어야만 하였다.

6 한국사에서 청일전쟁은

1894년(고종 31)은 한국의 역사에서 매우 길었던 한 해였다. 동아시아의 차원에서 볼 때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이지만 조선 안에서는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이 동시에 진행된 해이기도 하다. 시간적으로만 동시에 진행된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로 서로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

고부민란으로부터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이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전개과정에서도 청일전쟁과 맞물려 돌아갔다. 1894년(고종 31) 가을에 시작된 제2차 농민운동은 반외세 항쟁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우금치전투에서는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우기까지 하였다. 일본이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농민군을 공격한 것은 농민군이 청일전쟁을 수행 중인 자국 군대의 배후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대응은 청일전쟁의 한 부분이었던 셈이다.

청일전쟁은 갑오개혁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농민전쟁이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한다면 갑오개혁은 청일전쟁의 결과 시작될 수 있었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 정부 그 자체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의 결과로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갑오개혁을 뒷받침한 것은 그들의 전쟁 도발의 명분으로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영향력을 떼어놓고는 갑오개혁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갑오개혁에는 자주성 문제가 마치 원죄처럼 따라다니게 되었으며 결국 이 문제 때문에 이를 추진한 개화파 정부가 붕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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