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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

1920년대 무장 독립 투쟁의 최대 성과

1920년

청산리 대첩 대표 이미지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청산리 전쟁의 배경

북간도 지역은 20세기 초 이주한인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인식되던 곳이었다. 이주 한인들은 이곳에서 삶의 뿌리를 강고하게 내리고자 교육기관을 먼저 설치하였다. 그것은 서당이라는 전근대의 교육기관과 서전서숙이라고 하는 ‘북간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과 같은 근대적 교육기관들의 설립으로 표면화되었다.

1906년 서전서숙이 설립되면서 북간도에도 근대적 민족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본 이상설은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북간도 용정에 근대적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설립 초기 이상설은 학생 모집의 어려움에 봉착하자 김학연과 남위원을 통하여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서전서숙은 1907년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면서 일제의 감시와 강압에 못이겨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1908년 서전서숙의 맥을 잇는 명동학교가 설립되면서 민족주의 교육은 지속되었다.

1910년대 북간도의 민족학교는 명동학교를 비롯하여 100개에 달할 정도로 불꽃처럼 전개되었다. 이처럼 진보적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간도지역은 항일운동의 인적 재배지로서의 기능도 담당하게 되었다. 학교 운영은 경비 문제, 중국 지방 정권의 방해공작 등 상당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민족학교 운영이란 사실상 독립운동과 같은 움직임의 하나였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기지가 정착되기에 이른다. 북간도는 독립전쟁론을 구현시킬 독립운동기지의 터전을 굳혀 갔으며, 나자구의 동림학교(일명 나자구사관학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등이 그 결실로 나타났다. 나아가 1919년 3·1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도 민족교육기관을 통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일제의 한국 강점으로 인해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노령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던 중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 단체들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종전의 조직을 독립군 단체로 전환시켜 갔다. 이들 단체들은 한·만 국경 지대와 만주 및 연해주 지역에서 적극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국내 진공작전을 통해 일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독립군 단체들의 국내 진공작전은 1919년 후반부터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서․북간도의 여러 독립군 단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선 대한독립군은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혜산진을 점령한 뒤 갑산으로 진격하여 들어온 후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0년에는 대한독립군을 필두로 국민회군·북로군정서 등이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전투는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에 의한 삼둔자 봉오동 전투였다. 삼둔자 전투는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강계 등지로 진공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격파한 후, 국경을 넘어 홍범도부대를 추격해 오던 일본군을 안산 촌락 후방까지 유인․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만주지역 한국독립군 단체들의 국내 진공작전이 계속되자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지역을 공격해 오자, 홍범도·최진동 등은 일본군을 유인·공격하여 일본군 40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2 청산리 전쟁의 전개

북로군정서의 경우는 약 600명의 정예 병력과 100명 가량의 보충대 병력이 1920년 10월 12일부터 13일 사이에 청산리 부근에 도착해 있었다. 청산리대첩 직전 북로군정서의 편제를 살펴보면, 사령부 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 연서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김훈·백종렬·한건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겸임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 서리 강화린(姜華麟),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등이었다.

대한독립군은 홍범도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300~400명이었으며, 연합부대의 형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청산리독립전쟁 직전에는 4개 대대 1,600명의 큰 군단을 편성하고 있었다. 부대 편성은 허근과 방우룡이 지휘하는 의군단 혼성부대와 최진동의 도독부대, 김성金星이 지휘하는 신민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청산리독립전쟁 당시 독립군의 병력규모는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국민군·훈춘국민회·대한광복단·대한의민단·신민단 등을 합하여 약 2,000명 정도였다.

전력상 절대적으로 열세인 독립군단들은 맹렬한 기세로 추격해 오는 토벌대를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불리했음에도 독립군단들은 10월 13일에는 이도구 합마당에서 대한국민회·대한신민단·훈춘한민회 등의 대표자들이 모여 홍범도의 지휘하에 체계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작전 수행을 위해 병력과 군수물자를 동원하는 한편, 일본군의 동향에 대한 정보수집에도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독립군들은 용정촌과 두도구·국자가 등 큰 마을에 있는 상가지역을 방화하여 일본군이 숙영할 수 있는 곳을 없앴으며, 일본군의 동향을 상세하게 보고 받을 수 있는 지역간의 상호 연락망을 갖추었다. 이 연락망을 통해 독립군단은 작전지역에 도착한 일본군의 병종(兵種)과 인원, 도착시간, 통역하는 조선인 등의 이름까지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 중에 이동휘의 노력으로 러시아의 흑룡강 방면에서 총기 1,600정이 군정서에 전달됨으로써 독립군의 전력과 자신감은 한층 더 고조될 수 있었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홍범도연합부대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과도 연합작전을 논의했다. 이 회의는 10월 10일 묘령에서 개최되었는데, 군정서의 현천묵 등이 주장하는 피전책(避戰策)은 주요 논의 대상이었다. 당시 독립군단은 일본군과 대규모의 교전이 중국정부의 반감을 야기하는 한편, 일본군의 병력증파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더 이상의 교전회피가 오히려 불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되자 독립군은 전면적인 전투태세에 돌입하였으며 청산리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독립전쟁은 일본군 토벌대 소속의 동 지대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을 공격하기 위해 청산리 방향으로 진격해 오다가 1920년 10월 21일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白雲坪)부근의 골짜기에서 기습공격을 받고 패퇴한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1920년 10월 26일 새벽까지 약 6일간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한국독립군은 일본군 토벌대를 맞아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천수평·어랑촌·맹개골·만기구·쉬구·천보산·고동하 등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돌입한 일본군 동 지대는 야마다(山田)연대를 삼도구 방면으로 파견하여 10월 20일을 기해 북로군정서에 대해 총공격을 가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도구에 주둔하면서 홍범도의 지휘를 받던 연합부대도 동 지대의 주력이 19일 오전 8시를 기해 이도구로 출동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기병과 포병을 포함하는 약 5,000명의 병력으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를 대상으로 10월 20일 총공격을 가하는 군사작전을 계획하였다.

백운평전투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독립군부대가 1920년 10월 21일 산전 연대를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의 백운평 부근에서 섬멸한 전투로,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승리였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시작된 청산리 전투의 시작은 백운평이다. 청산리대첩기념비는 백운평 전적지에서 약 5km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왜 일본군은 이곳 골짜기까지 독립군을 추격했을까. 그것도 무려 6일간이나. 그 해답은 일본어전회의에서 결정된 ‘간도불령선인쇄토작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대륙침략에 걸림돌이 되는 한국독립군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며,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청산리전역이다. 청산리 전역이야말로 독립군 정규군과 일본군 정규군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이다. 독립군 부대 약 2,800여 명, 일본군 부대 5,000여 명의 드라마틱한 전투장면은 북로군정서 이범석의 자서전 『우등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산세가 험해 일본군이 가졌던 야산포가 유명무실했던 전투에서 1905년 개발된 38식 총과 구경 7.62mm의 중기관총은 아주 위력적이었다. 전술의 고급 가치를 발현했던 전투이자 승전이었다. 이우석 수기에 보이는 청산리 전투의 한 장면이다.

청산리 백운평에 도착한 것은 음력 9월 9일이다. 적병이 무산 간도에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어 전방 입구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전투 준비를 하던 중 왜적 부대가 후방으로 우회작전을 하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있으므로 포위하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후퇴하여 산중으로 들어갔다. 우리 군대는 안도현으로 간다고 한다. 그런데 식량을 구하려고 밤중에 감자를 운반하기로 하고 결사대 60여 명을 뽑아 감자 구덩이를 찾아 밭으로 갔다. 밤새도록 가져온 감자는 한 사람에게 20개씩 돌아갔다. 1일 1식 3개 이상 못 먹는다고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중대는 적군과 싸웠다. 여기서 본대와 합류되었다. 적의 기병을 섬멸하였으나 적에 포위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적은 우리를 포위한 줄 알고 공격하면 독립군은 교묘히 빠져나가고 저희들은 자상자천으로 자멸하기도 한다. 3일간 전투에서 적은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를 형편이다. 우리 군대의 복장이나 모자가 비슷함으로 완루구 전쟁에서는 안개가 잔뜩 낀 가운데 무분별로 저희끼리 싸워 죽기도 하였다. 우리는 기적으로 포위를 뚫고 살았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싸웠다. 주민들에 주먹밥을 얻어먹고 싸웠다. 이 비 오듯 하는 중에 치마 자락의 주먹밥을 던져주는 애국부인들은 독립군의 용기를 백배나 나게 했다.

기념비 아래 길을 따라 어랑촌에 이르기 전 직소폭포가 나온다. 겨울철에는 사람 이외 기계류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온통 얼음판이다. 이곳에서 산비탈을 조금 올라가면 1985년 화룡시에서 건립한 목재로 만든 청산리기념비가 서있다. 백운평 현장과 가깝다. 어느 뜸엔가 산 속 깊숙이 들어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본군 역시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청산리 전쟁은 독립군기지를 개척한 독립군의 준비된 전쟁이며, 연합작전으로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서부전선의 전투가 끝난 뒤에 러시아로 넘어가서 밀산으로 집결할 때도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청산리 전쟁 역시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틈 한인사회와 독립군간의 연동관계는 상당히 긴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3 청산리 전투의 영향

청산리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독립군 연합부대는 국민회군․의군부․광복군단 등 독립군 단체들이 집결한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밀산에 집결한 독립군 단체들은 계속되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노령 한인 거주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계획하였다. 러시아 한인 거주지역으로의 이동계획은 당시 러시아의 10월혁명 성공 후 레닌 등이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약속함에 따라, 이들 역시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립군 단체들은 노령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밀산에서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새로운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후 노령지역으로 이주하여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6월 시베리아에서 적군(赤軍)에 협조해 오던 한인부대인 자유대대 및 사할린 부대가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자유대대와 사할린 부대 간의 싸움에 휘말려 수백명이 죽고 포로가 되는 참변을 당하였다. 이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의 장기항전계획이 좌절됨에 따라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만주지역으로 이동, 종래의 무장독립군의 활동 근거지를 재편성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재개하였다.

4 청산리 기념비로 가는 길

화룡은 용문, 용지, 용수평과 같은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하늘에서 비늘이 눈꽃처럼 떨어질 정도로 용들 간의 갈등과 다툼 많은 곳인데, 전설 속에서 박룡과 백두산 용녀가 서로 조화롭게 사는 고장이라는 뜻으로 화할 화(和)자를 써서 화룡이라 했다. 시내에서 청산리 가는 길은 지금도 비포장이다. 그 비포장을 30분 달려야 청산리 전투 초입에 다다를 수 있다.

화룡은 지리적으로 백두산의 끝자락에 속한다. 지금도 백두산 송이하면 화룡산을 최고로 친다. 그만큼 나무가 울창하다는 뜻이다. 아름드리 나무를 꽉 채운 트럭이 비포장도로에서만 볼 수 있는 황토색 콩가루를 연신 만들면서 시내 쪽으로 달려간다. 또 온다. 이번에는 길이 30m 이상으로 보이는 트럭이 커브에서 목을 힘겹게 돌리면서 내려온다. 몇 차례 더 만나면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가 눈에 들어온다. 17.6m,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관련 기념비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높이를 자랑한다. 17.6미터의 높이에 계단의 수까지 합쳐져 청산리 마을로 들어오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명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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