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거칠부

거칠부[金居柒夫:金荒宗:居七夫智]

문(文)·무(武)에 모두 출중한 신하

미상

거칠부 대표 이미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신라 진흥왕대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국사를 편찬하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지역까지 신라의 영역을 넓히는 데 공헌했다.

2 거칠부의 가계

거칠부(居柒夫)의 가계는 『삼국사기』 거칠부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거칠부는 신라 제 17대 왕인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5대손으로, 조부는 각간(角干) 잉숙(仍宿), 부친은 이찬(伊飡) 물력(勿力)이다. ‘잉숙’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 거칠부전을 제외하면 사료상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잉숙’과 한자가 유사한 ‘내숙(乃宿)’이 보여, 둘을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부친인 물력(勿力)은 법흥왕 11년인 52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진봉평신라비의 명문(銘文)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울진봉평신라비의 내용에 따르면 비가 세워졌던 524년에 물력은 신라 관등 중 제 7위인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지니고 있었는데, 거칠부 열전에서는 제 2위인 이찬 관등을 소지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524년 이후 관등이 상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지증마립간 13년(512년)에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異斯夫)가 내물마립간의 4세손으로 거칠부와 숙질(叔姪)관계였다.

3 젊은 시절의 활동

『삼국사기』 거칠부전에 따르면, 거칠부는 젊은 시절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사방을 주유하였는데 이 시기에 고구려에 가서 혜량법사(惠亮法師)의 불경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거칠부가 고구려에 갔던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젊었을 때라는 점, 그리고 진흥왕 5년(545)에 처음 신라에서의 활동이 나타나는 점 등으로 보아 대략 법흥왕대로 추정할 수 있다. 법흥왕 시기 신라와 고구려와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지마립간 16년(494년)에는 신라의 장군 실죽(實竹)이 살수(薩水) 근방 들판에서 고구려와 싸우다 견아성(犬牙城)으로 물러났는데, 고구려군이 쫓아와 포위하여 백제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있었다. 소지마립간 18년(496년)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즉 5세기 초반 이후로는 고구려와 신라는 잦은 무력 충돌을 일으키던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혜량이 거칠부가 신라에서 온 것을 알고 그를 따로 불러내어 신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한 것은 이러한 양국의 관계를 고려한 충고였을 것이다. 거칠부는 혜량의 충고를 받아들여 신라로 돌아갔다. 이 일을 계기로 이후 혜량은 신라에 와서 불교 진흥에 공헌하였다.

4 국사(國史)의 편찬

신라로 돌아간 거칠부는 관직에 진출하여 그 지위가 신라 관등 중 5위인 대아찬(大阿飡)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시기의 활동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국사를 편찬한 것이다. 진흥왕 6년(545)에 이사부가 왕에게 나라의 역사를 편찬할 것을 주청하자,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거칠부는 국사 편찬의 공을 인정받아 그 관등이 제 5위인 대아찬에서 4위인 파진찬으로 올랐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사부와 거칠부는 모두 내물마립간의 후손이었다. 이전에는 박·석·김씨 왕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내물마립간 때부터 김씨 왕족이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물마립간의 후손들이 국사의 편찬을 건의하고, 진흥왕의 재가를 받아 편찬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 김씨 왕실이 국사 편찬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지증왕·법흥왕대의 성공적인 정복사업(우산국, 금관가야 영유), 불교공인,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등 중요한 정치적 업적을 기술할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국가 차원의 역사서 편찬 사업은 신라에서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초기에 만들어졌던 『유기(留記)』를 개정하여 영양왕 11년인 600년에 『신집(新集)』을 편찬하였다. 백제는 근초고왕 30년인 375년에 『서기(書記)』를 편찬하였다. 이렇듯 삼국이 모두 국가적으로 역사서를 편찬했던 것은 자국의 역사를 기록 편찬함으로써 왕실의 신성성(神聖性), 왕의 훌륭한 업적 등을 널리 알림으로써 자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무장(武將)으로서의 활약

국사 편찬 이후 거칠부는 진흥왕의 신임을 얻어 상당히 중용되었던 것 같다. 진흥왕 12년(551년)에 거칠부는 고구려 공격의 선봉에 나서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 거칠부전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거칠부전의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신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았다는 내용은 동일하지만, 거칠부전에서는 거칠부와 함께 고구려 공격에 나선 다른 장군들의 이름과 백제와의 협공 사실이 부가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고구려 공격으로 신라가 한강 상류 지역을,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얻게 되었으나 진흥왕은 2년 후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도 차지하였다. 이 일로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하면서 비옥한 토지를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직접 이어지는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에서는 551년의 고구려 공격을 끝으로 거칠부의 이름이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다른 자료에서 거칠부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진흥왕은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을 순행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비가 알려져 있다. 그 중 진흥왕 22년(561년)에 세워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는 이 지역을 순행한 진흥왕을 수행한 관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거칠부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진흥왕 29년(568년)에 세워진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도 거칠부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때 거칠부는 신라 관등 중 제 2위인 이찬(伊飡)의 지위에 올라 있어, 고구려 공격의 공을 인정받아 파진찬에서 이찬으로 승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다음 왕인 진지왕조에서 진지왕 원년(576년)에는 신라 귀족회의의 주재자로 최고위 관직인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과 가야 지역을 차지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내부적으로 『국사』를 편찬하고 불교를 진흥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신라의 중흥기를 이룩하였다. 거칠부는 무장으로서 또 문신으로서 진흥왕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하며 신라의 성장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