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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階伯:堦伯]

백제와 마지막을 함께한 충신

미상 ~ 660년(보장왕 18)

계백 대표 이미지

계백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계백(階伯)은 백제의 장군이다. 660년 황산벌에서 신라·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나라를 지킨 충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2 660년 이전 백제 내부의 정세와 계백의 중용

계백은 660년의 전투 이전까지의 기록에서는 그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인물이다. 계백에 관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 「계백열전(階伯列傳)」에서는 벼슬하여 달솔(達率)이 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 그의 가문이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도 660년 신라와의 전투에서만 그 활동상이 드러날 뿐으로, 그 이전에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볼 만한 단서는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매우 중요한 전투에 계백을 중용하였고, 계백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신라군을 막아내는 등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계백이라는 인물의 갑작스런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백제 내부의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자왕(義慈王)은 집권 초기에는 정력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大耶城) 등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하였고, 당(唐)에 조공을 바쳐 대외 관계 안정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655년(의자왕 15) 이후 의자왕은 실정(失政)을 하기 시작하였다. 과도하게 주색에 탐닉하고 이에 대해 직언한 성충(成忠)을 옥에 가두었으며, 자신의 서자(庶子) 41명을 백제의 최고위 관등인 좌평(佐平)으로 임명하는 등 정치를 파행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성충이 죽기 직전 앞으로 전란이 닥칠 것을 예측하고 그 경우 기벌포(伎伐浦)와 침현(沈峴)을 지켜 막아야 한다는 글을 올렸으나 의자왕은 이를 살피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성충의 예측대로 당군과 신라군이 백제를 공격해 왔고, 의자왕은 조정 대신들과 함께 방어 전략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당군을 먼저 막아야 한다는 좌평 의직(義直)과 신라군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달솔(達率) 상영(常永)의 주장이 대립하였고, 귀양 가 있던 좌평 흥수(興首)는 성충과 같은 계책을 내놓았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 사이 신라군이 탄현을 지나면서 백제는 지리적 이점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셈이 되었다.

계백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더 이상 대응을 늦출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서였다. 의자왕은 계백에게 결사대 5천명을 주고 황산(黃山)으로 보내어 신라군을 막게 하였다. 의자왕대에 신라와의 전쟁에서 참여했던 인물들은 윤충(允忠), 의직, 은상(殷相) 등이 있었다. 이중 윤충은 대야성전투(大耶城戰鬪)를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급한 상황에서 의자왕은 지금까지 전혀 활약이 없었던 계백에게 중책이 맡겼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계백은 성충이나 흥수처럼 국가를 위하는 마음과 그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장군이었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중용되지 못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계하고 소외되었던 인물이지만, 마지막에 유일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이 계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계백이라도 너무나 늦어버렸다.

3 임전(臨戰)의 각오 : 처자식을 베고 출정하다

『삼국사기』 「계백열전」에서는 의자왕으로부터 출정을 명령받은 계백이 집에 돌아가 가족을 모두 죽이고 출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계백은 “한 나라 사람이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 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가족을 죽였다. 계백은 적을 막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포기하기 보다는 끝까지 싸운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가족을 죽인 계백의 행동에 관해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文臣) 권근(權近)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 계백이 가족을 죽인 것은 그 무도함이 심한 것이고, 가족을 죽인 이유가 욕되게 노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스스로 패배하리라 생각한 것이므로 병사들의 사기를 꺾어버린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권근의 평가에 대해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는 이미 백제가 망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으며, 계백이 가족을 죽인 것은 중도에서 벗어난 것일지는 모르나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으며 패한 후에도 굽히지 않고 죽었으니 그 충의와 절개가 빼어나므로, 권근의 평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 안정복(安鼎福)은 강하게 계백의 행동을 옹호하였다. 계백은 가족을 욕보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족들이 사람의 도리를 지키게 해준 것이며, 또 가족을 죽임으로써 가족을 생각하며 제 몸 살고자 하는 마음 대신 결사항전의 각오를 병사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4 황산벌에 지다.

가족을 죽이고 5천의 결사대와 함께 출정한 계백은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성충과 흥수가 지적하였듯이 신라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는 신라에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로 향하는 길목인 침현이었다. 그러나 신라군은 이미 침현을 통과하였고, 계백은 벌판에서 적은 군사로 신라의 대군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계백은 황산벌에 도착하여 험한 곳을 골라 진영 3개를 설치하고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수적으로 불리한 계백으로서는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계백은 상영·충상(忠常)과 함께 출정하였는데, 이로 보아 3명이 각각 하나의 진영을 맡아 신라군과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군을 이끈 김유신(金庾信)은 이에 대응하여 병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계백의 진영을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연패를 당하였다. 이때 계백은 군사들에게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5천의 군사로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물리친 싸움을 언급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백제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신라군의 지휘관들은 계백과 마찬가지의 전략을 선택했다. 바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어린 화랑들이었던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을 희생시킨 것이다. 반굴은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하였고, 관창은 두 차례나 단기(單騎)로 백제 진영에 돌격하였으나 결국 사로잡혀 목이 베어졌다. 계백은 처음 관창을 사로잡았을 때에는 그 의기를 가상히 여겨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으나, 다시 관창이 돌격해오자 결국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어린 화랑들의 의기 있는 죽음을 목격한 신라군의 전의가 고조됨으로써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로의 사기가 비등한 상황에서, 5천대 5만이라는 압도적인 병력 숫자의 차이는 백제군의 패배로 이 전투가 끝날 수밖에 없음을 짐작케 한다. 상영과 충상은 사로잡혀 신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계백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5 사후(死後)의 평가

계백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는 ‘나라를 지킨 충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이미 고려 시대에서부터 있었다. 계백은 『삼국사기』 열전에 입전되었다. 백제인은 오직 3명만이 열전에 들어갔는데, 그 중 한 명인 것이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중기에 백제인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인물들을 모아 놓은 편에 들어가 있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수로 평가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계백이 충신으로서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조선 시대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1603년(선조 36)에 전대 왕들의 능묘를 수리하라고 이르면서 전대의 충신들의 묘소도 정비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 백제의 충신으로 성충과 계백이 언급되고 있어 계백이 어느 정도 알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계백은 1617년(광해군 2)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충신편에 실려, 조선에서 존경받고 본받아야 하는 충신으로 널리 알려졌다. 1575년(선조 8)에는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이 이 고장 출신인 백제의 3충신 성충·흥수·계백과 고려 이존오(李存吾)를 기리기 위해 사우(祠宇)를 건립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사액(賜額)을 받고 의열사(義烈祠)라 명명되었다. 1688년(숙종 14)에는 계백과 함께 조선시대 사육신 등을 모신 충곡서원(忠谷書院)이 지역 유림들에 의해 건립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권근은 계백이 가족을 죽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무도하다고 비판하였으나, 이러한 평가는 곧 역전되어 신하로서의 도리를 강조한 유학자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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