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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廣開土王]

영토를 크게 넓힌 고구려의 정복 군주

374년(소수림왕 3) ~ 412년(광개토대왕 21)

광개토왕 대표 이미지

광개토왕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고구려(高句麗)의 제19대 왕이다. 22년의 재위 기간 동안 다수의 정복 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고,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획득하였다.

2 광개토왕의 등장과 국제 정세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제18대 왕인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談德)이다. 중국측 기록에는 이름이 안(安)으로 기록되어 있다. 386년(고국양왕 3) 13살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왕이라는 왕호는 『삼국사기』에 기재된 것이고, 그의 사후 세워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碑)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긴 왕호가 등장한다. 경주 호우총(壺杅塚)에서 발견된 고구려 호우(壺杅)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집안(集安) 지역 모두루묘(牟頭婁墓)에서 발견된 묵서(墨書)에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는 호칭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에 따라 다소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영토를 크게 개척한 왕이라는 뜻은 상통한다.

고구려의 왕호는 대개 왕이 죽은 후 묻힌 장지명을 따서 지었는데, 광개토왕부터는 생시의 업적을 반영한 왕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광개토왕의 업적이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즉위 후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생존 시에는 ‘영락대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광개토왕 즉위 당시 중국 대륙은 5호 16국 시대였는데, 그중 고구려와 국경을 맞댄 나라는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後燕)이었다.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사이에 놓고 후연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고구려와 후연의 악연은 꽤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342년(고국원왕 12) 후연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전연(前燕)이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國內城)까지 쳐들어와 미천왕(美川王)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탈취하고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까지 사로잡아 가는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상당 기간 동안 전연에 외교적 저자세를 취해야 했다. 385년(고국양왕 2)에는 광개토왕의 부왕인 고국양왕(故國壤王)이 4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해 일시적으로 점령하였다가 후연의 반격을 받아 물러나기도 하였다.

남쪽으로는 백제(百濟)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광개토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은 371년(고국원왕 41) 겨울 평양성(平壤城)으로 공격해 온 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다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소수림왕(小獸林王)과 고국양왕대에도 양국 사이에는 수시로 전투가 발생하였다.

3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그해 가을 7월 백제를 공격해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같은 해 10월에는 군사를 7도(道)로 나누어 백제의 중요한 요새인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이후 백제의 반격이 몇 차례 있었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395년(광개토왕 5)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거란(契丹)의 일파인 패려(稗麗)에 대한 정벌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그간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여 백성들을 노략하며 고통을 주었던 존재였다. 광개토왕은 패려의 3개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였고 포로로 끌려갔던 고구려인들을 구출했으며, 수많은 소․말․양 등을 노획해 돌아왔다.

396년(광개토왕 6)에는 다시 백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58성 700촌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고구려군은 백제의 도읍까지 육박하여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이끌어냈고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왕의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까지 받아냈다. 또한 아신왕의 아우를 비롯하여 대신 10명을 인질로 삼고, 남녀 1,000명의 포로와 세포(細布) 1,000필을 획득하여 개선하였다. 398년(광개토왕 8)에는 군대를 파견해 식신(息愼)[숙신(肅愼)] 지역으로 보내 조공을 바치게 하고 고구려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400년(광개토왕 10)에는 1년 전에 있었던 신라 나물왕(奈勿王)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해 신라 경내를 침범한 왜(倭)의 군대를 몰아냈으며, 더 나아가 가야(伽倻) 지방에까지 진입하여 대규모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 원정으로 인해 한반도 남부의 세력 구도에 일대 전환이 발생하여 신라는 가야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신라에 정치적․외교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와 가야 지방에서 고구려군에 패퇴하였던 왜는 404년(광개토왕 14) 지금의 황해도 지방인 대방(帶方) 지역으로 침입해 들어오기도 했으나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궤멸시켰다.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407년(광개토왕 17)에도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비문에 결락된 부분이 많아 대상을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많은 학자들이 백제를 대상으로 한 전투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앞서 왜군의 신라 침입이나 대방 침입 역시 백제가 배후에서 관여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가 펼친 군사 활동의 대부분은 결국 백제를 주적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에서 대규모 군사 원정을 펼치던 때 서쪽 국경에서는 후연의 침입이 있었다. 400년(광개토왕 10)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몸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와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함락하고, 고구려 백성 5,000여 호를 끌고 간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후연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섰고, 양국 사이에는 몇 년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 싸움은 407년(광개토왕 17) 후연에 정변이 발생하여 북연(北燕) 정권이 들어서며 비로소 종식되었다. 후연과의 전쟁 과정에서 요동 지역은 온전히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410년(광개토왕 20)에는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였고, 동부여의 지배층, 혹은 집단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압로(鴨盧)들을 데리고 개선하였다. 이것이 기록상에 보이는 광개토왕의 마지막 정복 활동이다. 광개토왕은 2년 뒤인 412년(광개토왕 22)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4 광개토왕의 내치

광개토왕은 정복 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치 역시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왕의 치세에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은 늘어났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물론 왕의 훈적을 드러내기 위해 만든 비이니만큼 관용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광개토왕이 자신의 백성들이 받는 고통에 관심을 기울인 군주였다는 점은 광개토왕릉비 수묘인(守墓人) 연호조에 보이는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고 한 교언(敎言)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예로부터 전쟁을 좋아하는 군주들은 자신의 업적을 쌓는 데 몰두하느라 백성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주었다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점을 감안하면 광개토왕의 경우는 다소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왕이 행한 내치의 내용은 군사 활동에 대한 기록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지만, 광개토왕릉비에까지 새겨질 정도로 중시되었던 업적 중 하나는 수묘 제도의 정비이다. 광개토왕은 선조 왕들의 능묘 관리를 위하여 수묘 제도를 개혁하고 왕릉마다 석비(石碑)를 세우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규정을 위반할 경우에 대한 처벌 조항 또한 법으로 규정하여 명시하였다. 이같은 모습은 광개토왕이 법과 제도에 근거한 통치를 중시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광개토왕의 통치는 373년(소수림왕 3) 율령(律令) 반포 이래 지속되어 온 고구려 통치 체제의 체계성을 보여 준다. 광개토왕은 선왕들의 업적을 적극적이고 일관성 있게 계승하며 고구려의 국가 체제를 더욱 정교화하였다.

광개토왕의 내치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평양 지역 경영이다. 광개토왕은 392년(광개토왕 2)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99년(광개토왕 9) 광개토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신라에서 보낸 사신을 접견하였던 사례 등을 감안하면, 이 시기 평양은 이미 고구려왕의 행정적․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통치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했던 것 같다. 평양으로의 천도는 그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 대에 이르러 실현되었지만, 그 사전 작업들은 광개토왕대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광개토왕은 고구려라는 나라를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였고 이를 차근차근 추진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사후 장수왕과 문자명왕(文咨明王)의 시대를 거치며 동북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이 되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는 광개토왕이 이룬 군사적 성공뿐 아니라 내치에서의 성공 또한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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