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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弓裔]

미륵불을 자처한 난세의 효웅

미상 ~ 918년(태조 1)

궁예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궁예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궁예(弓裔)는 후삼국 시대의 한 축이었던 후고구려를 세운 인물이다. 한때 신라 영토의 2/3를 차지하며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폭압적이고 가혹한 정치를 펼쳐 민심을 잃고 부하들에게 제거되었다.

2 출신과 성장

궁예의 성은 김씨로 신라의 제47대 헌안왕(憲安王) 혹은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 전하며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어난 날이 중오일(重午日)인 5월 5일이었고 지붕 위로 흰 빛이 무지개처럼 떴는데, 이것이 나라에 불길하다는 일관(日官)의 말이 있어 왕의 버림을 받게 된다. 왕이 보낸 사자가 아이를 죽이기 위해 다락 아래로 던졌으나 유모가 받아 목숨을 건졌다. 다만 실수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 쪽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궁예는 유모의 손에 의해 길러지다가 10여 세 때 자신의 출신과 처지를 알게 되었다. 이에 강원도 영월에 있는 세달사(世達寺)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선종(善宗)이라는 법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3 혼란을 틈타 난세를 달리다

신라 말 정치가 혼란스럽고 중앙 정부의 집권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889년(진성여왕 3)부터 전국적으로 소요가 발생하였다. 궁예는 승려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담력이 있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절을 나섰다. 891년(진성여왕 5)에 죽주(竹州)에서 세를 떨치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지만 중용되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892년(진성여왕 6) 다시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原州市) 일대인 북원(北原)에 자리한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갔다.

양길은 기훤과 달리 궁예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병사를 나누어 동쪽 지역을 공략하도록 했다. 이에 강원도 원주 지역에 있는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며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현을 습격하여 항복시켰다.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寧越郡)과 평창군(平昌郡),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894년(진성여왕 8)에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江陵市) 일대인 명주(溟州)를 함락하는 데 이르렀다. 이때 궁예가 거느린 무리의 수는 3,500명에 이르렀으며 14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다고 한다. 명주를 차지한 것은 궁예의 행보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명주는 신라 하대 김경신(뒤의 원성왕)과의 왕위 계승 투쟁에서 밀려난 김주원(金周元) 일파가 머물며 세력권으로 삼았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명주를 손에 넣은 궁예는 부하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대되었는데, 이 시기 장군이나 성주라는 호칭은 독립된 지방의 호족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던 만큼 양길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궁예는 기세를 몰아 서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금의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화천군(華川郡), 김화군(金化郡), 철원군(鐵原郡) 지역을 공략하여 손에 넣었다. 사실상 강원도 일대 대부분을 장악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세가 커지자 황해도 지역의 유력자 중에는 스스로 항복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궁예는 임금을 자칭하며 중앙과 지방에 관직을 설치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이때 궁예에게 귀부한 이들 중에는 송악(松岳)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왕융(王隆)과 그 아들 왕건(王建)도 있었다.

궁예는 896년(진성여왕 10) 승령현(僧嶺縣)과 임강현(臨江縣)을 공략한 데 이어,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 지역을 차례차례 세력권으로 편입하였고,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주변 지역 장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897년에는 지금의 서울 지역과 인천 지역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궁예의 세력이 성장하게 되자 과거 궁예의 윗사람이었던 양길과 충돌이 발생하였다. 당시 양길은 북원을 비롯하여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忠州市)인 국원(國原) 등 30여 성을 차지하고 있었다. 양길은 휘하의 군사를 모아 궁예를 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선제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세력을 잃고 말았다. 궁예는 900년에 왕건을 파견하여 지금의 경기도 남부와 충청북부 지역까지 평정하였다.

4 나라를 세우고 미륵불을 자칭하다

901년 궁예는 마침내 후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였다. 904년에는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무태(武泰)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철원을 도읍으로 삼았다. 궁예의 위세는 더욱 당당해져 이후에도 각지에서 유력자들의 귀부가 연이었다. 남쪽으로는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尙州) 지역과 충청남도 공주(公州) 지역까지 판도에 넣었고, 북쪽으로는 대동강 이남 황주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911년에는 다시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고, 연호는 905년에 성책(聖冊)으로 고쳤던 것에서 수덕만세(水德萬歲)로 다시 바꾸었다.

이 시기 나라의 영토는 날로 늘어났고 궁예의 모습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으나 한편으로 군주로서 심각한 위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며, 자신의 아들들을 각각 청광보살(靑光菩薩)과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칭하였다. 옷차림과 행차가 극히 화려하였으며, 스스로 경전을 짓고 강설(講說)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비판한 승려를 철퇴로 죽이는 등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미륵불은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불에 이어 미래에 도래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이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권위를 이용해 정치 운영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궁예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짧은 기간 동안 국호와 연호를 자주 변경한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궁예는 다른 호족들과 달리 선대 여러 세대에 걸친 뚜렷한 지역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처지였으므로, 나라를 세운 이후 정국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 도읍으로 삼았던 송악을 떠나 철원으로 천도한 것도 송악 등 패서(浿西)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5 몰락과 궁예에 대한 평가

915년 마침내 인간 궁예에게 드리워졌던 어두움이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말았다. 왕후인 강씨(康氏)가 궁예의 악행에 대해 지적하자 신통력으로 왕후의 간통을 알아냈다며 잔인하게 살해하고, 두 자식들까지 죽인 것이다. 이후 의심이 많아지고 화도 많이 내게 되어 신하들은 물론이고 평민들까지 죄 없이 죽이는 일이 잦아졌고, 민심 또한 궁예를 떠나게 되었다.

이에 918년 왕건이 부하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정변을 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궁성으로 몰려오자 당황한 궁예는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북문으로 빠져 나가 도주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백성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궁예가 난세를 만나 뜻을 세운 지 28년, 나라를 세워 왕이 된 지 18년만의 일이었다.

왕이 되기 전의 궁예와 왕이 된 후의 궁예에 대한 묘사는 매우 상반된다. 왕이 되기 전의 궁예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부하들과 함께 하고 상벌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이 된 이후에도 사람됨이 돌변하여 사치하고, 잔인하며, 의심이 많은 모습을 보여 인심을 잃었는데, 그 모습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궁예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이 같은 부정적 묘사는 일정 부분 왜곡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궁예의 치세가 정변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 데는 많은 정치적 무리수가 그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뚜렷한 정치적·지역적 기반이 없었던 궁예는, 왕위에 올랐으나 스스로가 기반이 단단하지 못했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스스로를 신격화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그의 의지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가까운 사람이라도 잔혹하게 숙청하였다.

이와 같은 행보에 궁예는 부하들의 신망을 잃은 것은 물론, 민심도 그에게서 떠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후삼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는 역사의 주인공 자리를, 송악 지역을 근거지로 세력을 키우고 다른 호족들과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해 가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진 왕건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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