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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武王]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다

미상 ~ 737년(무왕 18)

1 개요

무왕(재위: 719~737) 대무예(大武藝)는 아버지 고왕(高王) 대조영의 뒤를 이어 발해의 제 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시호(諡號)에서 나타나듯이 대무예는 재위 기간 동안 당과 대립하는 가운데 영토 확장에 힘써 이후 아들 문왕(文王)이 안정적으로 체제 정비를 할 수 있는 외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2 주변 민족의 복속과 영토 확장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무왕이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섬겼다.”라고 하였고, 727년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열국(列國)을 주관하고 제번(諸蕃)을 거느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遺俗)을 이었다.”고 하여 무왕이 즉위 초반부터 말갈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복속시켜 나가면서 영토를 확장하였고 제번을 거느렸다고 자평할 만큼의 성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흑수말갈(黑水靺鞨)’ 토벌

726년(무왕 8) 당이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설치하면서 이전까지 발해의 영향 아래 있었던 흑수말갈이 당의 영향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이 흑수주를 설치한 것은 무왕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기 위한 방편이었다. 원래 흑수말갈은 발해의 통제 아래에 있었고, 발해의 허락 하에 당과 교섭을 했었다. 그런데 흑수말갈이 단독으로 당과 접촉하였고 결국 당은 그 지역에 흑수주를 설치하여 당의 영향 아래 두었던 것이다. 흑수말갈의 이탈은 다른 말갈 세력들의 이탈로도 연결될 수 있으므로 발해로서는 이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해야 했다.

당의 흑수주 설치가 발해에 알려지자 발해 조정에서는 즉각 흑수말갈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논의에서 대립각을 세운 인물은 바로 무왕과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大門藝)였다.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과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발해를 치려고 하는 의도가 있으므로 먼저 흑수말갈을 공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대문예는 개원(開元: 713~741) 초에 숙위(宿衛)로서 당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당의 사정에 밝았다. 따라서 무왕에게 당의 군사력이 발해의 만 배이고, 전성기의 고구려도 30만의 강병(强兵)으로 당에 저항하다 결국 멸망하였는데 현재 발해의 군사는 고구려의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현실적으로 승산이 없고, 이미 당의 영향 아래 들어가 있는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것은 당과 원수가 되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문예는 발해의 흑수말갈 토벌이 당과 발해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왕은 흑수말갈의 토벌을 결정하고, 대문예를 그 선봉으로 내세웠다.

4 대문예의 당으로의 귀순

대문예는 왕의 명령이므로 거역하지 못하고 국경에 이르렀으나 다시 무왕에게 토벌을 그만둘 것을 상소하였다. 무왕은 대문예가 싸울 의지가 없음을 확인하고 종형(從兄)인 대일하(大壹夏)를 보내 대문예를 대신하게 하고 대문예를 소환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대문예가 군대를 버리고 당에 귀순하자 현종(玄宗)이 대문예에게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하였다. 무왕의 대외정책에 반대했던 대문예의 귀순을 당이 받아들이자 발해는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므로 무왕은 즉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문예의 죄상을 열거하고 죽이기를 청하였다.

현종은 대문예를 숨겨주고 이미 안서(安西) 지역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였지만, 이를 누설한 자가 있어 무왕이 이를 알고 대국은 신의를 보여야 하는데 어찌하여 거짓을 일삼느냐고 항의를 하였다. 당에서는 대문예가 경사(京師)에 있다는 것이 누설된 책임을 홍려소경(鴻驢少卿)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에게 물어 각각 조주자사(曹州刺史)와 택주자사(澤州刺史)로 좌천시키는 등 대문예의 귀순이 가져온 파장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무왕에게 있어서 대문예의 당으로의 귀순은 단순히 혈육의 배신으로 치부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발해왕의 동생으로서 대문예가 갖고 있었던 국가적 위상과 기밀들은 발해의 안보와 직결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기에 무왕은 지속적으로 대문예를 죽일 것을 당에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객까지 보내어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동생을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5 발해의 등주(登州) 공격

대문예의 귀순 사건에도 불구하고 발해와 당의 교류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발해는 왕자와 왕제(王弟)를 당에 숙위로 보내면서 표면적으로는 당과 평화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728년(무왕 10) 당에서 숙위하던 무왕의 왕자인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죽었다. 하지만 대문예의 처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해는 사신과 숙위를 보내면서 대문예 처리에 대한 불만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당에서는 형제 사이에 다투고 대문예가 당에 왔으므로 그를 거둔 것이고, 문예가 잘못이 있더라고 발해에서는 그를 용서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일방적으로 대문예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무왕이 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당을 배반하려 한다면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왕은 결국 당의 등주 공격을 결정하였다. 732년 9월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의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급습을 당한 당은 우령군장군 갈복순(葛福順)을 보내 공격하게 하고, 대문예에게도 유주(幽州)의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또한 당에 머물고 있던 신라의 숙위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로 보내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남쪽을 치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공격은 폭설과 추운 날씨로 인해 군사들이 얼어 죽고 소득 없이 끝났다. 무왕에게 있어서 대문예의 당으로의 귀순은 단순히 혈육의 배신으로 치부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발해왕의 동생으로서 대문예가 갖고 있었던 국가적 위상과 기밀들은 발해의 안보와 직결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기에 무왕은 지속적으로 대문예를 죽일 것을 당에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객까지 보내어 동생을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당의 군사적 위협에 등주를 선제 공격하여 대문예가 말한 것처럼 고구려의 삼분의 일에 불과한 발해의 군사력이었지만 기습적이고 강한 발해의 공격력을 당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무왕은 19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말갈 제부(諸部)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대당 강경책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은 내부 통치에 힘썼고 이른바 문치(文治)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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