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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연개소문은 포악한 독재자였나?

미상 ~ 665년(보장왕 23)

연개소문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연개소문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연개소문의 가계(家系)

연개소문의 성(姓)은 ‘연(淵)’씨 혹은 ‘천(泉)’씨인데,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대중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가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였다는 정도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1923년 중국 하남성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장남 천남생(泉男生)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그 가계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묘지명에서는 천남생의 증조부는 자유(子遊), 조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남생의 조부와 부친인 개소문은 군권을 쥐고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2 연개소문의 집권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장성을 축조 중이었는데 영류왕은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을 연개소문에게 맡겼다. 이것이 642년 10월의 일로, 연개소문의 이름이 사서에 첫 등장하는 내용이다.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으로 떠난 사이 영류왕과 여러 대인들은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모의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었다. 연개소문은 평양으로 돌아와 군대를 점검한다는 것을 핑계로 대신들을 불러 모았고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이어 궁궐로 들어가 영류왕까지 시해하고, 영류왕 동생의 아들인 장(臧)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후 국정 전반을 운영하였다.

3 연개소문의 외교 정책

연개소문이 집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신라에서 백제와의 전쟁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김춘추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춘추가 사위 품석(品釋)이 성주로 있었던 대야성(大耶城)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갔던 것이다. 연개소문과 김춘추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국정 운영 전반을 주도한 실권자들로, 이것이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백제의 무도함을 토로하며 원병을 요청하자 보장왕은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으나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竹嶺)일대를 돌려준다면 구원에 응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김춘추는 자신은 일개 신하일 뿐이므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니 별관(別館)에 가두어버렸다. 김춘추가 신라를 떠나기 전, 김유신(金庾信)과 맹약을 맺었는데 만일 60일이 지나도 고구려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김유신이 구원하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고,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원병 요청을 거절한 이후 신라는 당과의 연합을 도모하는 적극적인 대당(對唐)외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결국 642년 김춘추의 원병 요청에 대한 연개소문의 거부로 신라와 고구려의 외교 정책은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고 이는 이후의 삼국통일전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왕을 시해하고 집권하였기 때문에 당이 언제라도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부담이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일단 당시 당에서 성행한 도교(道敎)를 요청하면서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펼쳤다.

실제로 당태종은 영류왕이 시해되었으므로 고구려의 백성을 위로하고 연개소문을 처벌하겠다는 ‘조민벌죄(弔民伐罪)’의 명분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하겠다고 하였으나 고구려의 대비가 철저할 것을 우려한 신하들의 만류로 일단 그만둔다. 644년 당 조정에서 고구려와의 개전(開戰)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당태종이 개전을 선언하자 연개소문 역시 당에 대하여 취해왔던 온건적 태도를 버리고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668년까지 고구려와 당은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4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멸망

645년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후회하였고, 죽으면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당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당고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이어나갔다. 20여 년 가까이 전쟁이라는 불안 속에 시달린 고구려의 백성들은 피폐해져 갔다.

고구려의 국정 운영을 담당했던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고구려의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세 아들들에게 물과 물에서 사는 고기처럼 화합하라는 유언을 하였지만 남생이 지방의 여러 성을 살피러 간 사이 아우인 남건(男建) 및 남산(男産)과 갈등이 생겨, 결국 남생은 국내성에 웅거하다 당으로 망명하였다. 667년부터 고구려와 당의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고 남건과 남산은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항복하였다. 남건은 끝까지 저항하다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후 당으로 옮겨져 검주(黔州)로 유배되었다.

연개소문의 사망 이후 고구려의 정국은 급속도로 혼란해졌는데 이는 연개소문이 정국 운영에서 차지한 비중이 매우 컸다는 것과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연개소문의 사망이 고구려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5 연개소문에 대한 상반된 평가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가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한 포악한 독재자였다는 평가와,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대한 서술은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연개소문의 성격은 흉악하고 잔인하며 포악하다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642년 연개소문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영류왕을 죽이고 여러 토막으로 잘라 도랑에 버렸다고 서술하면서 패륜적인 면모를 극대화시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치면 군대를 보내 징벌하겠다는 당 태종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고, 당이 파견한 사신 장엄(蔣儼)을 억류하는 등 당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연개소문에 대하여 김부식은 사론(史論)에서 송나라의 왕개보(王介甫)가 “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었다”라고 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재사(才士)임에는 틀림없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어 곧은 도리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함과 포악함을 마음대로 하여 큰 역적에 이르렀다고 하여, 궁극적으로는 유교의 기본 덕목인 충(忠)과 사대(事大)의 기준에서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645년 이후 고구려와 당의 전쟁 상황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 사서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였는데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전쟁 상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삼국사기』의 찬자들이 편의상 중국 측 기록을 선택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 역시 앞에서 열거한 중국 사서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고 있다는 점은 연개소문의 평가에 있어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대한 흉폭하고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면모는 실제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충과 사대라는 유교의 틀 속에서 과장된 평가일 수도 있고, 나아가 중국인의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만들어진 연개소문상(像)의 결과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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