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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長壽王]

한 세기를 지배한 고구려 전성기의 군주

394년(광개토대왕 4) ~ 491년(장수왕 19)

장수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장수왕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장수왕(長壽王)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다. 이례적으로 오랜 수명을 살았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왕호를 받았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유업을 이어받고 평양 지역으로의 천도를 단행하는 등 국가 체제의 변화를 도모하는 한편 능동적인 외교를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서 고구려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2 평양으로의 천도

장수왕은 고구려의 제20대 왕이다.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거련(巨連)이다. 중국측 사서에는 연(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외교 시 사용하던 중국식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체격과 용모가 뛰어났으며 뜻과 기운이 호방하고 컸다고 전한다. 408년(광개토왕 18) 태자가 되고, 412년 광개토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년째 되는 414년에는 예법에 따라 부왕(父王)의 능을 조성해 시신을 모시고, 거대한 광개토왕릉비를 세워 그 훈적을 기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국내성(國內城) 지역에서 평양(平壤) 지역으로의 천도는 장수왕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는 장수왕 혼자만의 결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평양 지역은 본래 낙랑군(樂浪郡)의 중심지로서 문화적으로 선진적인 곳이었다. 때문에 313년 미천왕(美川王)에게 복속된 이래 고구려 왕실로부터 꾸준히 중시되었던 곳이다. 장수왕의 증조부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은 평양에서 백제와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였고, 광개토왕 역시 평양에 절을 세우거나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등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평양 지역은 또한 남진 경영의 전진 기지로 이용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왜(倭)의 공격을 받던 신라가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보낸 사신이 광개토왕을 만난 곳도 다름아닌 평양이었다.

고구려의 영역이 확장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어 갈수록 국내성 지역은 도읍으로서 한계를 드러내었다. 국내성 지역은 압록강변에 위치한 분지 지형이다.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농업 생산력과 교통에 있어서 일정한 제약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 초기부터 성장해온 귀족 가문들의 근거지라는 점에서 강력한 집권을 추구하는 왕실에 부담을 주었다. 고구려 왕실은 국가 체제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천도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평양 지역에 대해 고구려의 왕들이 지속적으로 보인 관심과 조치들은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전 작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427년(장수왕 15) 마침내 천도가 단행되었다.

평양으로의 천도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사료는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北魏)에 보낸 외교 문서이다. 개로왕은 474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압박해 주기를 요청하면서 장수왕이 죄를 지어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외교 문서의 목적상 과장이 섞여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장수왕대 고구려 내부에 정치 변동이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통해 국내성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의 절대화를 추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3 장수왕의 외교 정책

『삼국사기』 장수왕대의 기록을 보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중국과의 조공(朝貢) 기사이다. 대부분 북위에 대한 조공 기사이며, 간혹 남송(南宋)이나 남제(南齊) 같은 남조의 국가들에도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였다. 장수왕대에 조공 관계 기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삼국사기』 편찬 당시 남아 있던 고구려의 자체 기록이 매우 소략한 데다 그나마 중국 사서에 남아 있는 고구려 관련 기록이 대부분 조공 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장수왕의 재위 기간이 길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조공 기사의 수가 많은 것은 그만큼 고구려의 외교 활동이 활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수왕이 펼친 외교는 등거리 외교로서 주체적이며 당당한 것이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이웃 나라인 북연(北燕)의 멸망 시 고구려가 보여 준 대처이다. 436년(장수왕 24) 북위의 공격으로 북연이 망할 위기에 빠지자 장수왕은 발 빠르게 장수인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군은 북위군보다 한발 앞서 북연의 도읍인 화룡성(和龍城)에 진입하여 무기고와 성 안을 약탈하고, 북연왕 풍홍(馮弘)과 백성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철수하였다. 눈앞에서 북연 왕을 빼앗겨 분개한 북위는 고구려에 항의를 하고 군사적 공격까지 검토했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고구려로 넘어온 풍홍은 자신을 대하는 장수왕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남송(南宋)으로의 재망명을 꾀하였다. 남송에서는 풍홍을 맞이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에 비용을 대라고 요구했으나, 장수왕은 사람을 보내 오히려 풍홍과 그 자손 10여 명을 살해하였다. 목적 달성에 실패한 남송의 사신이 자신이 끌고 온 군대를 동원해 풍홍을 살해한 고구려 장수를 습격해 죽이는 일이 발생했는데, 장수왕이 이를 붙잡아 남송에 송환하자 남송 측에서도 고구려의 뜻을 존중하여 한동안 그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장수왕은 북위나 남송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는 입장이었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들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군사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가 그만큼 강한 국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장수왕대 고구려의 외교적 위상은 489년(장수왕 77) 남제의 사신이 북위에 갔다가 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는 대우를 받자 북위에 강력하게 항의를 했던 사례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4 백제 도읍 한성의 함락과 남진

장수왕은 475년(장수왕 63)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 원정에 나선 고구려군은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포위하고 군대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면서 성문에 불을 질렀다. 개로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수십 기의 기병만을 이끈 채 도주하였으나 결국 붙잡혀 살해당했다. 목적을 달성한 고구려군은 백제의 백성 8,000명을 포로로 잡고 귀환하였다. 한성 백제 시대는 이렇게 종말을 고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의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남진 정책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장수왕대 고구려는 현재의 충청도 북부 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한편 왕과 도읍을 모두 잃은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떨어진 훨씬 남쪽 지역의 웅진(熊津)에 새 도읍을 만들고 재기를 노리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장수왕은 491년(장수왕 79)에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98세. 아들인 조다(助多)는 이미 사망하였고, 손자인 문자명왕(文咨明王)이 뒤를 이었다. 장수왕의 사망 소식을 들은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입은 채 동쪽 교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며, 한 세기 가깝게 강력한 왕국을 통치하며 주변국에 존재감을 과시하였던 거인(巨人)을 기렸다.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왕처럼 군사력을 동원한 화려한 정복 전쟁을 선호한 군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었고, 나라는 부강해졌다. 장수왕은 고구려를 더욱 강력한 나라로 이끈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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