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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朴赫居世]

신라의 건국 시조

기원전 69년 ~ 4년(유리왕 23)

박혁거세 대표 이미지

경주 오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신라를 건국한 임금이다. 신이한 탄생 설화를 지니고 있으며, 신라를 건국한 후 덕으로 다스리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2 탄생

혁거세의 탄생설화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따르면 혁거세가 탄생하기 전부터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살면서 6촌(후에 6부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중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던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의 나정(蘿井) 옆에서 말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에서는 갓난아이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혁거세이라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탄생설화도 『삼국사기』와 유사하다. 다만 조금 다른 점도 보이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조선의 유민들이 6촌을 형성했다고 하였지만 『삼국유사』에서는 6촌의 조상들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고 한 것이나, 『삼국사기』에서는 소벌공이 우연히 알을 발견한 것처럼 서술하였으나 『삼국유사』에서는 6촌의 촌장들이 모여서 나라를 세울 일을 논의하다가 함께 알을 발견한 것으로 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아이의 몸에서 광채가 나서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의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는 내용과 ‘불구내(弗矩內)’라는 다른 이름, 혁거세가 서술성모(西述聖母)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내용도 보인다. 서술성모는 선도성모(仙桃聖母)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도 신라본기 경순왕조 말미에 쓴 사론에서 선도성모 설화를 언급하고 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도 김부식과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조선 시대 실학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신라 건국에 관한 부분을 서술하면서 혁거세의 탄생에 관한 내용을 생략하였다. 그러면서 별도로 건국 설화를 괴이한 이야기로 여겨 그 내용을 변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조선 유민들이 삼한 지역으로 남하해 왔다는 내용이나, 6촌이 신라 건국의 모체가 되었다는 내용 등 건국신화가 반영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신라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3 즉위와 혼인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가 13살이 되던 해인 기원전 57년에 6부인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니 이를 거서간(居西干) 하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혁거세의 탄생에서부터 즉위까지 6촌(6부)이 깊이 관여하고 있어,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 이들이 역할이 중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에서는 나라의 군주를 가리키는 말로서 처음부터 ‘왕(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된다. 신라의 왕호는 이후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으로 변화하였고, 제 22대 왕인 지증마립간대에 이르러서야 ‘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혁거세의 비(妃)는 알영(閼英)으로, 그녀의 신이한 탄생 설화도 전해진다. 알영정에서 용이 나타나 옆구리로 알영을 낳았는데, 자라면서 덕이 뛰어나 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알영 탄생 설화의 경우도 혁거세와 마찬가지로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는 빠져 있는 알영의 신체적 특징 등을 서술하는 등 그 내용이 보다 자세하다.

4 재위 중의 치적

혁거세거서간은 기원전 57년에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61년간 재위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혁거세의 재위기간에는 외부의 다른 세력들과의 별다른 무력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재위 8년(기원전 50년)에 왜(倭)가 변경을 침범하러 왔으나 혁거세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또 재위 30년(기원전 28년)에는 낙랑(樂浪)이 변경을 침범하러 왔으나 사람들이 도둑을 걱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도(道)가 있는 나라를 몰래 습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며 되돌아갔다. 재위 53년(기원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혁거세의 인품을 칭송하며 사신을 보내 좋은 말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혁거세의 덕과 성인(聖人)으로서의 인품을 강조하고 있다. 마한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측면이 드러난다. 혁거세는 재위 38년(기원전 20년)에 마한에 호공(瓠公)을 보내어 예방하였으나, 마한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서 양국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 마한왕이 죽었을 때 혁거세는 이 틈을 타 공격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고, 이에 혁거세 재위기간에는 마한과 충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내적인 업적을 살펴보면, 재위 17년(기원전 41년)에는 왕비 알영과 함께 6부를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으며, 21년(기원전 37년)에는 수도에 금성(金城)을 쌓았다. 또한 재위 26년에는 금성 내에 궁실을 조영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처음 혁거세와 알영이 기거한 궁실이 남산 남쪽 기슭에 있었다고 하고 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5 사망과 장례

혁거세는 재위 61년, 즉 기원후 4년에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가 봄 3월에 세상을 떠나 담암사(曇巖寺) 북쪽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혁거세가 사망할 때 하늘로 올라가서 7일 후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는데, 큰 뱀이 혁거세의 유해를 합장하는 것을 막았던 까닭에, 각각 따로 5개의 능을 만들고 사릉 혹은 오릉(五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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