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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姜邯贊]

고려의 큰 별, 귀주에서 거란군을 섬멸하다

948년(정종 3) ~ 1031년(현종 22)

강감찬 대표 이미지

강감찬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머리말

강감찬은 고려 현종[고려](顯宗) 대(顯宗代)에 활약한 중신으로, 11세기 초반 거란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치가이다. 거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 귀주대첩(龜州大捷) 으로 유명하다.

2 가계와 출사

강감찬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관악구 일대인 금주(衿州) 사람이다. 처음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에서 금주로 옮겨 살면서 이 지역과 연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강감찬의 집안이 고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인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太祖 王建) 를 섬기면서부터였다. 강궁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훗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결국 983년(성종 2)에 시행된 과거에서 갑과(甲科) 제일(第一), 즉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고려사』의 급제 기록까지는 이름이 ‘강은천’으로 나오지만 이후의 관직 제수 기록부터는 ‘강감찬’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과거 급제 이후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해의 과거 시험은 당시 명망이 높던 최승로(崔承老) 와 이몽유(李夢游) 등이 주관한 데다 다시 국왕인 성종이 직접 복시(覆試)를 시행하였으니, 강감찬은 상당한 주목을 받으며 관직에 진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과 그 뒤의 목종(穆宗) 대(穆宗代)에 강감찬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그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3 2차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과 피난 건의

강감찬이 주목할 만한 정치적 활동을 펼치는 모습은 현종대(顯宗代)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1010년(현종 원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발발한 2차 고려-거란 전쟁 초기의 일이다. 우선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993년(성종 12)에 벌어졌던 첫 번째 거란의 고려 침입 이 서희(徐熙) 의 협상으로 원만히 마무리된 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일단 안정되었다. 압록강을 경계로 양국의 영역을 나누고 고려가 송이 아닌 거란과 사대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얻은 평화였다. 그러나 거란과 송, 고려가 맞닿아 있는 상황에서, 이 평화의 시간은 그리 길 수 없었다.

분쟁은 먼저 거란과 송 사이에서 발생했다. 10세기 말에 송이 거란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가 실패한 뒤, 양국 간에 한동안 대규모의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1세기 초, 거란은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송 공략에 나섰다. 거란 황제 성종(聖宗)과 섭정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직접 나선 대규모 친정(親征)이었다. 파죽지세로 송의 영역으로 진격한 거란군은 마침내 수도 개봉(開封) 인근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송은 수도를 포기하지 않고 강하게 저항했고, 거란은 보급 문제 등을 감안하여 협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매년 상당한 양의 비단과 은을 받는 등의 조건으로 양국은 전연(澶淵)에서 화의를 맺었다. 1004년, 즉 고려 목종 7년의 일이었다. 이를 ‘전연의 맹약’이라 부르는데, 이로써 거란은 송에 대해 우위를 점하였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거란이 고려를 더욱 확실하게 제압하고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전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합의로 안정된 관계를 무조건 깰 수는 없는 상황에서, 마침 거란에 빌미를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에서 강조(康兆) 의 정변이 일어나 국왕 목종이 폐위된 뒤 시해되고, 새로 현종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 무렵 고려와 갈등을 빚고 있던 일부 여진족이 거란으로 도망쳐 선동하자, 거란의 황제 성종은 이를 ‘대역(大逆)’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언했다. 고려는 이를 외교적으로 무마하려 애썼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1010년(현종 원년) 겨울에 거란의 성종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 고려로 침입을 개시하였다. 2차 거란-고려 전쟁 의 발발이었다.

고려는 거란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특히 주력군을 이끌고 나갔던 강조가 전략적 실패로 대패하고 사로잡히면서, 고려군의 방어 전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서경(西京)마저 함락된 뒤 조정에서는 항복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강감찬이 등장하여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는 “오늘의 일은 강조의 잘못이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고 서서히 만회를 노려야 합니다.”라고 하며 현종에게 남쪽으로 피난을 떠날 것을 권했다.

강감찬의 건의를 채택하여 현종은 피난길에 올랐다. 지채문(智蔡文) 등 극소수의 신하들만이 뒤를 따른 고생스러운 피난길이었으나, 이를 통해 거란군의 매서운 기세를 피하고 시간을 끄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마저 점령했다. 주력군이 붕괴된 고려로서는 당장 이를 격퇴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에 현종은 친조(親朝), 즉 자신이 거란 조정에 직접 나아가 항복하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화의를 청하였다. 후방에 남겨진 고려군의 공격으로 피로가 쌓인 거란군은 이를 받아들이고 철군했다. 그 과정에서 양규(楊規) 등 여러 장수들의 활약으로 거란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돌아갔다.

전쟁 기간 동안 강감찬의 모습은 사료에 나타나지 않아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피난을 건의한 공을 크게 인정받았다. 훗날 그가 재상의 지위에 해당하는 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임명될 때, 현종은 직접 임명장을 쓰면서 강감찬의 계책 덕분에 온 나라가 야만인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고 치하하였다.

4 활발한 정치적 활동과 3차 고려-거란 전쟁 지휘

2차 고려-거란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승진을 거듭하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1011년(현종 2)에 국자좨주(國子祭酒)를 거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옮겼으며, 중추사(中樞使)로 승진하였다. 이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맡게 되었다. 이러한 중앙 관직뿐만 아니라,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를 역임하여 거란과의 갈등 상황에 대비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강감찬은 사직단(社稷壇)을 수리하고 예관(禮官)에게 그 제사의 의례를 논의하여 정하게 하자는 건의를 올리는 한편, 자신의 밭을 군호(軍戶)에게 나누어 줄 것을 국왕에게 요청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018년(현종 9)에는 드디어 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라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서북면의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를 맡아 동북 지역에 이어 서북 변경 지역의 방어 태세도 점검하였다.

한편, 종전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거란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친조를 할 수 없다고 전하였다. 귀환길에 고려군의 지속적인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거란의 성종은 이에 크게 분개하여, 강동6주(江東六州) 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고려를 이를 거부했고, 양국 간에는 압록강 일대에서 국지적인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고려는 거란의 공격을 대체로 잘 방어했으나, 압록강을 건너는 거점이 되는 지금의 의주(義州) 일대는 빼앗기고 말았다.

긴장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고, 결국 1018년(현종 9)에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을 지휘관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이라 기세를 올리며 고려를 침입했다. 이를 대개 3차 거란의 고려 침입 이라 부른다. 소배압은 1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의 지휘관이었던 소항덕의 형이자, 송과의 전쟁에서도 활약했던 당대의 1급 장수였다. 그는 최대한 빨리 개경을 치려는 계획을 짜고 진격하였다.

현종은 이에 맞서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 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거란군을 상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병력상의 우위는 2차 전쟁 이후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에 충실하게 대비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강감찬은 먼저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흥화진(興化鎭) 근처의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성 동쪽의 큰 냇물을 소가죽을 엮어 막아둔 채로 거란군을 기다렸다. 그리고 거란군이 근처에 도달하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흘려보내고 복병을 출동시켜 큰 피해를 입혔다. 고려군의 기습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소배압은 계속 개경을 향해 거란군을 진격시켰다. 이에 고려군은 강민첨이 자주(慈州) 일대까지 추격하여 다시 큰 피해를 입히고, 조원(趙元) 이 또 마탄(馬灘)에서 요격하여 1만여 명 이상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병력을 잃으면서도 소배압은 개경을 향해 돌격했다. 수도를 함락시키고 국왕을 잡아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에 강감찬은 개경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김종현(金宗鉉) 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급히 개경으로 가서 합류하게 하였다. 또한 동북면 병마사도 3천 3백의 병력을 개경으로 보내 방어를 강화하였다.

고려군의 거듭된 요격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에서 백 리 떨어진 신은현(新恩縣)까지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왕 현종은 이번에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청야 전술을 펼치며 거란군에 맞설 태세를 갖추었다. 소배압은 척후 기병 3백을 금교역(金郊驛) 방면으로 보냈으나, 이들은 출동한 고려군 1백 명의 기습으로 전멸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결국 소배압은 군대를 돌려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감찬은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연주(漣州)와 위주(渭州) 일대에서 거란군을 요격하여 5백 명 이상의 목을 베고, 마침내 귀주 일대의 평야에서 거란군과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양군은 막상막하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김종현이 이끄는 원군이 도착하자 승세는 고려군 쪽으로 돌아섰다. 패배한 거란군은 탈주하여 겨우 압록강을 건넜으나, 그 수가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를 보통 귀주대첩이라 부른다. 거란 내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던 소배압은 이 패전의 결과 문책당하여 좌천되고 귀양을 떠났으며, 비록 얼마 뒤 복귀했으나 곧 사망하고 말았다.

대승을 거둔 강감찬은 국왕 현종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현종은 개선하는 강감찬과 고려군을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아가 맞이하며 크게 잔치를 열어주었다. 강감찬에게는 특별히 금으로 만든 꽃가지 여덟 개를 머리에 꽂아주고, 직접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이 뒤 고려는 사신을 파견하여 거란과 화의를 청하였다. 지속적인 전쟁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한 거란은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고려는 거란에 대해 조공을 보내고 사대의 예를 지켰으나, 거란 역시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였다.

5 만년의 활동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게 하는 등의 특전을 베풀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로 봉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삼았다. 1020년(현종 11)에 강감찬은 다시 사직을 청하였고, 이에 현종은 사직을 허락하며 그를 특진검교태부(特進檢校太傅)·천수현개국자(天水縣開國子)·식읍오백호(食邑五百戶)로 올려주었다.

그러나 사직 후에도 정치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강감찬은 개경에 성곽이 없으니 나성(羅城) 을 쌓자고 건의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030년(현종 21)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덕종[고려](德宗) 은 강감찬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으로 삼고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시중(侍中)·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식읍일천호(食邑一千戶)로 올려주었다. 얼마 뒤에 그가 84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회를 3일간 정지하고 백관에게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뒤에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강행경(姜行經)이다.

6 관련 유물·유적 및 설화

강감찬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우선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落星垈) 를 들 수 있다. 이 지역은 강감찬이 출생했다는 곳으로, 낙성대는 강감찬을 모신 사당이다. 그가 출생할 때 별이 떨어졌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에는 고려 시대에 세워진 3층 석탑이 있는데, 강감찬 생가터로 알려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탑의 기운을 빼기 위해 탑과 그 일대를 훼손하고 그 안에 있던 보물을 빼갔다고 한다.

한편, 『고려사』에도 그의 출생에 관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왕이 보낸 사자가 이 일대를 지날 때 큰 별이 어느 사람의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알아보게 했더니, 그 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 아이를 개경으로 데리고 돌아와 길렀으니 바로 강감찬인데, 훗날 송에서 온 사신이 그를 보고 문곡성(文曲星)이 현신한 것이라고 절하였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용재총화(慵齋叢話)』 등에 그에 관한 여러 설화들이 실려있다.

강감찬의 문집으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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