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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康宗]

극과 극을 오갔던 기구한 평생

1152년(의종 6) ~ 1213년(강종 2)

1 머리말

고려의 강종(康宗). 고려 시대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이거나 그에 준하는 역사 애호가가 아니라면 아마 귀에 낯설게 들릴 이름이다. 고려 제22대 국왕 강종은 불과 2년 동안 재위한 뒤에 사망한데다가 그 시기도 무신집권기, 그 중에서도 최충헌(崔忠獻)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그렇기에 국왕으로서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강종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인 62세까지 큰 굴곡을 지닌 인생의 여정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소략한 자료의 한계로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려우나, 남아있는 기록과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엮어서 그의 삶을 따라 가보자.

2 뜻밖에 오른 태자의 자리, 그리고 폐위

강종의 원래 이름은 왕오(王祦)였다. 19대 국왕인 명종(明宗)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광정태후(光靖太后) 김씨(金氏)이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다른 형제는 없으나 연희궁주(延禧宮主)와 수안궁주(壽安宮主) 두 누이가 있었다. 그 외에 아버지의 폐첩들이 낳은 10여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고 한다.

왕오는 1152년(의종 6) 4월에 태어났다. 왕오의 아버지인 명종, 즉 왕호(王晧)는 당시 국왕인 의종(毅宗)의 동모제로 익양후(翼陽侯)에 봉해져 있었다. 즉 왕오는 국왕의 조카로 태어났던 것이니, 당시 고려에서 가장 존귀한 지위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 중에 하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이 마냥 편안하고 여유롭지는 않았을 수 있다. 의종은 도참(圖讖)의 말을 믿고 동생들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의종의 친동생이자 익양후의 친형인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은 역모를 꾸몄다는 무고를 받아 유배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익양후와 그의 가족도 매우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최여해(崔汝諧)라는 신하가 익양후에게 그가 왕위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자 입단속을 시켰다는 일화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왕오가 19세가 되었던 1170년(의종 24), 고려에는 큰 파란이 밀어닥쳤다. 정중부(鄭仲夫)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쥔 것이다. 바로 무신정변이 발발한 것이다. 국왕 의종과 태자(太子)는 섬으로 추방되었고, 태손(太孫)은 죽임을 당하였다. 정변이 일어난 개경의 분위기는 대단히 살벌하였다. 무신과 병사들은 수많은 문신과 환관 등을 학살하였고, 그들의 집을 통째로 헐어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쿠데타의 핵심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이고(李高)는 문신을 모두 죽이려다가 정중부의 제지를 받기도 하였다. 정중부 등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바로 익양후를 데려와 왕위에 앉혔다. 즉위하였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상 명종과 그의 가족들은 아마도 큰 불안감에 떨었을 것이다.

이듬해 1월, 왕오는 성인으로서 관례(冠禮)를 치렀다. 왕실의 큰 행사로 기쁘게 잔치가 열릴 날이었으나, 그날마저도 이고가 잔치자리에서 난을 일으키려다가 또 다른 정변 주모자인 이의방(李義方)에 의해 제거되는 살벌한 상황이 발생했다.

3년 뒤인 1173년(명종 3) 4월, 왕오는 왕태자(王太子)에 책봉되었다. 이 즈음하여 그는 왕숙(王璹)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이어 1174년(명종 4) 3월에는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하였으니, 사평왕후(思平王后) 이씨(李氏)였다. 이들의 사이에서는 수녕궁주(壽寧宮主)가 태어났다. 태자의 장인이 된 이의방은 더욱 권세를 부렸으나, 그 해 겨울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국 사평왕후도 반역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고 말았다. 바로 다음해인 1175년(명종 5) 9월에 왕숙은 새로 신안백(信安伯) 왕성(王珹)의 딸을 새 태자비로 맞이하였으니, 이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이다. 이 둘의 사이에서 훗날 차기 국왕 고종(高宗)이 태어난다. 한 나라의 태자였지만 혼인도 이별도 모두 권신(權臣)들 간의 알력에 따라야 했던 모습이 안타깝다.

그런데 부왕 명종은 비록 무신 권력자들에게 눌려 왕으로서 위세를 부리지는 못하였지만 오래 왕위를 지켰다. 자연히 왕숙도 태자로서 오랜 세월을 보내었다. 학생들을 시험하여 시학(侍學)을 선발하고, 백관들로부터 생신을 하례 받고 아버지를 찾아뵙는 등 그의 평온한 일상에 관한 기록이 살짝 보인다. 이때가 1195년(명종 25) 4월이니, 어느새 왕숙이 태자가 된 지도 23년째, 그의 나이 44세였다. 당시 세상에서 그를 ‘늙은 태자’라고 불렀던 것도 이해가 된다.

물론 이러한 잠시의 평온함이 종종 찾아왔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무신 권력자들 간의 살벌한 투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1196년(명종 26) 4월에는 포악하기로 악명 높았던 이의민(李義旼)이 최충헌(崔忠獻) 형제에 의해 제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개경 한복판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계속되는 여러 세력 간의 칼부림 속에 왕의 측근들과 금군(禁軍)∙환관(宦官)들도 많이 목숨을 잃었다. 8월에는 명종과 태자가 성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에 행차 인근에서 소란이 벌어지자, 사람들 사이에 왕에게 변고가 생겼다고 헛소문이 돌았다는 이야기가 당시의 상황을 전해준다.

최충헌 등은 명종이 늙고 정치에 게으르며 소군(小君)들을 단속하지 못하는 등 국왕으로서 자격이 없으며, 태자 왕숙 역시 우매하고 유약하여 그 후계자로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결국 이듬해인 1197년(명종 27) 9월에 명종을 폐위시키고 평량공(平涼公) 왕민(王旼)을 새 왕으로 즉위시키니, 그가 20대 국왕 신종(神宗)이다. 폐위된 명종은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되고, 태자 왕숙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당시 왕숙은 태자비와 함께 비를 맞으며 궁에서 걸어 나왔으며, 역마(驛馬)를 타고 강화도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46세의 ‘늙은’ 태자가 어떤 심정이었을까. 살아서 무사히 유배지까지 간 것만으로도 감사했을까.

3 긴 유배 끝의 복귀, 그리고 더욱 뜻밖의 즉위

강화도에서의 유배 생활은 길었다. 유배지에서의 삶이 어땠는지에 대해 전해주는 기록은 없다. 1202년(신종 5) 11월, 창락궁에 유폐되어 있던 명종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마도 부왕의 서거 소식은 전해졌겠지만, 유배지에 있던 왕숙은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 당시 나라사람들도 이를 애통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의 애통함은 또 어떠했을까.

그에 관한 다음 기록은 1210년(희종 6) 12월에 국왕 희종이 그를 강화도에서 소환하였다는 것이다. 13년만의 귀환이었다. 이미 그의 나이 59세였다. 부왕 다음으로 즉위하였던 신종도 이미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희종이 즉위한 지도 벌써 6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희종은 이어 1211년(희종 7) 1월에 왕숙을 수사공·상주국·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으로 책봉하고, 왕정(王貞)으로 이름을 고쳐주었다. 신종은 명종의 동모제였으니, 1181년(명종 11)에 태어난 희종에게 왕숙-이제는 왕정-은 서른 살 위의 사촌 형님이었다. 나이든 사촌 형님을 개경으로 모셔 노후를 보살피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었을까. 살아서 개경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왕정의 귀환 심경은 또 어떠했을까.

왕정의 귀환은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최충헌의 허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이를 허락한 것은 또 무슨 마음에서였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든, 당시 고려의 정국은 갑자기 예측할 수 없었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왕정이 돌아온 그 해 12월, 희종은 궁궐에서 측근들과 모의하여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뜻밖의 기습으로 최충헌은 크게 당황하였지만, 결국 최충헌의 부하들에 의해 희종의 친위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분노한 최충헌은 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내쫓았다가 다시 자연도(紫鷰島)로 옮기고, 태자와 종실∙여러 신하들을 대거 유배하였다. 그리고 왕정을 즉위시키고 이름을 왕오(王祦)라 고쳤다. 22대 국왕 강종은 이렇게 즉위하였다. 그의 나이 60세의 겨울이었다. 40여 년 전 아버지가 정중부에 의해 갑작스레 즉위하였던 풍경과 아주 유사한, 그러나 더욱 살벌한 분위기였다.

4 재위 기간의 활동

12월에 즉위한 강종이 재위한 기간은 불과 1년 9개월 정도였다. 정치적 상황도, 나이도, 기간도 그가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는 어려웠다. 금(金)에 즉위 사실을 알리고 책봉을 받은 일과 최충헌에게 공신호를 내리고 부(府)의 이름을 흥녕부(興寧府)에서 진강부(晉康府)로 고쳐준 일 정도가 눈에 뜨이지만, 이 역시 최충헌의 정치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족들에 대한 조치도 보이는데, 1월에 안악현(安岳縣)에 있던 아들 왕진(王▼(日+眞(KC01636)))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7월에 왕태자로 책봉하였으며, 5월에 어머니에게 광정태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고, 10월에 부인 유씨를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213년(강종 2) 4월, 부왕 명종의 능인 지릉(智陵)에 배알하였다.

아버지의 능에 다녀온 넉 달 뒤, 강종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나흘 뒤에 유조(遺詔)를 남기고 그날 저녁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유조를 받들어 아들 왕진이 왕위에 올랐다. 물론 최충헌의 용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5 맺음말

강종의 일생을 되짚어보면, 이렇게 극적으로 처지가 거듭 바뀌는 삶을 살았던 그의 심경은 어땠을 것인지 짐작조차 쉽지 않다. 존귀한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의 견제에 운신을 조심해야 했고, 무신정변으로 세상이 뒤집어져 죽을 수도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태자가 되고, 정치적 파랑에 따라 이리 저리 휩쓸리다가, 큰 탈 없이 만년을 보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질 때 쯤 갑자기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유배지에 보내지고, 이제는 강화도에 뼈를 묻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을 때 쯤 돌연 개경으로 소환되고, 정말로 말년을 준비하려 했을 때에 뜻밖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일생을 가장 크게 흔들었던 사람은 최충헌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최충헌이 세웠던 강고한 ‘최씨 정권’이 아들 최우(崔瑀)와 손자 최항(崔沆), 증손자 최의(崔竩)로 이어졌으나, 강종의 아들 고종이 45년 동안 왕위를 지키다가 마침내 최의가 살해당하여 그 세력이 끝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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