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경대승

경대승[慶大升]

청년 장수, 무신들의 횡포를 바로 잡으려 하다

1154년(의종 8) ~ 1183년(명종 13)

경대승 대표 이미지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경대승은 고려 의종[고려](毅宗) 8년(1154년)부터 명종[고려](明宗) 13년(1183년)까지 생존한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무신정권의 세 번째 집권자이다. 그는 명종 9년(1179년) 26세의 나이로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약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집권하면서, 앞뒤 시기의 무신집정자들과는 차별되는 행보를 보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이의방(李義方), 정중부, 이의민(李義旼)을 비롯하여 최씨무신정권의 집권자들, 그리고 마지막 집권자였던 김준(金俊), 임연(林衍)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려사』 반역열전에 올라있는 것과 달리 경대승은 일반 열전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여기서는 그의 출신과 정치적 성장 및 집권의 과정, 그리고 집권기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2 출세와 성장

경대승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광종[고려](光宗) 13년(962년)에 세워진 용두사지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에 이것을 세우는 데에 공이 있는 인물로 경주흥(慶柱洪)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의 가계는 고려 초기 이래로 청주 지역의 향리 집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대승의 집안은 늦어도 그의 아버지인 경진(慶珍) 대에 이르러 무반 가문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경진은 정중부가 집권한 직후의 인사이동에서 종2품의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승진하였다.

경대승의 열전에 따르면 경진은 정2품의 중서시랑평장사까지 올랐다고 한다. 물론 이는 추증일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든 종2품까지 승진한 것은 기록으로 입증된다. 경진의 출세로 그의 집안은 당대의 유력가들과 통혼관계를 맺었다. 경진은 경대승의 동생을 무신정변 당일의 주역 중 하나였던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사위로 들여보냈으며, 자신도 훗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까지 오르는 김준(金俊)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이러한 가문 배경을 바탕으로 경대승은 어린 나이인 15살 때 음서로 정9품의 무관직인 교위에 임명되었다.

이때는 의종 22년(1168년)으로, 그로부터 2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무신정변 당시 겨우 17세였던 경대승이 정변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출세하면서 그 역시 무신으로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경대승은 명종 4년(1174)에 행수(行首)를 거쳐 명종 8년(1178년)에는 정4품의 장군직에 올라 있었다. 관직에 오른 지 불과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례적일 정도로 가파른 승진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대승은 일찍부터 정중부가 발호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으나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라 은인자중하며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청주에서 사단이 발생했다. 청주에 계속 살고 있던 사람들과 청주 출신으로 개경에 적을 두고 살다가 낙향한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갈등은 대규모 충돌로 이어져 사망자만도 100여 명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당시 경대승은 대장군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청주의 사심관으로 있으면서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정권에 대한 경대승의 불만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당시 정중부 정권은 점점 인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鄭筠)이 국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주와 혼인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던 점,

그의 사위였던 송유인(宋有仁)이 문·무관들 모두에게 신임을 얻고 있던 문극겸(文克謙)과 한문준(韓文俊)을 시기하여 좌천시킨 일 등이 연달아 터지면서 조정 관료들이 정중부 세력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경대승은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3 짧은 거사의 밤, 긴 공포의 밤

명종 9년(1179년) 9월의 어느 밤, 장경회(藏經會) 내내 숙위를 섰던 병사들은 모두 피곤해서 잠이 들어 있었다. 견룡군 소속의 허승(許升)은 궁궐에 들어와 있던 정균을 살해하였다. 그는 남보다 용력이 뛰어나 평소부터 정균이 가까이에 두던 인물이었다. 허승의 휘파람소리를 신호탄으로 화의문(和義門) 밖에 매복하고 있던, 경대승이 이끈 30여 명의 결사대는 왕궁으로 진입하였다. 우선 대장군 이경백(李景伯)과 지유 문공려(文公呂)를 제거하고 눈에 띄는 자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 난리에 국왕은 크게 놀랐으나 경대승이 거사의 뜻을 알리고 안심을 시키자 이들에게 손수 술을 내려주며 동조의 뜻을 표하였다. 경대승은 국왕을 설득하여 금군을 출동시켜 정중부와 송유인 부자를 체포할 것을 종용하였다. 왕의 허락이 떨어졌고, 금군은 민가에 숨어 있던 정중부와 송유인, 송군수(宋群秀) 등을 모두 붙잡아 목을 베고 저자거리에 효시하였다.

거사가 성공으로 돌아가자 조정의 신료들이 궁궐로 나아가 축하 인사를 전하였다. 그러나 경대승은 “왕을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어찌 축하를 받겠습니까”라고 하며 안색을 고쳤다고 한다.

무신정변 이후 폐위되었던 전왕 의종을 이의민이 살해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신정변과 이로 인해 성립된 무신정권, 나아가 의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명종의 왕위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또한 정변 직후 명종이 공석인 승선의 자리에 오광척(吳光陟)을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자 그는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이니 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오광척이 글은 조금 알지만 역시 무신이니 정균과 같을까 우려됩니다”라고 하며 반대의 뜻을 표하였다.

즉 경대승은 거사와 동시에 이전의 무신정권과는 다른, 복고적인 성격을 스스로 표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중부 일파는 제거되었지만 무신정권 아래에서 권세를 잡은 무반들은 경대승의 거사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정 시중(侍中)께서 앞장서 대의를 부르짖고 문신들을 억눌러 여러 해 쌓인 우리들의 울분을 씻어줌으로써, 무반의 위세를 펼친 공이 막대한데 이제 경대승이 하루아침에 네 명의 대신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토벌할 것인가”라며 반발하였다.

짧은 거사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기는 하였으나 본래 든든한 기반을 가지지는 못했던 경대승은 매우 불안해하였다. 그는 결사대 백 수십여 명을 모아 자기 집에 두고 훈련시키면서 이를 도방(都房)이라 불렀으며, 조정에 나갈 때에나 사저에 머물 때에나 언제나 이들의 호위를 받았다.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두고 번갈아 숙직하게 했으며, 어떤 때는 자신이 그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서 유대 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몇 사람씩을 거리에 보내 몰래 정황을 살피면서 유언비어를 들으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하였다.

실제로 그의 짧은 집권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역 사건이 일어나 많은 무신들이 연루되어 제거되었다. 여기에는 경대승을 도와 거사를 성공시킨 허승이나 김광립(金光立)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대승은 국가의 중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조정에 나아가 간섭하고 결정을 내렸으며, 국왕 역시도 속으로는 그를 꺼리면서도 수시로 진수성찬과 의복 및 보화를 내려주었으며 그가 요청하는 것은 그대로 다 들어주었다. 재상 이하의 관리들도 모두 그의 집으로 찾아가거나 글을 올려 가며 그의 눈에 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대승은 끝내 신변의 위협을 떨치지 못한 나머지 조정의 공식적인 직책은 맡지 않은 채 사저에 머물렀다고 한다.

결국 경대승은 불안감 속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명종 13년(1183년) 7월 어느 날, 경대승은 갑자기 꿈에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고 나서 병을 얻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 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4 서로를 두려워했던 라이벌 – 경대승과 이의민

경대승은 거사를 성공시킨 직후에도 이의민을 겨냥하여 ‘왕을 시해한 자’라고 하며 그를 제거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의민은 경주의 천민 출신으로 8척의 키에 탁월한 완력으로 경군에 선발되었다가 무신정변 때에 많은 사람을 죽여 출세한 인물이었다.

경대승의 거사 당시 이의민은 크게 겁을 먹고 군사들을 자기 집에 모아 대비하고 있었다. 곧이어 병마사로서 북쪽 변경에 나가있을 때에는 경대승이 처형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접하고서, “내가 경대승을 죽이려고 했으나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누가 먼저 손을 써서 이렇게 한 것인가”라고 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대승이 더욱 앙심을 품게 되자 이의민은 불안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고향인 경주로 낙향해버렸다.

경대승 사망 직후, 그가 이끌었던 도방은 금세 해체되고 말았다. 원래 도방을 이끌었던 김자격(金子格)이 먼저 손을 써서 이들이 난을 일으키고자 모여 다닌다고 무고했던 것이다. 결국 모진 고문 끝에 도방의 무리들은 죽거나 멀리 귀양가게 되었다. 이로써 경대승의 세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경대승이 뜻밖에 일찍 사망한 후, 명종은 이의민이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겁을 먹고서는, 사자를 보내 그를 달래어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결국 이의민은 경대승의 뒤를 이어 무신집정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를 살면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두 라이벌의 운명이 엇갈렸던 것이다.

5 반역열전에서 빠진 경대승, 반역자인가 아닌가

『고려사절요』에서는 경대승의 죽음에 부쳐 그의 인물평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복고할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또 의종을 시해한 자를 치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어렵고 크기 때문에 은인자중하여 드러내지 않았다. 정중부, 송유인 등을 죽이자 왕이 속으로는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보여서 모든 주청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붙었으나 학식이나 용기, 지략이 있는 자가 아니면 문득 거절하니 무관들이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여기서는 경대승에게 복고의 뜻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시대에 복고란 무신정변 이전의 상황으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무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고려의 정치와 사회를 무신들의 무분별한 권력투쟁과 탐욕스러움으로, 그리고 그에 맞선 지방민들의 반란으로 점철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불법으로 축재한 토지를 모두 돌려놓으며 스스로 복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또한 화엄회(華嚴會)를 열어 무신정변과 김보당(金甫當)의 난 때에 희생된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문신들이 그를 중하게 여기며 의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당대의 평가가 후대에 『고려사』를 편찬할 때까지 이어져 그의 전기를 반역전이 아닌 일반 열전에 싣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경대승은 뒷받침해줄 정치 세력의 부재, 무신들의 집단적인 반발과 위협 등으로 집권력을 강하게 행사하지 못한 채 요절함으로써 결국 짧은 집권기간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