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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景宗]

아버지와 신하들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한 임금

955년(광종 6) ~ 981년(경종 6)

경종 대표 이미지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고려 5대 임금으로 이름은 주(伷)이고 자는 장민(長民)이다. 955년(광종 6)에서 태어나서 981년(경종 6)에 사망했다. 재위 기간은 975년(경종 즉위년)부터 981년(경종 6)까지이다. 아버지는 광종(光宗)이고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헌애왕후(獻哀王后)와의 사이에서 목종(穆宗)을 낳았다.

2 아버지에게 기를 펴지 못한 어린 시절

경종은 광종의 나이 31세 때인 955년(광종 6)에 태어났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자라는 동안 그는 아버지 광종의 왕권강화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대상에는 왕실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광종은 아들인 주 즉, 경종까지도 의심을 할 정도였다. 아버지의 서슬파란 기세에 눌려 살아야만 했을 경종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960년(광종 11) 기록을 보면, 의심을 받은 경종이 아버지 광종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정도였다

고 하니, 그나마 경종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대목왕후 덕분이었던 듯하다.

이러한 사정과 관련해 최승로(崔承老)는 “경종은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부인의 손에서 자랐던 까닭에 문 밖의 일을 보아서 안 적이 없습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기 때문에 광종 말년을 당하여 능히 후회할 만한 과오를 면해 천자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라는 평가를 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인의 손에 자라 문 밖의 일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대목왕후의 보호 아래서 자랐음을 말해준다. 대목왕후는 광종의 누이이자 부인이기는 했지만 노비안검법 문제로 서로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즉 정치적 성향이 다른 부모 밑에서 경종이 자란 것이다. 경종에 대해 광종 말년에 천성이 총명해 후회할 만한 과오를 면했다는 최승로의 언급은 경종이 광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즉위할 수 있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만큼 경종이 아버지의 신임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큰 노력을 기울였음을 말해주는 서술이 아닌가 한다.

경종은 11살인 965년(광종 16) 2월에 다음 대를 이을 왕자의 신분인 ‘정윤(正胤)’에 책봉되었다. 원복(元服)을 입고 정윤·내사·제군사·내의령(正胤·內史·諸軍事·內議令)에 제수된 것이었다. 원복은 성인식인 관례를 올릴 때 입는 복장이다. 전근대시기에 관례는 대개 결혼 직전인 15∼6세에 올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종의 관례는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정윤에 임명될 때 그는 병사에 관련된 모든 일을 관장하는 제군사와 임금을 보좌하는 비서실장격인 내의령에 함께 임명되었다. 11살의 경종이 그런 거대한 권력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기보다는, 상징적인 지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경종 왕위에 오르다

21살이 되던 975년(광종 26) 5월에 광종이 사망하자, 정윤 왕주는 임금 자리에 올랐다. 왕위에 올라서 처음 한 일은 아버지 광종에 의해 귀양을 갔던 사람들을 복귀시키거나, 감옥에 갇혀 있던 이들과 죄에 연루되었던 자들을 풀어주는 일이었다. 그는 또한 광종대에 승진하지 못했던 사람을 발탁하거나,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직시켜 주었다. 그리고 채무를 덜어주거나 조세와 공납을 덜어 주는 일도 동시에 진행했으며, 광종대에 임시로 설치됐던 감옥을 헐고 다른 사람들을 모함하는 참소글들을 불사라 버렸다. 이는 광종이 한 일들을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경종대에는 광종대에 피해를 입은 이들이 대거 실세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경종은 광종대에 참소를 입은 사람들에게 복수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그 복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한 정황을 알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광종의 개혁 활동에 동참했던 관료들이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무분별한 복수 허용은 다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집정이었던 왕선(王詵)이 복수를 핑계로 태조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임의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복수를 허용했다 해도 얼마 남지 않은 태조의 자식들에게까지 억울하게 피해가 가는 것은 충격을 던졌다. 경종은 결국 복수하는 것을 금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종이 순질(筍質)과 신질(申質)을 각각 좌집정(左執政)과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한 조치가 주목된다.

이는 왕선의 만행 이후 내려진 조치로, 집정을 둘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조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4 전시과를 시행하다

경종은 976년(경종 원년)에 전시과(田柴科)를 시행했다. 토지는 당시 경제생활의 가장 기본이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관료 및 군인들에게 지급하는 급료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지(田地)와 땔감 등을 공급하는 시지(柴地)로 나누어 지급했다. 이것을 전시과라고 하는데, 처음 정해졌다 해서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라고도 한다. 관리들은 지급받은 땅에서 얻은 수확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토지를 어떻게 지급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고려 후기의 정치가였던 이제현(李齊賢)이 이 일에 대해 “착한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정전이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못하고 관리들의 녹봉도 불공평하게 된다.”라고 평한 것이 이 사업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는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경종 이전의 토지제도인 역분전(役分田)은 후삼국 통일 전쟁 때 공로를 세운 이들에 대한 논공행상의 성격이 강했다. 지급기준을 성품의 선악과 공의 많고 적음에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관직 체계가 체계화되면서 그에 따라 적절하게 토지를 분급하는 기준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경종대 실시된 전시과에서는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의 4가지 색의 공복에다 문반과 무반 그리고 잡업으로 구분하고 여기에 다시 몇 단계씩의 차등을 두어 토지를 지급했다. 물론 이 때의 시정전시과는 초창기의 토지 급여제였던 까닭에 인품도 고려되는 등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려 전기 토지제도의 시원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5 신하들에게 억눌린 임금

아버지에게 억눌린 어린 시절을 살았던 경종은 임금이 되어서도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주도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이는 최승로의 경종에 대한 평가 중에, “정치의 법도를 알지 못하여 권호(權豪)에게 오로지 맡겼기 때문에 피해가 종친에게까지 미치고” 라는 언급을 통해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권호는 앞서 언급한 집정 왕선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최승로는 이어서 “이로부터 사사로움과 올바름의 구분이 없고 상과 벌이 한결같지 않아 올바른 정치에 미치지 못하고 정사를 게을리 하여 드디어 여색에 빠져서 향악을 즐기고 잇따라 바둑과 장기로써 종일토록 시간을 보내니, 경종의 좌우에는 오직 중관(中官)과 내수(內竪)뿐이었습니다” 라는 평가를 하였다. 중관과 내수가 내시를 지칭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경종 주위에는 제대로 된 신하들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뜻한다. 경종이 정치를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경종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여자를 만나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등 오락에 빠져 현실의 상황에서 회피하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최지몽(崔知夢) 같이 왕을 위해 반역의 음모를 미리 경고하며, 경종의 안위를 걱정하는 인물도 없지는 않았다. 최지몽은 980년(경종 5)에 왕승(王承) 등의 반역을 알아차리고 경종에게 숙위를 거듭 경계해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라는 언급을 하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 얼마 안 가서 왕승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지몽 같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하다.

애석하게도 경종은 981년(경종 6) 6월에 심각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 나이 26살로, 한창 열정적으로 일할 때였다. 경종은 점점 병이 깊어지자, 처남이자 4촌 동생인 왕치(王治) 즉, 성종(成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최승로는 이 일을 경종의 매우 훌륭한 업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경종에게도 또한 족히 아름답다고 칭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대저 처음 병환에 걸렸을 때 아직 위독하지 않았는데 침실에서 성상(성종)의 손을 잡고 군국의 큰 임무를 부탁하였으니, 이는 사직의 복일뿐만 아니라 또한 인민의 행복이었다.” 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왕치 즉,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최승로의 평가는 재위 기간 경종의 업적이 그리 대단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경종은 재위 기간 동안 국정을 주도하지 못했던 국왕이었음을 은연중에 담고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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