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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고난 속에서도 가장 오래도록 재위한 고려의 임금

1192년(명종 22) ~ 1259년(고종 46)

고종 대표 이미지

강화 홍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고려왕조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왕

조선왕조 27명의 국왕 가운데 가장 오래 재위한 임금은 제21대 영조(英祖)로 총 52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한편 고려왕조 34명의 국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은 제23대 고종(高宗)이다. 그는 1213년(강종 2) 우리 나이로 20세에 왕위에 올라 1259년(고종 46년) 사망할 때까지 총 45년 10개월 동안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영조와는 달리 고려의 고종은 재위 기간 내내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명목상의 임금이었다. 당시는 최씨 일가의 무신집권이 안정된 상황으로 접어들어, 최충헌(崔忠獻)에서 최우(崔瑀) 등으로 이어지는 무신집정자들이 국왕을 압도하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또한 밖으로는 즉위 무렵부터 시작된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의 격동에 휩쓸려 거란족의 침입(1216~1218)을 비롯하여, 1231년부터는 거의 30년 동안 몽골의 침입을 견뎌내야 했다. 한마디로 고려시대 전체를 통틀어 안팎으로 가장 고난을 겪었던 때가 바로 고종의 재위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다

고종의 이름은 철(㬚)이며, 처음 이름은 진(瞋), 즉위할 때에는 질(晊)이라고 하였다. 자는 대명(大明), 또는 천우(天祐)이라고 하였다. 1192(명종 22) 정월에 강종(康宗)과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국왕은 그의 할아버지 명종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태자의 자리에 있었다. 무난한 시대였다면 왕손(王孫)인 그는 차례에 따라 왕위에 오르게 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국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권력은 무신들로부터 나오던 시대였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1197년(명종 27), 그의 할아버지 명종은 새로 권력을 잡은 최충헌에 의해 “늙고 정사에 염증을 낸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아버지인 태자 왕숙(王璹)과 어린 고종은 강화도로 유폐되었다.

그러던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였다.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신종(神宗)이 곧 훙서하고, 그의 아들인 희종(熙宗)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젊고 패기있는 국왕을 꺼렸던 최충헌은 자신이 강화도로 유폐시켰던 왕숙을 다시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1210(희종 6)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최충헌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는 사건에 희종이 연루되었음이 밝혀지자, 최충헌은 가차 없이 희종을 폐위시켜버렸다. 그리고 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강종, 즉 고종의 아버지였다.

즉위할 당시 이미 환갑의 나이였던 강종은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년 8개월만에 숨을 거두었다. 뒤를 이어 1213년(강종 2) 8월 고종이 즉위하였으니, 그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강화도로 유폐된 지 16년, 말 그대로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3 몽골과의 긴 전쟁과 강화 천도

즉위 직후 고종이 맞이한 국제 정세는 혼돈 그 자체였다. 100년 동안 고려의 북쪽을 굳건히 차지하고 있던 여진족의 금나라는 몽골 초원에서 등장한 몽골족의 무차별 공세 앞에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한반도로 전해졌다. 금나라의 치하에 있던 요동의 거란족은 야율유가(耶律留可)의 지휘 하에 반란을 일으켜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금나라에서 이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한 포선만노(浦鮮萬奴) 역시 금나라를 배신하고 독자세력화하였다. 모두 고종 즉위 무렵의 일이었다. 1216년(고종 3) 8월, 드디어 거란족의 일파 수 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입해오기 시작했고, 이들은 2년여에 걸쳐서 개성 인근은 물론 남쪽으로는 원주·춘천 일대까지를 지나갔다. 한편 이들을 추격하던 몽골군도 고려의 경내로 진입하였다. 1218년(고종 5)의 일이었다. 그해 연말과 이듬해 초에 걸쳐, 고려군과 몽골군은 평양 인근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섬멸하였다. 이른바 강동성 전투가 그것이다.

비록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양국 공동의 군사작전이 전개되었지만, 몽골은 이때부터 고려에 복속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정복지역에 일반적으로 요구했던 친조(親朝), 즉 해당 지역의 군주가 직접 몽골의 대칸을 찾아와 항복의 의식을 행할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몽골이 정복지에 강요했던 여러 조건들을 이때부터 고려에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국왕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직접 찾아올 것을 요구받은 전례는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에 고려 조정은, 그리고 고종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으로 보이며, 결코 쉽게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몽골은 1231년(고종 18)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침략해왔다. 그로부터 6년 전, 고려에 왔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살해된 사건이 구실이 되었다. 북계 지역을 휩쓴 몽골군에게 고려 조정은 사신을 파견하여 막대한 양의 선물을 안기는 등 화친을 모색하였고, 결국 이듬해 정월 몽골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1차 침입이 끝난 후, 당시의 집정자 최우는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1232년(고종 19) 7월에 강화천도가 단행되었다. 몽골군이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거의 40년 동안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가 되었다. 고종의 능인 홍릉(洪陵)과 1237년(고종 24) 훙서한 희종의 석릉(碩陵)도 이곳에 남아 있다.

4 긴 재위의 끝, 강화

고려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이후로도 몽골은 1232년(고종 19)과 1235년(고종 22), 1247년(고종 34), 1253년(고종 40)과 1254년(고종 41) 등 반복해서 고려를 침략해왔다. 몽골은 고려에 항복의 조건으로 출륙환도, 즉 개경으로의 환도와 고종의 친조를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침략은 수개월에서 1년 정도 지속되고, 몽골군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254년(고종 41)에 시작된 마지막 침입은 전국을 휩쓸며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고, 심지어는 강화도 근방을 공략하며 고려 조정을 위협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다. 그해 한 해 동안 전국에서 포로로 잡혀간 수만도 20만 8,6000명에 달했고, 살육된 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전국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피해가 누적되자, 결사항전을 고집해왔던 최씨 무신정권에 대한 반발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결국 1258년(고종 45) 3월,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정자 최의가 유경(柳璥), 김준(金仁俊) 등 대신들에 의해 제거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조정 내에서도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한편 몽골에서도 꾸준히 요구해오던 국왕의 친조 대신에 태자를 보내올 것을 강화의 조건으로 내걸기 시작했다. 이미 나이 60을 훌쩍 넘긴 국왕 고종을 대신해서 태자가 대신 입조하라는 것이었다. 이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어, 결국 1259년(고종 46) 4월, 마침내 태자가 화친을 청하는 표문을 가지고 몽골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종은 그로부터 두 달 뒤인 6월 마지막 날, 유경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몽골과의 길고 긴 전쟁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 그의 길고도 고달팠던 재위기간 역시 끝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5 사신들의 평가

『고려사』에 실려 있는 사신들의 논평은 그에 대한 안쓰러움을 담고 있다. 우선 이제현(李齊賢)의 논평을 먼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5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배운 것으로 자기의 덕을 쌓고 늘 근신하는 자세로 왕위를 보전하므로 백성들이 기뻐하고 하늘이 도왔다.” 또 이름을 남기지 않은 다음과 같은 사신의 평도 있다. “고종의 치세에 안으로는 권신(權臣)들이 연이어 정권을 잡았고, 밖으로는 여진과 몽골이 해마다 침략해왔던 탓에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수치를 묵묵히 견뎌냈기 때문에 그 보위를 보전하였으며,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적이 공격해 오면 성을 견고히 쌓아 단단히 수비하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심지어 태자를 시켜 예물을 가지고 직접 몽골에 입조하게까지 했으므로 마침내 사직이 훼손되지 않았고 나라를 길이 보전하게 된 것이다.”

그의 긴 치세에 비해서,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서 고종에 대한 사신의 평가를 들을 기회는 많지 않다. 그의 세가 말미에 남아있는 위의 두 사평에서는 공통적으로 고종이 오래 재위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가 근신하였던 데에서 찾고 있다. 강한 권신과 강한 외적이 안팎에서 위협하던 시대에, 무려 46년이나 왕위를 지켜내었던 것 자체가 그의 성격과 왕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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