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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원나라 공주를 사랑한 고려왕, 고려의 부흥을 위해 힘쓰다

1330년(충숙왕 17) ~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 대표 이미지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은 1351년(공민왕 즉위년)에 즉위해 1374년(공민왕 23)에 시해당하기까지 23년간 재위했다. 그가 재위한 시기는 대외적으로 몽골(원)의 쇠퇴가 가시화하고 명이 중국대륙을 장악해갔던 시기이다. 대내적으로는 100여년 이상 지속되었던 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고려의 정치·사회적 갈등과 혼란, 국왕 위상의 약화가 극대화하는 한편으로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요구들이 생겨나고 있던 시기였다. 몽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대내적 정치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공민왕의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몽골과의 관계 청산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발생한 고려 내부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했다.

경기도 개성에 있는 현릉(玄陵)이 그의 능이다. 공민왕은 글과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 대표적인 작품으로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전하며, 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염제신의 초상화, 즉 〈전공민왕필염제신상(傳恭愍王筆廉悌臣像)〉은 보물 1097호로 지정되어 있다.

2 가족관계 및 즉위 이전의 활동

공민왕은 1330년(충숙왕 17)에 충숙왕(忠肅王)과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충혜왕(忠惠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초명은 왕기(王祺)이며, 개명하여 왕전(王顓)이라 했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이다. 부인으로는 몽골 위왕(魏王) 볼로테무르(孛羅帖木兒)의 딸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외에, 이제현(李齊賢)의 딸 혜비(惠妃) 이씨, 종실 왕의(王義)의 딸 익비(益妃) 한씨, 안극인(安克仁)의 딸 정비(定妃) 안씨, 염제신(廉悌臣)의 딸 신비(愼妃) 염씨가 있었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에 즉위하기까지, 공민왕은 10년 이상 몽골에서 숙위생활을 했다. 이 와중에 1344년(충혜왕 5)에 충혜왕이 사망하면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고려 신료들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충혜왕과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소생인 충목왕(忠穆王)이 왕위에 올랐다. 1348년(충목왕 4) 충목왕이 사망한 후에도 권준(權準), 이곡(李穀), 이승로(李承老), 윤택(尹澤) 등 다수의 고려신료들이 몽골에 글을 올려 왕기, 즉 공민왕을 왕으로 세울 것을 청하기도 했다.

몽골은 친원세력의 지지를 받은 충정왕(忠定王)을 즉위시켰으나, 덕녕공주 세력 및 외척 세력들이 발호하여 국정이 정상화되지 못했다. 여기에 왜구(倭寇)마저 침입하게 되면서 몽골은 1351년(충정왕 3, 공민왕 즉위년)에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즉위시켰다.

3 재위 전반기의 활동 - 원년, 5년 개혁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즉위한 공민왕은 재위기간 동안 수차례의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그는 즉위 직후 충정왕대 권력층을 제거하는 한편으로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1352년(공민왕 1) 2월에는 정방을 혁파하고 문무의 인사를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로 돌렸으며, 국왕권 강화와 정치기강 확립을 골자로 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1352년(공민왕 1) 정월에는 몽골식 머리모양인 변발을 하고 그들의 옷인 호복을 입던 관습을 폐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그 지지기반이 되었던 수종공신들, 기씨일가를 주축으로 하는 부원세력들이 각종 폐단의 주체였음에도 그들을 개혁대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민왕 원년의 개혁은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이는 그를 추대했던 유신(儒臣) 세력들의 실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색(李穡)은 1352년(공민왕 1)에, 공민왕 즉위 후에도 현명한 인물이 등용되지 못하고 간사한 자들이 다 제거되지 못한 상황, 한 가지 정책도 행해지지 못한 상황 등을 지적하며 그에 대한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원년 개혁조치의 방향성은 1356년(공민왕 5)의 이른바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를 통해 더욱 분명히 나타나며, 이는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그간 기황후(奇皇后)와 몽골을 배경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국왕권을 위협했던 기철(奇轍) 및 그 추종세력들을 숙청하고, 몽골의 고려 내정간섭기구로 기능해 왔던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를 혁파했다. 이어서 병마사 인당(印璫)으로 하여금 압록강 서쪽의 8개 참(站)을 공격하게 했으며, 병마사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에 세력기반을 갖고 있던 환조[이자춘](桓祖) 등이 고려군에 내응하여, 쌍성총관부를 수복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몽골의 지정(至正)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7월에는 몽골의 요구에 의해 격하되었던 관제를 고려전기 문종[고려](文宗)대 관제로 개편했다.

이에 몽골은 고려에서 보냈던 사신을 구류하고 고려를 토벌할 것이라 하며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상 고려를 공격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몽골은 1356년(공민왕 5) 7월에 고려의 군사행위를 변방 도적의 행위로 규정하며 사태 수습을 시도했다.

공민왕은 즉위 초, 기철 등 세력에 의해 국왕권이 위협받던 가운데 기철의 반란에 대한 고발을 접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여기에는 몽골의 쇠퇴가 가시화한 상황에 대한 고려도 있었으나 아직 몽골의 쇠퇴를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려 내부적으로도 유신(儒臣) 세력 등은 지속적으로 내정 개혁을 요구했으나 그것이 반원적인 형태로 전개되는 것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않았다. 이는 기철 세력을 주살하는 데에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공신책봉에 포함된 인물들이 대개 공민왕의 외척, 수종공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민왕은 압록강 서쪽의 공격을 주도했던 서북면병마사 인당을 죽임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군사행동이 자신의 뜻과 관계없는 것임을 밝혔다. 또한 기씨 세력을 주살한 것도 그들의 반란 모의로 인해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이야기하며 몽골과의 관계를 수습하고자 했다.

4 신돈의 등용 - 배경과 결과

1356년(공민왕 5)의 ‘반원개혁’을 통해 고려-몽골 관계가 단절되지는 않았지만, 이 관계는 상당부분 변화하여 고려전기의 형식적 사대관계로 회귀한 듯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359년(공민왕 8)에 발발한 제1차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은 공민왕 5년 개혁의 성과를 상당부분 후퇴시켰다. 홍건적의 침입에 직면해 고려는 1361년(공민왕 10)에 다시 정동행성 관원을 두며 몽골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그러나 몽골은 고려에 침입한 홍건적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홍건적이 2차로 침입해 오자, 11월에 공민왕은 복주(福州)로 파천했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총병관을 김용(金鏞)에서 정세운(鄭世雲)으로 대체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1월에 정세운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는 컸다. 정세운이 전쟁에서의 공으로 공민왕에게 총애받을 것을 우려한 김용은 왕명이라 속여 이방실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했고, 다시 이들에게 지휘관을 살해한 죄를 씌워 살해한 것이다.

국왕이 외침으로 피난가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승리의 주역이 모두 참살당한 가운데 기황후는 1356년(공민왕 5)에 기철 등이 처형당했던 것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공민왕의 폐위를 도모했다. 1362년(공민왕 11) 12월, 몽골황제가 덕흥군(德興君)을 고려국왕으로 세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 1363년(공민왕 12) 3월에 공민왕이 복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개경 주변 흥왕사(興王寺)에 머물다가 시해 위협을 당한 일이 발생했다. 이는 김용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공민왕은 시해를 면했으나 왕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환자 안도치(安都赤)가 죽임을 당했다.

공민왕이 시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이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삼아 요양의 군사로 호송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364년(공민왕 13) 1월에 덕흥군의 군대와 고려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덕흥군의 군대는 초반에 기세를 올리는 듯 했으나 결국 최영(崔瑩)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승리했다. 이에 같은 해 10월에 몽골에서는 공민왕을 복위시킨다는 조서를 보내 왔다.

이로써 공민왕은 더이상 몽골과의 관계에서 국왕권을 제약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연이은 전란의 과정에서 정세운, 안우, 김득배, 김용 등 공민왕의 측근세력들이 사망하고, 공을 세운 무장세력들이 대거 공신으로 책봉되어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대두하여 도당(都堂)을 장악함에 따라 공민왕의 국왕권은 내부로부터 제약받게 되었다. 또한 세족, 유신, 신진세력 등 정치세력들이 서로 당파를 이루어 공민왕의 개혁 추진에 적극 동조하지 않는 상황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국정주도권을 회복하고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 신돈(辛旽)을 등용했다. 1365년(공민왕 14) 5월, 공민왕은 신돈을 사부로 삼고 국정을 자문했다. 공민왕은 사실상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그를 통해 최영, 이인복(李仁復), 조희고(趙希古), 홍사범(洪師範), 경복흥(慶復興) 등 신흥무장세력과 당대의 유력한 문신 대다수를 숙청하고 국정주도권을 장악했다.

신돈 집권기에 이루어진 개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우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행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개혁이 있다. 이는 이전 시기의 전민변정사업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더하여 1368년(공민왕 17)에 관리의 근무일수에 따라 그 승진을 결정하는 순자법[순자격](循資法)을 실시하여 무장세력들이 군공으로 급속히 승진함으로 해서 발생했던 관료체계상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고려](成均館)을 중영하고 1368년(공민왕 17)에 친시(親試)를 단행하였다. 유신들의 좌주-문생 관계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성균관 중영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신흥유신들이 집결하여 새로이 정치세력화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5 몽골(원), 명의 교체

1368년(공민왕 17) 9월에 몽골의 수도인 대도가 명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몽골 황제가 막북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다. 이어 1369년(공민왕 18) 4월에는 명 황제가 자신이 오랑캐인 몽골을 몰아내었으니 명에 조공하라는 내용을 담은 친서를 보내왔다. 이에 공민왕은 5월에 몽골의 지정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6월에 관제를 개편한 후 다음해인 1370년(공민왕 19)에 명의 홍무연호 사용을 선포함으로써 100여 년간 지속되었던 몽골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때를 즈음하여, 공민왕은 2차례에 걸쳐 동녕부(東寧府) 정벌을 단행했다. 1369년(공민왕 18) 12월에 고려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지용수(池龍壽)를 원수로 삼아 우라산성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어 1370년(공민왕 19) 11월에는 2차 정벌을 단행하여 요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는 당시 기철의 아들이자 몽골 평장사였던 기새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몽골의 유민을 모아 동녕부 지역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고려를 침입했던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아울러 이 지역의 고려 유민을 추쇄하는 한편으로 몽골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것이었다.

6 재위 후반기의 문제점

공민왕은 그의 재위기간 동안 몽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몽골과의 관계를 통해 축적되었던 고려의 정치·사회적 폐단들을 개혁하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경주했고,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재위 후반부 행적들은 부정적으로 평가되거나, 이어지는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정쟁의 요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1365년(공민왕 14) 2월 노국대장공주의 사망으로 발생한 문제이다. 공민왕은 공주 사망 후 정릉(正陵)과 영전을 수축했는데, 특히 영전의 이전과 보수에 너무나 많은 인력과 물자가 소요되었다. 이에 어머니인 명덕태후를 비롯한 대다수 신료들은 이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으나 공민왕은 이를 강행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다음으로, 자제위(子弟衛)와 관련된 공민왕의 음행 문제이다. 1372년(공민왕 21) 10월, 공민왕은 세가의 자제들로 자제위를 구성하고 궁중에 배치했다. 김흥경[고려](金興慶)이 이를 총괄했으며, 홍륜(洪倫), 권진(權瑨), 한안(韓安),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이 이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자제위는 요동 문제를 둘러싼 명과의 긴장관계 및 왜구 침구로 인해 무장들의 세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국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노국대장공주 사망 후 공민왕이 남색을 탐하게 되면서 이들을 가까이 두어 음행을 일삼았다는 내용이나, 후사를 두기 위해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비들을 간통하도록 했다는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는 1374년(공민왕 23)의 공민왕 시해로 이어지게 된다. 공민왕이 환관 최만생(崔萬生)으로부터 홍륜과 간통한 익비의 임신 소식을 듣고 입막음을 위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최만생과 홍륜 등이 역으로 공민왕을 시해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사의 문제이다. 공민왕은 정비들로부터 후사를 얻지 못했다. 신돈의 비첩인 반야(般若)로부터 얻은 아들인 우왕(禑王)이 공민왕을 계승했다. 우왕의 출신문제는 1388년(우왕 14)에 이성계 등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로 제기되었다. 즉 우왕과 그 아들 창왕(昌王)이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이 정치쟁점화되기 시작해 조선 건국의 주요한 명분 가운데 하나로 활용되었다. 이는 조선 건국세력에 의해 제기된 주장이며 현재 남아 있는 사료도 조선 건국 후의 사료이기에 그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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