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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恭讓王]

고려의 마지막 임금

1345년(충목왕 1) ~ 1394년(태조 3)

공양왕 대표 이미지

고양 공양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네 번 칭호가 바뀐 왕

공양왕은 고려의 제34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1345년(충목왕 원년) 출생하여 1389년(공양왕 원년) 11월에 왕위에 올라 1392년(공양왕 4) 7월까지 약 32개월 동안 재위하였으며, 1394년(태조 3) 사망하였다. 이름은 왕요(王瑤)이고, 신종(神宗)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왕균(王鈞)과 국대비(國大妃) 왕씨(王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즉위하기 전에는 정창군(定昌君)에 봉해졌고, 폐위된 후에는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가 1416년(태종 16)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종친인 군(君)에서 국왕으로, 망한 전 왕조의 군(君)에서 다시 왕으로 인정받기까지, 네 번이나 그 칭호가 바뀐 것은 그의 곡절이 많은 삶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2 제비뽑기로 왕위에 오르다

1388년(우왕 14) 5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한 이성계(李成桂) 일파는 곧 우왕(禑王)을 몰아내고 그의 아들인 창(昌)을 왕위에 앉혔다. 바로 이듬해 11월, 이번에는 창왕마저도 왕위에서 밀어내버렸다. 우왕과 창왕은 신돈(辛旽)의 후손으로, 왕씨가 아니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왕씨의 후손을 찾아 왕위에 앉혔는데, 이때 선택된 이가 바로 공양왕이었다. 이때의 장면을 조금 자세히 묘사한 기록을 살펴보자.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湧奇), 정몽주(鄭夢周), 설장수(偰長壽), 성석린(成石璘), 조준(趙浚), 박위(朴葳), 정도전(鄭道傳) 등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삼엄한 군사의 호위 속에서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을 논의하였다. 이성계는 정창군 왕요가 신종의 7세손으로 왕실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여 그를 밀었다. 그는 이성계의 사돈인 왕우(王瑀)의 친형이기도 했다. 반면에 조준은 ‘정창군은 부귀한 집에서 나고 자라서 자기의 재산을 다스릴 줄만 알고 나라를 다스릴 줄은 알지 못하니 왕으로 세울 수 없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였고, 성석린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결국 종실 몇 사람의 이름을 써서 계명전(啓明殿)에 가서 태조(太祖)에게 고하고 제비를 뽑았더니 정창군의 이름이 뽑혔다.” 고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비뽑기를 통해서 국왕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신종은 인종(仁宗)의 아들로, 무신정변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의종(毅宗)과 명종(明宗)이 모두 그의 형이었다. 신종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희종(熙宗)이 잠시 왕위에 올랐으나 최씨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되고, 다시 왕위는 명종의 아들 강종(康宗), 그리고 그의 아들인 고종(高宗)으로 이어졌으며, 그 뒤로도 모두 고종의 후손들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신종의 후손들은 종실 가운데서도 한참 방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당시로서는 종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언급된 것을 보면, 13세기 이후, 공민왕으로부터 이어지는 국왕과 가까운 계보의 종실에 인물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신종의 후손이 왕위를 이은 것은 거의 200년 만의 일이었다.

3 뺄셈의 정치, 공양왕의 주위를 제거해나가다

공양왕이 왕위에 머물렀던 약 32개월의 시간, 고려의 마지막 순간은, 저물어가는 왕조를 지키려던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하나하나 스러져가는 시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이성계와 그 일파는 조선 건국에 걸림돌이 될 여지를 조금이라도 지닌 인물이라면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든 정계에서 뿌리 뽑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앞서 위화도회군을 함께 성사시키며 우왕을 몰아내는 데 합력했던 조민수(曺敏修)는 1389년(창왕 원년) 이미 전제개혁, 즉 과전법(科田法) 실시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고 정계에서 사라진 뒤였다. 창왕의 재위 기간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우왕의 장인, 이림(李琳)을 비롯한 창왕의 외척 세력 및 변안열(邊安烈) 등 일부 무신들 역시 공양왕 즉위와 함께 제거되었다. 공양왕 즉위와 함께 수상으로 정계에 복귀한 거두 이색(李穡) 역시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탄핵을 받아 물러나게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도 숙청의 칼바람은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창왕 폐위의 빌미가 되었던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살육이 감행되었던 것이다. 간관을 맡았던 윤소종(尹紹宗)과 오사충(吳思忠) 등이 반대파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미 숙청되었던 변안열은 끝내 죽임을 당했고, 조민수 역시 고문 끝에 죄를 인정했으며, 이색도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공양왕이 자신의 편으로 세우고자 재상에 임명했던 우현보(禹玄寶), 홍영통(洪永通) 등도 그해 5월에 터진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모두 유배되었다. 나아가 이성계와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던 심덕부 역시 군권을 빼앗기고 제거되었다.

치열한 정쟁 속에서 공양왕은 때때로 반격을 시도하였다. 반대파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던 윤소종을 유배 보내기도 하였고, 1391년(공양왕 3) 9월에는 정도전마저 축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해 연말 무렵에는 이색, 이숭인(李崇仁) 등이 소환되어 고위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대파의 중심에는 정몽주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려의 마지막해인 1392년(공양왕 4)에 이르면, 정몽주는 조준과 정도전, 윤소종 등을 유배 보내는 등 대대적인 반격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이성계 일파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암살함으로써 고려왕조를 지켜내려던 마지막 정치세력은 사라지게 되었고, 이로써 고려의 운명도 다하게 되었다.

4 원치 않았던 임금 노릇,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최후

애초에 공양왕에게는 왕위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이며,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양왕은 왕위에 추대되자 “나는 평생 의식과 노비가 모두 풍족했거늘, 이제 와서 짐이 이렇게 무거우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사돈인 강시(姜蓍)는 “여러 장수와 재상이 전하를 옹립한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기를 도모한 것이지 왕씨(王氏)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고 믿지 마시어 스스로 보전할 방도를 생각하십시오.”라고 충고하였다. 그의 바람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고, 공양왕은 재위 32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를 폐위한다는 왕대비의 명을 받은 공양왕은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습니까.”라고 하며 원주로 물러나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공양군(恭讓君)에 봉해지고 간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망한 왕조의 마지막 왕의 운명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1394년(태조 3) 발생한 왕씨 모반사건으로, 공양왕의 세 부자는 간성에서 다시 삼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만에 태조는 왕씨 일족을 제거하라는 신료들의 청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공양왕과 그의 두 아들을 처형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후 정식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로써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은 숨을 거두게 되었다.

고려사의 찬자는 그의 성품을 묘사하여 “인자하고 부드러웠으나 행동은 우유부단하였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고려는 기울어져 가는 왕조였지만, 이를 지탱해내려는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이성계 일파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공양왕은 이들을 후원하며 처절할 정도의 몸부림을 쳤지만, 결정적 순간에 과단성 있는 대처를 하지는 못하였으며, 그 결과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왕릉은 공식적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민간에서는 그가 처형당했던 강원도 삼척의 공양왕릉을 진짜 공양왕의 무덤이라고 전하고 있다. 죽어서 묻힌 곳이 어디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점은 공양왕의 애달픈 생애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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