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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光宗]

냉철한 국왕, 왕의 힘을 키우다

925년(태조 8) ~ 975년(광종 26)

광종 대표 이미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가계

광종(光宗)은 고려(高麗)의 제4대 국왕이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이다. 제3대 국왕인 정종[고려](定宗)의 동생으로, 두 사람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사이이다. 925년(태조 8)에 태어나 975년(광종 26)에 사망했고, 왕위에는 949년(광종 즉위년)부터 975년(광종 26)까지 있었다. 원래의 이름은 왕소(王昭)이다. 자(字)는 일화(日華), 시호(諡號)는 대성(大成)이다. 능은 헌릉(憲陵)이다.

배우자는 대목왕후(大穆王后)와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이다. 대목왕후는 태조와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경화궁부인은 제2대 국왕인 혜종(惠宗)의 딸이다. 혜종은 태조의 맏아들이지만, 정종이나 광종과는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고려 왕실에서는 이렇듯 왕족 내부에서 혼인을 맺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대목왕후와의 사이에서 제5대 국왕인 경종[고려](景宗)을 비롯하여 효화태자(孝和太子)·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문덕왕후(文德王后)를 낳았다. 경화궁부인이 낳은 자녀에 대한 기록은 없다.

2 즉위 당시의 시대 상황

광종이 왕으로 활동했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무렵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때가 918년(태조 원년)이고, 신라와 후백제를 항복시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한 때가 936년(태조 19)이다. 광종이 왕의 자리에 오른 949년(광종 즉위년)은 이로부터 불과 10여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즉, 이른바 ‘후삼국’ 시대가 끝나고 고려가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로 우뚝 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고려의 왕실과 조정은 국가를 안정시키고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미 태조 때부터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었으며, 광종이 즉위할 무렵에도 여전히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했다. 이후 살펴볼 광종대의 여러 정책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당시에 왕위 계승 및 조정에서의 권력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선 왕위 계승의 경우, 태조가 29명의 부인을 얻었고 그 사이에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낳았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이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자식이 지나치게 많아졌다는 문제를 낳았다. 태조가 사망한 후 맏아들인 혜종이 즉위했지만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다가 2년 만에 사망하였다. 이후 정종이 즉위했으나 그 역시 만 4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광종이 즉위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왕위 계승 분쟁은 고려 초기의 권력 구도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고려의 통일 과정에서 태조에게는 부하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지방 세력들을 규합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 혼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방 세력들을 보통 호족(豪族)이라 부른다. 따라서 태조 사후의 왕위 계승 분쟁에는 유력한 공신들과 지방 세력이 개입되어 더욱 치열해지게 되었다. 또한 왕실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위세를 꺾고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촉진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 상태였다. 광종에게는 이러한 과제들이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3 국가 체제의 정비

광종은 즉위 후 26년 동안 고려를 통치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중요한 제도의 시행과 개편이 이루어져 국가 체제가 정비되어 나갔다.

1) 대외 교류의 활성화

고려는 이미 태조대부터 중국 대륙의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광종 역시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아, 외교와 이를 통한 문물 교류에 큰 열의를 보였다. 특히 후주(後周) 및 이를 이은 송(宋)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951년(광종 2)에는 후주의 연호를 시행했으며, 이듬해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선물을 보냈다. 이에 후주에서는 953년(광종 4)에 사신을 보내 광종에게 특진검교태보사지절현도주도독충대의군사겸어사대부 고려국왕(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充大義軍使兼御史大夫 高麗國王)의 지위를 주었다. 이 뒤로도 양국은 지속적으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이러한 교류에는 자연히 문물 및 제도, 사람의 왕래가 뒤따랐다. 사료가 매우 적게 남아있는 이 시기의 특성상 많은 기록을 찾기는 어려우나, 대표적으로 958년(광종 9)에 후주가 고려에 비단 수천 필을 가져와 구리를 사간 일을 들 수 있다. 고려에서는 다음 해에 다시 구리 5만 근과 자수정(紫水晶)·백수정(白水晶) 각 2천 개 등을 후주에 보냈다. 또한 사신을 보낼 때에 말과 옷, 활, 칼 등을 함께 보낸 사실이 보이며, 『별서효경(別序孝經)』,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황령효경(皇靈孝經)』, 『효경자웅도(孝經雌雄圖)』 등의 책을 후주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후주 이외의 다른 국가들과도 진행되었다는 점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가령 960년(광종 11)에는 오월(吳越)에서 사신을 고려에 보내 천태종(天台宗) 관련 서적을 요청했고, 광종이 고승 체관(諦觀)을 보내 이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이 보인다.

특히 광종이 당시 다수의 중국인들을 초빙하여 정치에 참여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쌍기(雙冀)를 들 수 있다. 후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쌍기는 병이 들어 치료를 위해 잠시 남았는데, 그의 재주를 알아본 광종의 요청으로 고려에 완전히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쌍기는 과거제 시행을 건의하고 여러 차례 그 책임자인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쌍기 외에도 다수의 중국에서 온 관료들이 광종의 총애를 받아, 서필(徐弼) 등 고려인 신하들이 반발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귀화 중국인 관료는 많지 않으나, 채인범(蔡仁範)과 같은 인물의 묘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정황을 잘 보여준다.

2) 제도 정비와 신설

① ‘황도(皇都)’ 호칭과 연호 사용

광종은 고려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연호와 ‘황도’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점이 주목된다. 고려의 국가 제도에는 왕국적인 요소와 황제국적인 요소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황제국적 요소로 지칭되는 것 중에 위의 두 가지가 포함된다. 광종은 960년(광종 11)에 개경(開京)을 황도,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삼았는데, 이는 수도인 개경을 ‘황제의 도읍’으로 지칭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기록이다. 또한 ‘준풍(峻豊)’과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고려의 고유한 기년(紀年)을 정했다는 점도 함께 주목을 받는다.

② 과거제 시행

광종대에 신설된 제도로 이후의 한국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도 과거제(科擧制)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제는 원래 중국의 수(隋)·당(唐) 시기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조정에서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이다. 여기에는 외국인이 참여할 수 있는 빈공과(賓貢科)가 있어서, 신라와 발해인 중에도 여기에 응시하여 합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최치원(崔致遠) 같은 사람도 바로 이 빈공과 합격자 출신이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 초기에 걸쳐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여러 빈공과 합격자들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5대10국(五代十國) 시기까지 이어져, 최언위(崔彦撝)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처럼 후진(後晋)에 유학을 간 인물도 있었다.

신라 시대에는 과거제가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후기에 국학[신라](國學)에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통해 특정한 소양을 갖춘 인재를 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이러한 바탕이 고려 광종대에 들어와서 과거제가 시행되는 기반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과거제의 시행은 958년(광종 9)에 쌍기의 건의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광종은 이를 건의한 쌍기에게 과거 시행의 책임자인 지공거를 맡겼고, 이 해에 시(詩)·부(賦)·송(頌) 및 시무책(時務策) 등을 시험하여 제술업(製述業)과 명경업(明經業), 잡업(雜業)에서 7명의 합격자를 선정하였다.

시기에 따라 시험 내용에 약간의 변화는 있으나, 대체로 제술업은 각종 경전(經傳) 및 역사서 등의 내용을 토대로 주어진 주제에 대해 지은 시와 글로 평가를 하였고, 명경업은 경전에 대한 기억과 이해도를 시험하였고, 전문 기술 분야에 대한 선발인 잡업은 해당 분야 전문 서적의 내용을 시험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잡업의 경우 해당 전문 분야에 배치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하거나 외교 문서나 국왕 문서 등을 작성하는 문한관(文翰官) 등 고급 능력이 필요한 직위에 임명되었다.

과거제는 이후 조선 말기까지 시대에 맞게 변화되면서 지속적으로 운용되었고, 한국 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③ 공복제 시행

조정에서 관료들이 입는 옷을 공복(公服)이라 한다. 광종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관료들의 공복을 정비하였다. 우선 956년(광종 7)에는 백관의 의복을 중국의 제도와 같게 정하였다. 이어 960년(광종 11)에는 원윤(元尹) 이상은 자삼(紫衫)으로,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단삼(丹衫)으로, 도항경(都航卿) 이상은 비삼(緋衫)으로, 소주부(小主簿) 이상은 녹삼((綠衫)으로 공복을 개정하였다.

한편, 남당(南唐)의 사신이 고려에 다녀간 뒤 남긴 『해외사정광기(海外使程廣記)』라는 책의 내용이 일부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관리들의 복장 색상이 자(紫)·단(丹)·비(緋)·녹(綠)·청(靑)·벽(碧)으로 기록되어 두 가지 단계를 더 보여주고 있다. 공복제 시행과 개정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광종이 이렇게 공복에 크게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아마도 관료 제도를 정비하여 조정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④ 영토 확장

고려는 태조대 이래로 지속적으로 북방에 대한 개척을 추진했다. 이는 북방에서 세력을 키워 발해를 멸망시키는 등 강자로 떠오른 거란, 요(契丹[遼])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과 함께, 한반도 북부 지역에 산재해 거주하던 여진(女眞) 부족들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 그리고 영토 확대라는 자연적 지향성 등 다양한 목적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950년(광종 1)에는 장청진(長靑鎭)과 위화진(威化鎭)에 성을 쌓았다. 이후 952년에는 안삭진(安朔鎭)에 성을 쌓았으며, 960년(광종 11)에는 습홀(濕忽)에 성을 쌓아 가주(嘉州)로 승격시키고, 송성(松城)에 성을 쌓아 척주(拓州)로 승격시켰다. 967년(광종 18)에는 낙릉군(樂陵郡)에, 968년(광종 19)에는 위화진(威化鎭)에 성을 쌓았다. 이 외에도 영삭진(寧朔鎭), 안삭진(安朔鎭), 장평진(長平鎭) 등에 축성한 기록이 남아 있다.

⑤ 불교 진흥과 대민 시책

고려의 왕실이 불교를 크게 존중한 것은 다양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 중 광종대에 이루어진 중요한 조치는 바로 고승을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모시는 제도가 확립된 점이다. 당시 혜거(惠居)가 국사로, 탄문(坦文)이 왕사로 모셔졌다. 또한 광종이 균여(均如)를 크게 존중했던 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불교계에 대해서도 과거의 일종인 승과(僧科)를 시행하여, 여기에 합격해야 법계(法階)를 받아 승진할 수가 있었다.

광종은 또한 여러 사찰을 지었다. 아버지인 태조를 모신 원당(願堂)으로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일사(佛日寺)와 숭선사(崇善寺)를 세웠으며, 그 외에도 홍화사(弘化寺), 삼귀사(三歸寺), 귀법사(歸法寺) 등을 세웠다. 그리고 재회(齋會)를 열고 백성들에게 널리 음식 등을 내려준다든지, 방생소(放生所)를 설치하여 물고기를 놓아주게 한다든지 등의 행사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구호를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광종대에 시행된 대민 시책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노비안검(奴婢按檢)이다. 이는 ‘노비를 살펴 검사한다’는 의미이다. 광종은 956년(광종 7년)에 명을 내려 노비를 살펴 검사하여 그 시비를 가리도록 하였는데, 이에 많은 노비들이 그 주인을 배반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태조대 이래의 노비에 대한 정책과 연결 지어 볼 때, 이 조치는 원래 양민이었으나 불법적으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4 정치적 개혁과 갈등

이상에서 광종대에 진행된 각종 통치 활동과 제도 정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들이 모두 평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앞서 광종이 즉위할 무렵의 정세에 대하여 간략하게 다루었듯이,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갈등이 빚어지던 때였다. 이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당시의 개혁 추진과 갈등상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당시의 가장 큰 정치적 갈등 요소는 바로 권력의 분배였다. 즉 궁극적인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왕위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 그리고 고려의 건국과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어느 정도의 권력을 허용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광종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적어도 그가 이러한 시대적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즉 광종의 정치적 목표는 왕권을 강화하고 공신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광종대를 겪고 이후 이후 성종[고려](成宗)대(成宗代)까지 조정에서 활동한 최승로(崔承老)에 따르면, 광종의 즉위 초반은 평화롭고 좋은 정치가 펼쳐진 시기였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도 955년(광종 6)까지는 특별한 갈등 상황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변화가 보이는 것은 956년(광종 7)에 쌍기를 중용하고 노비안검을 시행하였다는 부분부터이다. 최승로 역시 이 시점부터 광종의 정치가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비판하였다. 즉 광종이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와 공신 세력 제압에 나섰다는 것이다. 공신이자 유력한 지방세력 가문의 출신이었던 광종의 부인 대목왕후가 노비안검의 시행을 만류했다는 점이나, 이 때 풀려난 노비들이 옛 주인을 무시하는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로 훗날 다시 노비로 돌리는 조치가 시행된 점은 노비안검이 이들을 거느렸던 유력 가문들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광종이 고려인 신하들의 불만을 야기할 정도로 중국인들을 관료로 지나치게 중용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광종 당대에 서필(徐弼) 이러한 조치에 대해 간언을 올린 것이나, 훗날 최승로가 쌍기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광종이 박수경(朴守卿) 가문처럼 당대 최고의 공신 가문을 몰락시킨 일이나, 역모에 대한 참소가 올라오면 누구라도 강력하게 처벌한 것은 그가 얼마나 강경한 태도를 보였는지를 말해준다. 심지어 왕족도 이러한 살벌한 숙청을 피하기 어려웠고, 광종의 태자조차 몸을 사려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참소가 극심하여 감옥이 부족했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는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상당 부분 실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광종이 사망한 뒤에 그 아들인 경종(景宗)은 즉위 직후에 크게 사면령을 내려서 민심을 수습해야 했다. 또한 광종대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복수 행위로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결국 이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져야 했을 정도였다.

광종대의 여러 개혁과 제도 시행을 통해 고려의 국가 체제는 한층 정비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태도 벌어졌다. 훗날 최승로는 혜종대부터 광종대까지의 정치를 회상하면서, 고려를 세운 공신들과 초기의 관료들 대부분이 그 정치적 혼란 속에서 목숨을 잃거나 실각했다는 점을 안타까워하였다. 또한 태조 왕건의 아들들 역시 대부분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혼란과 갈등은 경종대에도 봉합되지 못했고, 그 다음 국왕인 성종대(成宗代)에 가서야 일단락될 수 있었다. 광종대는 고려가 통일 이후 안정된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겪어야 했던 진통의 시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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