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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均如]

향가를 지어 불교를 설파하다

923년(태조 6) ~ 973년(광종 24)

균여 대표 이미지

균여전(혁연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시대 배경과 출생

균여(均如, 923~973)는 고려 전기의 화엄종 승려이다. 고려가 후삼국 통일(後三國統一)을 이루고 지배체제를 갖추어가는 시기에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주로 활동한 시기는 광종(光宗)대였다. 호족(豪族) 연합을 바탕으로 건립된 고려는 태조 왕건(太祖 王建)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호족들 간에 대립과 다툼이 벌어졌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광종이 즉위하였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전제적 개혁을 추진하면서, 그 사상적 토대를 불교에서 얻고자 하였다. 균여는 이러한 광종의 전제 정치와 불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균여는 황해도 황주(黃州)의 둔대엽촌(遁臺葉村)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변씨(邊氏)로, 일찍부터 황주 지역에 살고 있던 토착 가문 출신으로 보인다. 균여의 탄생설화는 『균여전(均如傳)』에 전해지는데, 누런 봉황 암수 한 쌍이 품에 드는 꿈을 꾼 어머니가 60이 넘어 낳았다고 한다.

2 출가와 화엄사상 수학

균여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당형 선균(善均)을 따라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에게 출가하였다. 균여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가 읊는 화엄 게송을 듣고 하나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 환성(煥性)은 『화엄경(華嚴經)』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또한 균여의 누나 수명(秀明)도 일찍부터 법화경(法華經)을 탐독하였다고 전한다. 균여는 영통사(靈通寺)의 의순(義順)을 찾아가서 본격적으로 화엄사상을 익혔다. 그는 누나 수명에게도 보현보살과 관음보살의 법문을 일러주고 『신중경(神衆經)』·『천수경(千手經)』을 해설해주어, 자신이 배운 것을 전하였다고 한다.

신라 통일기에 의상(義湘)이 개창한 화엄종(華嚴宗)은 신라 말에 북악(北岳)과 남악(南岳)의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사상적인 차이도 있었지만 북악파의 희랑(希朗)은 고려 태조 왕건을 지지하고, 남악파의 관혜(觀惠)는 후백제 왕 견훤(甄萱)을 지지하여 정치적으로도 대립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균여는 북악파를 계승하였으나, 명산대찰을 편력하며 화엄사상을 선양하여 양파의 대립을 해소하고 통합하려고 하였다. 균여는 의상의 사상을 재조명하여 통합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의 『일승법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는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를 알기 쉽게 풀이하여 화엄사상의 근본 뜻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화엄사상을 통일하였다.

또 화엄종의 뛰어난 논저들을 연구하고 정리하여 뜻을 명확히 드러내었다. 이로써 균여는 불교계에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고, 광종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균여는 왕권을 강화하고 전제 정치를 추진하고 있는 광종의 이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3 광종의 개혁과 균여의 활동

949년(광종 즉위년)에 균여는 대목왕후(大穆王后)를 치료하고 대신 병을 앓게 된 스승 의순의 병을 낫게 한 일이 있었다. 그가 직접 광종과 만나게 된 것은 953년(광종 4)이었다. 당시 후주(後周)에서 사신을 보내 광종을 책봉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비가 계속 내려 의례를 거행할 수 없었다. 급히 기청제를 행하게 되었는데, 국사(國師) 겸신(謙信)의 천거로 균여가 나아가 강연하니, 곧 비바람이 걷히고 하늘이 밝아졌다고 한다. 이에 광종은 균여를 극진히 존경하여 아홉 번 절하는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를 대덕(大德)에 봉하고는, 그의 가족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국사 겸신은 화엄종 승려로, 광종의 협조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광종의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958년(광종 9)에 과거(科擧)가 실시되었다. 과거와 아울러 시행된 승과(僧科)에서는 균여의 교설을 정통으로 하여 승려를 선발하였다.

광종은 왕실의 원찰인 불일사(佛日寺)에 벼락이 친 변고를 물리치기 위한 법회에 균여를 청하여 강연하게 하였다. 이어서 균여는 궐 안의 법당인 내도량에 머물면서 정치에 자문을 하였다. 그리고 963년(광종 14)에 광종의 발원으로 송악산 아래에 창건된 귀법사(歸法寺)의 초대 주지가 되었다. 귀법사에서는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여러 가지 물품을 나누어주고, 옆에는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굶주리고 병든 사람을 구제하였다. 균여는 973년(광종 24) 입적할 때까지 귀법사에 머물렀다.

4 균여의 화엄사상과 저술

균여는 의상 화엄사상의 전통을 계승하여 화엄 원교(圓敎)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가 원통대사(圓通大師)라고 불리고, 저술에도 ‘원통(圓通)’이라는 명칭이 들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화엄사상은 성상융회(性相融會)를 특징으로 한다. 성상융회 사상은 공(空)을 뜻하는 성(性)과 색(色)을 뜻하는 상(相)을 융합시키는 이론으로서, 화엄사상을 근간으로 법상종 사상을 융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화엄 법계관을 횡진법계(橫盡法界)와 수진법계(豎盡法界)로 나누어, 수진법계에서는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의미를 살피고, 횡진법계에서는 그 가운데 원칙적인 ‘하나[一]’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 두 법계를 종합한 체계를 주측(周側)이라고 하여, 횡진법계를 근간으로 수진법계까지 융회하였다. 곧 원칙적인 하나 속에 전체를 통합하고, 그것을 일체로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나아가 성속무애(聖俗無碍) 사상으로 성과 속의 차별까지도 융회하고자 하였다.

균여의 제자는 3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공목장기(孔目章記)』, 『오십요문답기(五十要問答記)』, 『탐현기석(探玄記釋)』,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 『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鈔)』, 『화엄삼보장원통기(華嚴三寶章圓通記)』, 『일승법계도원통기』,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등이 있다. 또 향찰(鄕札)로 불경을 해석한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후인들이 방언을 삭제하고 한문으로만 새긴 것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균여의 전기로는 1075년(문종 29)에 혁련정(赫連挺)이 지은 『균여전(均如傳)』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 중기의 의천(義天)은 균여의 사상을 심히 배척하였다.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균여의 저술을 제외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신집권기에 균여의 사상은 다시 주목받게 되었고, 재조대장경[해인사대장경](海印寺大藏經)의 보판(補板)에 그의 저술이 포함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5 향가를 통한 대중 교화

균여는 불교 바깥의 학문에도 해박하였고, 대중 교화에 힘썼다. 향가(鄕歌)로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지어, 일반 백성도 널리 보현보살의 서원을 알고 공덕을 닦게 하였다. 서문에는, 뭇사람이 보기에 부끄럽지만 세속의 놀고 즐기는 도구를 통하지 않으면 그들을 인도할 길이 없고, 비속한 말을 빌리지 않으면 큰 인연을 드러내기 어렵다고 하여 한문을 모르는 일반 대중을 위하여 쉽게 풀어 교리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교화하려는 목적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이 노래가 사람들 사이에 퍼져서 가끔 담벼락에 적히기도 했고, 이 노래를 암송한 병자의 병이 낫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향가는 모두 11장으로 균여가 지은 향가를 최행귀(崔行歸)가 한시로 번역하였다. 최행귀는 중국의 시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글은 중국과 비교해 어느 것이 강하고 약한지 단정하기 어려워 서로 맞설 수 있는데, 중국의 선비들이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하니, 서쪽의 그들이 동쪽의 훌륭한 글을 접할 수 없는 것이 한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균여의 향가를 짓자 곧 한시로 번역하였다. 이후 이것이 중국에 전해지자 당시 송나라의 황제와 신하가 부처님의 글이라 칭송하고 사신을 보내어 균여에게 예를 드리도록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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