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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完者忽都皇后]

원(元) 황실을 장악한 고려 여인, 고려에 칼을 들이대다

미상

1 개요

기황후(奇皇后)는 고려 공녀 출신으로 원(元) 황후의 자리까지 올라 원나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기황후 이전에도 원 황제의 총애를 얻어 황실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한 여성은 존재했다. 순비(順妃) 허씨(許氏)와 종실 왕현(王昡) 사이의 셋째 딸이 원 인종(仁宗)의 바얀쿠투[伯顔忽篤] 황후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김심(金深)의 딸 다마시리[達麻實里] 또한 인종의 황후로 책봉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은 기황후처럼 원 조정과 고려 조정 양측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황태자를 생산하지 못한 그녀들은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외손자이자 원 황실의 공신이었던 충선왕(忠宣王)에 비하여 입지가 매우 좁았으며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도 못했다. 원나라의 황후로 책봉된 고려의 여인들 중에서 원의 후계구도를 뒤흔들고 고려 국왕의 지위까지 위협한 여성으로는 기황후가 유일무이하였다. 공녀로 끌려간 원나라에서 황후의 지위에까지 오른 정치적 능력이 주목되는 한편, 고려의 내정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깊숙하게 개입하려 한 기황후의 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기황후의 삶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2 가계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원 황실에서의 이름은 울제이쿠투[完者忽都]이다. 아버지는 총부산랑(摠部散郞)과 선주(宣州) 수령을 역임하고 훗날 영안왕(榮安王)에 추증된 기자오(奇子敖)로, 그는 무신정권 하에서 벼락출세한 무신가문 출신이었다. 기자오는 이행검(李行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기식(奇軾)·기철(奇轍)·기원(奇轅)·기주(奇輈)·기륜(奇輪) 등 다섯 명의 아들과 여러 딸을 두었다. 이 가운데 막내딸이 바로 기황후였다.

기황후는 원 순제(順帝)의 후궁이 되어 훗날 북원(北元)의 제2대 황제가 되는 아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출산하였다. 나아가 그녀는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된 뒤 고려인 권겸(權謙)의 딸을 간택하여 황태자비로 삼았다. 이민족 여성이라는 사실이 황후가 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유시리다라의 황태자 책봉까지 어렵게 만들었던 상황을 감안할 때 그녀의 이러한 행보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원 황실은 공주를 이민족에게 시집보낼지언정 이민족 여성을 정실 황후로 맞아들이지는 않았는데, 기황후는 이러한 관례를 깨고 정식으로 고려 여성을 황태자비로 삼았던 것이다. 몽골 황실에서 혼인 관계를 맺는 방식과 대상은 상당히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기황후가 자신이 먼저 파격을 이룬 후 황태자비의 인선도 역시 파격적으로 단행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로부터 그녀의 등장이 원과 고려 양국에 미친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3 공녀 신분에서 황후가 되기까지

공녀로 차출되어 원 황궁에서 일하던 기황후는 순제의 차 시중을 들면서 총애를 얻어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황후로 책봉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고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모멸을 감내하였다. 순제의 정비였던 타나실리[答納失里] 황후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학대하였으며, 타나실리가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후에는 승상 바얀[伯顔]이 그녀의 황후 책봉을 격렬히 반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기황후는 황제의 총애만으로는 원 황실의 폐쇄성을 극복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치밀한 행동에 나선다.

기황후는 1340년(충혜왕 후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순제의 제2황후로 책봉될 수 있었다. 아유시리다라의 생산을 계기로 원 황실에서 입지가 높아짐과 동시에 그녀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던 바얀이 실각한 결과, 그녀는 출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황후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후 기황후는 원 황실에 친화적인 행보를 보이며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한다. 기록에 따르면 기황후는 한가할 때마다 『여효경(女孝經)』과 역사책을 읽으며 역대 황후의 행실 가운데 본받을 만한 것을 탐구하였고, 혹 맛있는 음식을 얻게 되면 우선 태묘(太廟)에 보낸 후 맛을 보았으며, 기근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빈민을 구제하는 데 앞장서 인망을 쌓았다. 이러한 행위가 기황후가 선했기 때문에, 혹은 인자했기 때문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사고일 것이다. 이는 당시의 정치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혹은 모범적으로 여겨지던 일들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이 황후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포석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4 고려 국왕권에 대한 도전

기황후와 그의 일족은 충혜왕이 폐위되고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기륜과 충혜왕의 충돌을 계기로 충혜왕에게 대적하기 시작한 기황후 일족은, 기철을 중심으로 고려를 원의 지방행정기구로 편입시키자는 입성론(立省論)을 제기하여 충혜왕의 폐위를 조장하였다. 그리고 기황후의 수하였던 고용보(高龍普)를 통해 충목왕을 원 순제에게 보임으로써 그의 즉위를 허락받았다. 본격적으로 고려의 정치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한 것이다. 고려에 남아 있었던 기황후의 일족들도 이러한 기황후의 권력을 믿고 갖은 비리와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원의 최고 권력자는 당연히 황제인 순제였다. 비록 순제가 무능했던 황제였으나, 기황후가 순제를 무시한 채로 자신의 권력욕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제가 건재하고 독자적인 세력기반 또한 아직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충목왕의 즉위 직후 순제가 고려의 내정을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내자, 기황후는 친척의 범법행위를 경계하는 글을 고려로 보내 황제의 뜻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솔선하여 황제의 뜻을 받드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기씨 일가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으니, 이 서한은 순전히 보여주기용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황후의 지지에 힘입어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고 이윽고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자 기씨 일족의 전횡은 비로소 최고조에 달한다. 기철이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몰며 대화를 나눴다는 일화나 왕에게 올리는 글에서 자신을 신하로 칭하지 않았다는 일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기황후와 아유시리다라를 통해 원 황실과 연결된 기씨 일족은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에게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이에 즉위 5년째가 되던 해인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은 마침내 기씨 일족을 처단하고 원과의 통상적인 관계를 부정하였다. 기황후 세력에 의해 원 조정이 장악되어 파행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기씨 일족의 제거는 고려의 국왕권을 회복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5 공민왕 폐위시도와 기황후의 정치적 실패

고려에 있는 가족들의 죽음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나 기황후는 즉각적으로 공민왕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지 않았다. 여전히 제2황후의 지위에 머물러 있고 황태자의 정치적 기반 역시 확고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기황후는 한동안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며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362년(공민왕 11) 12월, 드디어 기황후의 입김에 의하여 원 조정에서는 고려의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새 고려 국왕으로 추대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다음해에는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보노(奇三寶奴)가 새 고려 국왕의 원자(元子)로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해인 1364년(공민왕 13)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고려로 보내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덕흥군은 충선왕의 서자로 칭해졌으나, 그 신원이 불확실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자기의 허수아비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을 고려 국왕으로 삼고 심지어 기씨를 원자로 삼아 왕조까지 뒤바꾸려 하였던 기황후의 시도는 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를 앞세운 고려군의 맹공격에 의하여 실패로 끝나버렸다. 이로써 군사적 힘으로 원의 내정간섭을 물리친 고려는 원의 간섭으로부터 보다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기황후는 고려 내부의 세력기반을 잃어버린 결과 원 조정에서의 정치싸움에 몰두하게 된다. 그녀는 황제의 측근세력과 대립하면서 1365년(공민왕 14)에 다시 한 차례 황태자에게 황위를 내선(內禪)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고, 마침내 제1황후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공민왕에 대한 공격이 실패한 이후 기황후가 보인 행보는 그녀에게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였다. 1370년(공민왕 19)에 그녀의 염원대로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즉위하였으나, 오랜 정치싸움으로 피폐해진 원 조정은 1368년(공민왕 17) 명(明)과의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미 북쪽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이후 기황후가 어떠한 삶을 살고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경기도 연천군에 기황후의 무덤으로 알려진 고분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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