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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金方慶]

몽골의 시대를 맞이한 노장, 전장을 누비다

1212년(강종 1) ~ 1300년(충렬왕 복위2)

김방경 대표 이미지

김방경 신도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가문, 출세

김방경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고려사』 열전에서는 그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먼 후손이라고 밝혀두었다. 1212년(강종 원년)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그의 조부 때까지는 안동의 향리(鄕吏) 등을 지내오다가,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오른 그의 아버지 효인(孝印) 대에 이르러 비로소 대가(大家)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음서(蔭敍)로 처음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후 누차 승진하면서 문관과 무관,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서북면병마판관이 되어, 당시 여러 성의 사람들이 피난해 있던 위도(葦島)에서 해안의 경지를 개간하고 저수지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주도함으로써 주민들이 살아갈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직전인 원종(元宗)대 중반 쯤, 그러니까 그의 나이 50대 중반 쯤에는 문관직으로는 3품의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무관직으로는 역시 3품의 상장군(上將軍)에 올라있었다.

1269년(원종 10),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마무리하고 강화의 조건에 따라 강화(江華)에서 개성(開城)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할 무렵, 당시의 무신집권자였던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원나라에서 귀국하던 세자, 즉 이후의 충렬왕(忠烈王)이 황제에게 요청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김방경 역시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세자 및 원의 군대와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당시는 서경(西京)을 비롯한 고려의 서북면 일대에서는 최탄(崔坦) 등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원에 항복하였을 때였다. 몽골군의 지휘관들도 이들과 연합하여 개경을 함락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김방경은 홀로 몽골군 지휘관을 설득하여 이들이 대동강(大同江)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이로써 고려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김방경의 이름이 조야에 떨쳐지게 되었다.

2 삼별초를 진압하다

김방경이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이 된 것은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하는 작전을 총괄하면서부터였다. 고려의 최고 정예부대였으나 실제로는 무신집권자의 사병처럼 양성되었던 삼별초는 고려 정부가 몽골에 투항하는 데에 반발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조정이 몽골과의 약속에 따라 강화도를 떠나서 개경으로 향하려던 1170년(원종 11)의 일이었다.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를 이탈하여 남쪽으로 향하여 진도(珍島)를 거점으로 삼았다. 김방경은 군사를 이끌고 남진하던 삼별초를 추격하였으며, 그들이 진도에 자리잡은 후 전라도 일대를 공격할 때에도 이를 방어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서 진도를 마주보고 진을 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몽골군 원수 아카이[阿海]가 겁을 먹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바람에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새로운 몽골 원수 힌두[忻都]와 함께 본격적으로 진도 공격이 감행되었다. 김방경은 중군을 이끌고 벽파정(碧波亭)으로 상륙하여 삼별초의 근거지를 함락시켰다. 이 전투의 결과 그는 남녀 1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을 노획하였다.

한편 진도에서 후퇴한 삼별초는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를 새로운 기지로 삼았다. 한 차례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삼별초의 기세는 여전하여,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1273년(원종 14) 김방경은 고려군의 원수가 되어 몽골의 원수 힌두, 홍차구(洪茶丘)와 함께 수군 1만여 명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하였다. 나주에서 출발한 연합군은 풍랑을 헤치고 그해 4월 제주도에 상륙하여 삼별초의 지휘부를 거의 궤멸시켰다. 이로써 삼별초의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삼별초 진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김방경은 고려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개선한 직후 국왕은 그를 신료 가운데 최고위직인 시중(侍中)에 임명하였다. 그해 가을 김방경이 원에 사신으로 가자, 황제는 그를 승상의 바로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신의 상에 놓인 음식을 나누어 주는 등 더없는 후대를 베풀며, 그에게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는 이어진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그가 고려군의 사령관을 맡게 된 배경이 되었다.

3 일본원정에 나서다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되기까지를 계산에 넣으면 무려 40년에 달하는 긴 전쟁 끝에 마침내 고려를 복속시킨 몽골제국의 다음 목표는 바다 건너 일본이었다. 그리고 이 작전에는 몽골군과 함께 항복한 한군(漢軍), 그리고 고려군이 주력으로서 동원되었고, 고려는 일본 원정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제까지 몽골의 적대국이었던 고려는 말하자면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1274년(원종 15), 즉 삼별초가 소탕된 바로 이듬해, 새로운 전쟁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원의 황제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위한 전함(戰艦)을 마련할 것을 고려에 지시하였고, 그 책임자로 김방경을 지목하였다. 김방경은 합포(合浦),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군대를 모으고 전함을 건조하며 군량을 마련하는 등의 전쟁 준비를 총괄하였다.

그해 10월, 몽골-고려 연합군이 드디어 출진하였다. 몽골군과 한군(漢軍)이 합쳐서 2만 5천 명이었으며, 도원수 쿠둔[忽敦]과 부원수 홍차구 등이 이끌었다. 고려군은 8천 명으로 3군으로 나뉘었으며, 김방경은 그 가운데 중군을 맡았다. 여기에 뱃사공과 안내자 등 6천 7백 명이 더해졌으며, 이들을 태운 전함은 총 9백여 척에 달했다. 연합군은 우선 쓰시마섬[對馬島]에 상륙하여 적을 제압하고 곧이어 잇키섬[一岐島]에 이르러 적군 1천여 명을 격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맹활약을 펼치자, 몽골의 도원수 쿠둔은 “몽골 사람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고 하지만, 어찌 이보다 뛰어나겠는가?”라고 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때마침 몰아친 폭풍우로 많은 전함이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바람에 원정군이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전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전투에서 보여준 김방경의 활약은 고려와 원 조정 양쪽에서 모두 인정받았다. 원 조정은 그에게 호두금패(虎頭金牌)를 하사함으로써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정하였다. 이는 단순히 그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이후 작전 수행에서 원 조정이 고려군의 위상을 인정하고 보장해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 원정이 감행되었다. 이때 김방경의 나이는 이미 70세에 달했다. 그는 전부터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충렬왕은 일본 원정을 앞두고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인 그의 퇴진을 용납하지 않았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도 직접 조서를 내려 그를 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로 임명하였다. 그에게 고려군의 최고지휘권을 부여함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었다.

김방경은 힌두, 홍차구 등과 함께 다시 원정길에 올랐다. 이번 원정군의 주력에는 몽골군, 한군, 고려군 외에도 남송(南宋)에서 투항한 군인들로 구성된 강남군(江南軍)이 있었다. 이들은 이들은 잇키섬에서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강남군의 도착이 늦어졌다. 그 사이 몽골군과 고려군으로 구성된 동로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던 데다가 전염병까지 돌아 변변한 전투 한번 치러보지 못하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뒤늦게 도착한 강남군은 태풍을 만나 모조리 익사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제2차 일본원정도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듬해 김방경은 드디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물러날 당시 그는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이라는 긴 공신호를 받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봉해지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4 거듭된 무고의 시련과 불굴의 기개

삼별초 진압과 일본 원정을 거치면서 고려의 군권을 오로지 한 그였지만, 그 이면에는 권세에 따르는 견제에도 크게 시달려야 했다. 그의 행적에는 무수히 많은 무고가 뒤따랐고, 이는 그에게 모진 시련을 겪게 하였다. 그를 모함한 자들 가운데에는 고려인이 대부분이었으나, 그의 실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몽골군의 원수들이 이를 악랄하게 이용할 때가 많았다.

1270년(원종 11년)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할 때, 몽골군을 이끌었던 아카이[阿海]는 김방경이 삼별초와 내통하고 있다는 참소를 믿고 그를 개경에 압송하도록 했다. 곧 무고였음이 밝혀져서 전선으로 복귀했으나,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카이는 연전연패한 끝에 퇴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충렬왕 초년에는 그가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 등과 반역을 모의했다고 무고당하였다가 곧 풀려난 일도 있었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시련으로 닥쳐왔던 것은 제1차 일본원정이 마무리된 이후인 1277년(충렬왕 3)의 일이었다. 고려인 노진의(盧進義)와 위득유(韋得儒) 등은 몇 차례 전투에서 김방경 휘하에 있었으나 모두 부정을 저질러 파직되는 등, 김방경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몽골의 원수 힌두, 홍차구 등에게 김방경이 왕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한 후 강화로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고, 자기 집에 병장기를 감추어두었다고 고발하였다. 물론 사실과 다른 모함이었다. 전부터 원한을 품고 있던 홍차구 등은 형언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을 가하며 김방경을 국문하였으나, 그는 끝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은 병장기를 은닉한 것만 죄로 인정되어 그는 대청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고려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그가 반역을 도모했다는 사실은 원에서도 중대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쿠빌라이는 충렬왕과 함께 김방경 및 그를 고발한 자들을 소환하였다. 결국 노진의, 위득유 등은 기록에 따르면 갑자기 죽어버렸고, 억울함이 풀린 김방경은 사면되어 다시 중용되었다.

5 덕과 나이와 작(爵)을 모두 누리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1282년(충렬왕 8)이었지만 그가 사망한 것은 그로부터도 20년 가까이 흐른 뒤인 1300년(충렬왕 26)이었다. 향년 89세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물게 장수했던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의 아버지인 이진(李瑱)이 지은 김방경의 묘지명에서는 그가 누린 복과 영예를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더하고 덜 것 없이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되어, 이를 인용해본다. “대저 천하를 통틀어 언제나 존중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덕(德)이 하나이고, 나이[齒]가 하나이고, 작(爵)이 하나이다. 군자가 세상을 살면서 그 중 하나나 둘을 얻는 것도 오히려 힘들거니와 하물며 셋을 얻겠는가. (중략)어려움에서 구하고 백성을 건져내어 사직을 다시 안정시켰으니 덕이 하나이고, 89세에 이르렀으니 나이가 하나이며, 상국도원수(上國都元帥)로서 또 공(公)으로 봉해졌으니 작이 하나이다. 이른바 셋을 갖추어 빠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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