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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

고려 최고의 문장가,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다

1075년(문종 29) ~ 1151년(의종 5)

김부식 대표 이미지

김부식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머리말

김부식(1075~1151)은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신이다. 묘청의 난 진압과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일이 대표적인 업적으로 손꼽힌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 가계와 관직 진출

김부식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그의 형 김부일(金富佾)의 열전도 실려있는데, 이곳에 김부식의 선대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처음 경주를 설치했을 때 김부식의 증조부인 김위영(金魏英)을 주장(州長)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조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부친인 김근(金覲)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윤포 묘지명(尹誧墓誌銘) 등에 일부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1080년(문종 34)에 박인량(朴寅亮) 등과 함께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두 사람의 시문(詩文)이 크게 인정받아 『소화집(小華集)』이라는 문집으로 편찬되었다고 한다. 이후 1084년(선종 원년)에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국자감시를 주관했고, 1086년(선종 3)에는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다. 김근의 네 아들 김부필(金富弼), 김부일, 김부식, 김부의(金富儀)은 모두 학문이 뛰어나고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이 높았다. 김부식의 집안은 이렇게 김근 때부터 중앙의 관료로 성공하면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김부식은 1096년(숙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예종[고려](睿宗)대까지 안서대도호부사록참군사(安西大都護府司錄參軍事)와 직한림원(直翰林院), 우사간(右司諫), 예부낭중(禮部郎中), 기거주(起居注), 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주로 문필이나 간쟁과 관련된 주요 관직들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동문선(東文選)』에는 그가 지은 「사위추밀칭예계(謝魏樞密稱譽啓)」가 남아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정계의 요인이었던 위계정(魏繼廷)이 김부식을 높이 평가하여 추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종대의 기록에서 단편적이나마 김부식의 활동상을 찾아볼 수 있다. 1115년(예종 10)에는 여진을 협공하자는 거란의 제안에 대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대개 찬성하였으나, 척준경(拓俊京)과 김부일·김부식 등 몇몇 신하들만이 타국의 전쟁 때문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당시 고문(古文)의 대가였던 김황원(金黃元)이 사망하자 그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고도 한다. 한편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스스로 적은 내용을 통해 1116년(예종 11)에 이자량(李資諒)이 대성악(大晟樂)을 내려준 것에 감사하기 위해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김부식이 문한관으로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고려의 사신단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한 질 입수하여 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121년(예종 16)과 1122년(예종 17)에는 각각 국왕이 청연각(淸讌閣)에 임어하여 김부식에게 『서경(書經)』과 『주역(周易)』을 강론하게 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3 인종대 초반의 정치 활동

앞에서 살펴본 예종대의 기록에서도 김부식이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펼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종 사후 그는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역시 김부식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활동상이 드러나는 것은 인종[고려](仁宗)대(仁宗代)였다. 예종이 세상을 떠날 때 태자는 아직 어렸다. 기록에 따르면 태자가 옥새를 물려받았음에도 삼촌들이 왕위를 엿보니, 이에 그 외할아버지인 이자겸(李資謙)이 태자, 즉 인종을 받들어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자겸은 국왕의 후견인으로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당시 이자겸의 권세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지는데, 바로 이 장면에서 김부식의 모습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먼저 인종이 즉위한 지 두 달 뒤의 사건이다. 당시 인종은 조서를 내려 이자겸에 대한 특별 예우를 논의하게 하였다. 자신의 외조부를 다른 관료들과 동일하게 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극영(鄭克永) 등은 표문을 올릴 때 ‘신(臣)’이라 칭하지 않을 것, 연회에서 다른 관리들과 달리 국왕의 장막으로 바로 가서 절할 것, 그리고 국왕의 답배를 받은 뒤에 전각 위에 앉게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각종 고사(故事)와 의례를 근거로 들며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궁궐 안에서는 가족끼리의 예로 대하더라도, 조정에서는 군신의 예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인종이 두 의견을 모두 이자겸에게 보내 묻자, 이자겸은 김부식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답하였다.

이자겸에 대한 예우를 둘러싸고 김부식이 목소리를 높인 일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1124년(인종 2)에 이자겸의 조부를 추봉하는 조치가 내려지자, 박승중(朴昇中)이 교방(敎坊)의 인력을 파견하여 음악을 연주하게 하자고 하였다. 또한 박승중은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로 지정하자는 건의도 내놓았다. 그러나 김부식은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종묘 제례가 아닌 개인의 분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군주가 아니라 신하의 생일을 절일로 지정하는 것은 전례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김부식은 당대의 실권자였던 이자겸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일에 대하여 거듭 반대하였다.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정치적인 현안에서 두 사람이 어떤 입장을 밝혔는지, 개인적인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깊이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당시 이자겸이 한안인(韓安仁) 등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해를 입지 않았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이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전개되는 ‘이자겸의 난(李資謙-亂)’을 전후한 시점에 이와 관련된 김부식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자겸이 인종과 척준경에 의해 제거된 직후인 1126년(인종 4) 9월에 김부식은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송에서 이 해 7월에 새 황제 흠종(欽宗)의 즉위를 알려왔기에, 이에 답하여 축하를 전하기 위한 사신단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사신 교환은 여느 때와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당시 송나라는 금나라의 공격으로 인하여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에 송은 사신을 통해 고려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돌아가는 송 사신단에게 원조는 현실적으로 곤란하다는 답신을 들려 보냈고, 이어 다시 김부식 등을 파견하였다. 매우 민감한 시기에 중요한 외교 사절로 임명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부식은 송의 항구인 명주(明州)까지만 도착했을 뿐, 송의 조정에 갈 수 없었다. 당시 송은 금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해 11월에 수도인 개봉이 함락되고, 이듬해 4월에는 송의 황제와 황족 등 수천 명이 금에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강(靖康)의 변(變)’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명주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부식은 결국 정강의 변이 벌어진 다음 달인 5월에 고려로 귀환을 해야 했다. 비록 개봉에서 멀리 떨어진 명주에 있었지만, 북송이 멸망당하는 파란의 시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겪은 고려인이 된 것이다.

4 묘청과 김부식

고려로 돌아온 김부식은 아마도 당시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던 논의를 듣고 경악했을 것이다. 김부식 일행이 명주에 머물고 있을 무렵, 고려 조정에는 현실과 정 반대의 정보가 입수되어 있었다. 즉 금나라 군대가 송을 침범하다가 크게 졌고, 송나라 군이 그 기세를 타고 금의 영역에 깊숙이 쳐들어갔다는 정보였다. 이에 정지상(鄭知常) 등은 즉시 고려도 출병하여 송나라 군대와 협공을 하자는 논의를 펼쳤다. 다행히 인종은 소문을 다 믿을 수 없으니 김부식의 귀환을 기다려 정보를 확인하자는 김인존(金仁存)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고 한다. 북송의 멸망을 겪고 돌아온 김부식에게, 고려 조정에서 이런 논의가 있었고 자칫 출병이 이루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 오로지 잘못된 하나의 정보 때문이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고려의 오랜 관계를 이해해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비롯한 넓은 지역에 부족별로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고려와 초기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다. 고려는 태조대부터 이들을 회유·제어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고려 태조는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쟁에 여진족 기병 9,500 기를 참여시킬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고려가 북방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여진족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부족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여진족의 향배는 달라졌지만, 11세기 이후 많은 여진 부족들이 고려에 귀부하고 조공을 바치는 등 고려의 ‘번(藩)’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11세기 말 이후 지금의 하얼빈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완안부(完顔部)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세력을 키우면서 정세가 급변하였다. 고려가 숙종[고려](肅宗)과 예종대에 고려와 완안부 사이에 있는 부족들에 대하여 여진 정벌을 시도하였던 것도 이러한 정세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완안부의 세력은 점점 더 확장되었다. 이후 완안부는 금나라를 세워 거란을 멸망시켰고, 이 시점에는 송나라마저 무너뜨린 것이었다. 물론 일부 송나라의 황족들이 남쪽으로 도망쳐 남송을 세우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 보면 금나라가 천하를 제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려는 1126년(인종 4)에 금으로부터 사대 관계를 강요받아 이를 수용한 상태였다. 조공을 받는 대상으로 여겼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사대를 해야 하는 현실은 당시의 고려인들에게 큰 불안과 불만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려 조정에서도 금에 대한 강경론이 불거지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한가운데에 묘청(妙淸)이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서경(西京) 출신의 묘청은 승려라고 하였으나, 이후의 활동은 오히려 술사 혹은 도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기록상 묘청이 처음 인종에게 소개된 때는 김부식이 송에 있었던 1127년(인종 5) 3월이었다.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 즉 천도만 하면 금나라를 비롯해 온 천하가 고려에게 굴목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지리도참설에 기반한 이러한 주장은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문종[고려](文宗)대 이래로 남경(南京)을 세우는 등의 방식으로 국가의 기운을 북돋아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이 시점에는 금의 대두가 완연한 현실이 되면서 고려인들도 큰 위기의식을 느꼈고, 묘청의 주장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앞서 출병을 주장했던 정지상도 묘청에게 호응한 관료들 중 하나였다. 정지상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하들이 묘청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이때부터 1134년(인종 12)까지 서경 천도는 고려 조정의 큰 논란거리였다. 묘청과 그의 지지자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천도를 성사시키려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리고 김부식이 그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부식은 1128년(인종 6)에는 묘청의 말을 무조건 따르자는 묘청파의 연명 상소에도 서명하기를 거부하였고, 1134년(인종 12)에는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만류하여 중단시켰다. 여러 해 동안 묘청의 주장대로 서경에 궁궐을 짓고 각종 행사를 열었으나 별다른 효험이 나타나지 않자, 조정에서는 묘청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점차 힘을 얻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묘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일부 지지 세력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1135년(인종 13) 1월에 벌어진, 이른바 ‘묘청의 난’이다. 인종은 이 소식을 듣고 곧 진압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김부식을 원수로 임명하여 총지휘를 맡겼다.

김부식은 출병에 앞서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백수한(白壽翰) 등 묘청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대군을 이끌고 서경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은 무력으로 반란군을 진압하는 길을 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반란군이 묘청의 목을 베어 보내는 등 선처를 호소하자 이를 수용하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고, 강력하게 서경을 공격하는 대신 포위를 하고 지구전을 펼쳤다. 그러나 시일이 너무 길어지고 강경 진압론이 계속 대두되자, 마침내 1136년(인종 14) 2월에 총공격을 펼쳐 서경성을 함락시켰다. 김부식은 인종으로부터 큰 포상을 받았고, 승진과 함께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봉해졌다.

5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과 문인(文人)으로서의 성취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이후 김부식은 조정의 정점에 올랐다. 그리고 1142년(인종 20)에 그는 세 번이나 표문을 올려 은퇴를 청하였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으므로 이 일이 크게 부자연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그가 좌천시켰던 윤언이(尹彦頤)와 한유충(韓惟忠)이 정계에 복귀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졌던 것에 주목하여,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지면서 은퇴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일로는 역시 『삼국사기』의 편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은퇴한 김부식은 인종의 명을 받아 여러 편사관을 거느리고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145년(인종 23) 12월에 편찬을 마치고 인종에게 책을 올렸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자료이다. 김부식이 후대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인종이 사망하자 그는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김부식은 정치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뛰어난 문장으로도 일세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김황원(金黃元) 등과 함께 고문체(古文體)의 문장을 연마하는 데에도 힘썼고, 송의 사신 서긍이 편찬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고려에서 가장 박학다식하고 글을 잘 짓는 인물로 소개되어 유명세를 탔다. 김부식은 20여 권 분량의 문집을 남겼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동문선(東文選)』 등에 그가 지은 글이 전해지고 있어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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