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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明宗]

무신(武臣)들에 의해 옹립된 왕

1131년(인종 9) ~ 1202년(신종 5)

명종 대표 이미지

지릉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머리말

명종은 고려 제19대 국왕이다. 1131년(인종 9)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흔(昕)이었으나 호(晧)로 바꾸었다. 자는 지단(之旦)이다. 1170년(명종 즉위년)부터 1197년(명종 27)까지 재위하였고, 1202년(신종 5)에 사망하였다. 비는 강릉공(江陵公) 왕온(王溫)의 딸인 의정왕후(義靜王后)이다.

2 형을 대신해 왕위에 오르다

명종은 의종(毅宗)의 친동생으로, 1148년(의종 2)에 익양후(翼陽侯)로 봉해졌다. 그런데 1170년(의종 24)에 정중부(鄭仲夫) 등이 주동한 무신정변이 터지면서 그의 인생도 크게 변하였다. 이들이 현 국왕 의종을 폐위시키고 익양후를 새 왕으로 즉위시킨 것이다.

명종은 즉위 후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고(李高)를 대장군(大將軍)·위위경(衛尉卿)으로, 이의방을 대장군·전중감(殿中監)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명종은 이들의 허수아비였을 뿐, 실권은 정변을 일으킨 이들 무신들이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명종은 자기 뜻과 관계없이 왕위에 올랐듯이, 정치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는 없었다. 상과 벌을 주는 일반적인 통치를 행한 때도 항상 집권 무신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명종 스스로도 “상벌은 본래 임금의 권한인데, 근래 조정의 힘 있는 신하가 권위나 위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을 사사롭게 하여 항상 지켜야 할 도리와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는 탄식을 자아낼 정도였다. 실제로 정중부의 가노(家奴)가 법을 어겼지만, 가노 대신에 관리에게 파면과 좌천의 벌을 내린 적도 있었다. 그만큼 왕의 권한이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시기의 왕이었던 것이다.

3 살육의 시대를 살다

명종이 즉위할 당시는 무신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이고와 이의방 사이에는 주도권을 쥐기 위한 물밑싸움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반목은 1171년(명종 1) 정월에 이고의 반역 음모가 드러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고는 무뢰배들과 법운사(法雲寺) 승려 수혜(修惠) 그리고 개국사(開國寺)의 승려 현소(玄素) 등과 결탁하여 태자의 관례식 날에 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이 이의방에게 들어갔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권력 다툼에서 명종은 방관자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당시 왕의 위상은 궁궐에 불이 난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승려들과 병사들이 불을 끄려고 했는데, 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변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궁궐 문을 닫고 들어오게 하지 않아 궁궐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이다. 이 모습을 본 명종은 산호정(山呼亭)에 나와서 통곡을 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이러한 처지는 1173년(명종 3)에 공주를 궁주(宮主)로 봉하는 날에 취한 이의방의 태도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이의방 등이 기녀를 데리고 여러 장수들과 마음껏 술을 마시고 북치고 노래하는 소리가 임금의 내전까지 들렸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임금인 명종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의방의 권세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의방이 그의 딸을 태자비로 들인 뒤 얼마 되지 않아,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권력을 독점한 정중부 역시 무신정변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복고(復古)’의 뜻을 품은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경대승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후에는 이의민(李義旼)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의민은 최충헌(崔忠獻)과 그의 동생 최충수(崔忠粹)에게 제거되었는데, 명종은 28년에 걸치는 재위기간 동안 여러 차례 무신집정이 바뀌는 것을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4 믿을 건 가까운 사람들뿐이었을까

명종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과 관련된 일에는 더욱 극진했다. 1183년(명종 13)에 어머니 공예태후 임씨(恭睿王太后 任氏)가 병석에 눕자, 명종은 손수 약을 달이고 간호하느라 여러 날 동안 옷을 벗지 않았으며, 태후의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너무 울어서 눈이 물어터질 정도였다. 태후가 죽은 다음에는 아침, 저녁으로 빈소에 가서 슬퍼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재상들이 애통한 마음을 억제해 줄 것을 요청을 했으나, 명종은 듣지 않았다. 1184년(명종 14)에는 명종이 총애하는 궁녀가 사망하자, 섧게 울면서 내전에 나와 정무를 보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비인 광정태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일찍 사망하였으나, 다시 왕후를 세우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부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 폐희(嬖姬)에게서 난 서자들이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들여 왕의 권위를 참람히 희롱하니 조야가 실망했다고도 한다. 아마도 명종은 국왕으로서 너무 무르고 원칙이 없는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신들에 둘러싸여 있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그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라는 추론도 할 수 있다.

5 원칙이 없는 국정 운영

명종은 무신들 사이에 살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할 수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의 원래 성격이 그러한지 고집을 피우거나 남에게 똑 부러지게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의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183년(명종 13) 명종은 금나라에 사행을 가는 사람들이 무역에서 사사로운 이득을 얻기 위해 많은 물건을 가지고 가 폐단이 크니, 물품은 한도를 정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관직을 삭탈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장군 이문중(李文中)과 한정수(韓正修)가 금나라로 사행가면서 이익을 내지 못할까 두려워해서 원래대로 돌리자고 하니, 또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편 명종에 대해서도 성격이 유순하고 용단성이 적으며, 아침에 명령을 내렸다가 저녁에 고치는 경우가 많았다 는 옛 역사가의 평가도 있었다.

의도치 않은 즉위로 인해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던 명종의 입장도 무신집정자들의 변동에 따라 변화가 발생했다. 경대승이 죽고 경주에 피해 있던 이의민을 궁으로 불러들이면서, 명종은 인사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1184년(명종 14) 12월의 기록을 보면, 명종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총애하는 가까운 환관들과 의논하여 참관(參官) 이상의 임명서에 왕이 직접 서명한 다음 그것을 밀봉하여 인사권을 담당하는 정조(政曹)에 보냈다고 한다. 이에 정조에서는 원안대로 발표할 뿐, 이에 대해 말이나 글로 이상 여부를 여쭤보는 품의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금 측근의 환관들에 의해 부정이 많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거꾸로 생각하면, 그만큼 임금의 권위가 그만큼 상승했기에 가능한 내용이었다. 물론 이는 즉위 초반에 비해서 일뿐, 무신집권자를 능가한 것은 아니었다. 이즈음 임금의 권위가 즉위초보다 올라갔음은 1184년(명종 14)의 연말 인사와 관련된 일화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이 인사에서 명종은 정윤당(鄭允當)을 이부원외랑으로 삼았는데, 실제 그는 나이가 젊고 아는 것이 없었으나 그의 아버지 정세유(鄭世裕)가 병마사로 나가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바치며 전조(銓曹)에 임명해달라고 해서 명종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거정(李居正)도 별다른 재능이 없었으나 그가 꼿꼿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청렴한 인물이 임명되어야 하는 간관의 자리인 정언(正言)에 임명했다. 이로 인해, 서로 다투어 뇌물을 주는 것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국왕 측근들의 권력 남용이 의종 때보다도 심하다는 불평이 터져 나올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명종의 입장에서는 그리 올바른 방법이 아니더라도 이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6 왕위를 잃고 쓸쓸히 죽다

원칙이 없는 명종의 국정운영은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집정에 오른 이후 폐위의 명분이 되었다. 1197년(명종 27) 9월에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는 ‘명종이 28년이나 왕위에 있었는데, 늙고 정사를 게을리 하여 여러 소군(小君)이 은혜와 위력을 마음대로 부려 국정을 문란하게 하였으며, 왕이 또 많은 소인들을 유달리 귀엽게 여기고 사랑해 황금과 비단을 많이 내려주어 부고가 텅 비었으니 왕을 어찌 폐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며 폐위를 결정했던 것이다.

최충헌 형제는 왕을 협박하여 홀로 향성문을 나서게 한 다음 창락궁(昌樂宮)에 연금하고 태자 도는 강화도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명종의 동생 평량공(平凉公) 민(旼), 후에 신종(神宗)을 대신 왕위에 올렸다.

1202년(신종 5) 9월에 명종은 이질에 걸렸는데, 이에 신종이 사람을 통해 의원을 보내 약을 올리려고 하자, 명종은 자신이 28년간이나 왕위에 있었고 나이가 72세인데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치료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달 뒤인 같은 해 11월에 창락궁에서 사망했다. 신종은 왕의 예우로써 장례를 치르고자 했으나, 최충헌이 불가하다고 하여 예를 낮추어서 경순왕후(景順王后)의 의식에 준해 장사를 지냈다. 죽어서도 왕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태자는 강화도에 있어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나라 백성들이 이를 슬퍼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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