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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妙淸]

서경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자

미상 ~ 1135년(인종 13)

묘청 대표 이미지

평남 대동 대화궁지 토성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1 묘청과 인종의 만남

묘청(妙淸, ?∼1135)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풍수지리[풍수](風水地理)와 도참사상(圖讖思想)을 익히고, 도선(道詵)의 술법을 전수받은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는 안팎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북방에서 여진(女眞)이 성장하자, 고려는 여진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여진은 금(金)을 세워 승승장구하였다. 1125년(인종 3) 거란의 요(遼)나라를 멸망시킨데 이어, 송나라를 침공하여 남쪽으로 밀어낸 뒤,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 금나라가 고려에 사대(事大)를 요구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금이 강대국으로 떠오른 현실을 받아들여 고려는 금에 사대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예전에는 고려가 조공을 받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사대하게 된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은 고려인들에게 퍼져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1126년(인종 4), 인종은 그동안 어린 자신을 대리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전횡하던 외조부 이자겸의 세력을 제거한 다음, 새로운 정치를 펼칠 뜻을 품었다. 인종은 남경(南京)에 행차하고, 1127년(인종 5)에는 다시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이때 묘청과 백수한(白壽翰) 을 만났다. 서경에서 풍수 도참의 대가로 알려진 승려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한 사람은 정지상(鄭知常)이었다. 정지상은 서경 출신의 문신으로, 학문과 시문에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에도 식견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들을 만난 다음, 인종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개혁안을 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이자겸의 난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하며, 산천 신에게 제사하고, 검약을 실천하며 제위보(濟危寶)나 대비원(大悲院)으로 하여금 백성을 구제하고, 과거제를 개혁하고 학교를 확충하는 등 나라의 안녕과 태평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2 묘청의 서경천도론

인종의 신임을 얻으며 등장한 묘청과 정지상, 백수한 등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려의 위상을 황제국으로 높이고자 하였다. 묘청이 제기한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은, 개경은 이미 지기(地氣)가 쇠하였고 이자겸의 난 때에 궁궐이 불에 타버렸으나, 서경에는 왕의 기운이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경에 대해서는 일찍이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1년에 100일은 머물라’고 한 바 있었다.

또 고려 초부터 개경, 남경과 함께 3경의 하나로 중시되었다. 숙종대 김위제(金謂磾)는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면서, 도선기를 인용하여, ‘송경(松京)은 중경, 목멱양(木覓壤)은 남경, 평양(平壤)은 서경이라고 하면서, 삼경에 4개월씩 돌아가며 머물러야 왕업이 오래가고 국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한 바 있었다.

예종[고려](睿宗)대에는 ‘개경에 도읍한 지 2백년이 되어 지덕(地德)이 쇠약해졌다’는 풍수도참가들의 진언에 따라, 서경에 새로 궁궐을 짓고 행정기관인 분사(分司)와 교육기관 등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 이처럼 서경을 중시한 도참설을 바탕으로 천도론이 나온 것이다.

당대에 명성이 높은 정지상과 왕의 근신 김안(金安) 등이 서경 천도를 적극 주장하자, 조정에서도 묘청을 성인이라 하며 서경 천도에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묘청은 정식으로 인종에게 서경천도론을 펼쳤다. 서경 임원역(林原驛)의 지세는 지리도참에서 큰 길지로 보는 대화세(大華勢)이므로, 그곳에 궁궐을 짓고 왕이 거처하면 천하를 아우르고 금나라가 조공을 바칠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소에 묘청 등은 천도하면 공이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되리라고 하여, 당시 많은 관원들이 서명하였다. 이자겸의 난(李資謙-亂)으로 개경은 궁궐까지 불타버렸고, 강대국으로 등장한 금의 강요에 따라 군신관계를 맺은 데 대한 위기의식이 높았던 상황에서, 서경으로 천도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금나라에 맞서 고려의 위상을 높이자는 뜻에 공감하는 관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본 김부식(金富軾)과 임원애(任元敱), 이지저(李之氐)는 서명하지 않았다.

1128년(인종 6)에 인종은 다시 서경에 행차하여, 새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묘청과 백수한이 임원역에 가서 궁궐터를 살펴 확정한 다음, 곧 공사에 착수하였다. 겨울에 공사를 강행하여 3개월 뒤에 완공되었다. 새 궁궐인 대화궁(大花宮)의 준공에 맞추어, 인종은 서경에 행차하여 대화궁에 나아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이를 기회로 묘청 일파는 황제를 칭하고 독자 연호를 제정할 것을 강력하게 주청하였다.

그러나 묘청 세력에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지저이다. 그는 묘청과 백수한 등에 대해 술법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켜 나라를 그르칠 무리라고 배척하였다. 가령 인종이 서경에 행차했을 때, 묘청 일파가 “대동강에 용이 내려와 침을 뱉어 상서로운 기운이 돌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여 금나라를 제압하자는 청을 올린 일이 있었다. 왕이 이에 대해 의견을 묻자, 이지저는 금나라는 강적이라 경시할 수 없으니, 조정의 중신들도 곁에 없는 상황에서 한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인종을 만류하기도 하였다.

3 묘청의 팔성 숭배와 술법

조정에서는 다시 묘청의 건의에 따라 서경의 대화궁에 성(城)을 쌓고 팔성당(八聖堂)을 건립하였다. 팔성당에는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 白頭嶽 太白仙人 實德 文殊師利菩薩)’을 비롯한 8성의 상을 그려 봉안하였다. 팔성은 동명성왕(東明聖王), 단군(檀君)왕검, 태조 왕건 등을 명산에 대한 숭배와 연결하여 신선(神仙)으로 신격화하고 이것을 또 부처나 보살에 대한 신앙과 결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팔성에게 제사하는 것은 ‘나라를 이롭게 하고 왕기(王基)를 연장시키는 비술’이라고 하였다.

1132년(인종 10) 1월, 궁궐을 재건하는 공사를 벌여 터를 닦을 때, 묘청은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라는 술법을 행하면서, 도선이 강정화(康靖和)에게 전수하고 정화가 자신에게 전한 것으로, 묘청 자신은 백수한에게 전수하였다고 하였다.

묘청은 또 인종에게 자주 서경으로 행차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모아 무궁한 왕업을 누리라고 청하였다. 묘청의 말은 성인의 가르침이라는 말에 따라, 인종은 묘청을 어가를 수행하는 복전(福田)으로 삼고 백수한을 내시(內侍)로 들여 서경으로 행차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날이 어두워지는 변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하였다. 서경에 도착하자 부로(父老)들과 정지상 등이 칭제건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4 서경 천도 운동의 좌절

인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뒤에, 대화궁에 옥좌를 설치하고 어의(御衣)를 안치해두면 복과 경사가 몸소 행차하는 것과 같다는 묘청의 말에 따라 그대로 실행하게 하고, 그에게 삼중대통지루각원사(三重大通知漏刻院事)의 직위를 내렸다. 그러나 서경에 때 아닌 눈과 서리가 내리고, 대화궁에 벼락이 치는 등 기상이변이 잇달았다. 묘청의 음양 비술이 이러한 재앙을 막지 못하고 황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부식(金富軾) 등 묘청에 반대하던 관료들은 묘청 세력이 허황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이들을 처형하고 재앙을 끊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인종도 서경 행차를 그만두고, 묘청과 정지상 등의 말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1135년(인종 13) 1월, 위기를 느낀 묘청은 조광(趙匡), 유참(柳旵) 등과 함께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임금의 명령을 위조하여 관리들과 서북 지역 여러 성의 장군과 군사들을 모두 구류한 뒤, 군병들을 징발하여,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그 군사를 ‘하늘이 보낸 충의군’이라고 부르며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지역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경과 서북 지역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자비령(慈悲嶺)을 포함한 서북 지역 일대를 장악하였다.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서경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토벌군 원수가 된 김부식은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과 김안, 백수한 등을 붙잡아 죽이고, 서경으로 향했다. 대규모 토벌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에, 서경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고 조광은 묘청과 유참의 머리를 베어 바치고 항복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조광은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김부식의 정부군은 서경 주위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회유한 뒤 서경을 포위하였다. 1년여에 걸친 포위 끝에 결국 총공격이 벌어졌고, 서경성이 함락되며 반란이 진압되었다. 이로써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은 막을 내렸다.

묘청의 전기는 『고려사(高麗史)』 반역 열전에 수록되어 있고, 요승으로 칭해졌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신채호 역시 서경천도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며 그 실패를 안타까워하면서, 묘청이 망령되게 굴어 오히려 자주적인 세력에 타격을 주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묘청의 사상을 지리도참설에 고려 고유의 산신 숭배와 도교, 불교 신앙이 복합된 것이라고 보고, 서경천도론에 보이는 개혁성과 자주성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격동기에 살았던 인물이면서 너무나 오래되어 자료가 북족한 상황이라, 묘청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많은 궁금증과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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