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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普愚]

한국 선종의 큰 스님

1301년(충렬왕 복위 3) ~ 1382년(우왕 8)

보우 대표 이미지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관

태고 보우(太古普愚)는 고려말에 활동한 선종 승려이다. 공민왕(恭愍王)대에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봉해졌으며 보우를 필두로 하는 임제태고법통설(臨濟太古法統說)은 조선후기 주된 법맥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법통설도 이를 계승하고 있다.

2 출생과 가계

대사의 법명은 보우(普愚), 법호는 태고(太古), 시호는 원증(圓證), 탑호는 보월승공탑(寶月昇空塔)이다. 보우와 생애와 관련된 기록은 이색(李穡)이 지은 「북한산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문과 양평 사나사 비문, 문도 유창(維昌)이 쓴 「태고행장(太古行狀)」 등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보우는 1301년(충렬왕 27) 9월 양근(楊根) 대원리에서 아버지 홍연과 어머니 정씨(鄭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보우의 어머니가 어느날 밤 태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1301년(충렬왕 27)에 대사를 낳았다.

원래 보우의 부계는 홍주(洪州) 홍씨(洪氏)로 그 시조인 홍규(洪規)가 고려 태조 때 벼슬이 삼중대광에 이르러 해풍부원군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이 홍주에 세거하여 홍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보우의 홍씨 가문은 그가 태어난 고려말기에 이르러서도 지방 토호로서 세력을 유지하여 왔으나 뚜렷한 활약을 보인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1356년(공민왕 5) 보우가 왕사로 책봉되면서 그의 아버지인 홍연(洪延)이 개부의동삼사·상주국·문하시중·판이병부사(開府儀同三司·上柱國·門下侍中·判吏兵部事)로 추증되고 본관인 홍주는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보우의 가계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어머니 정씨의 고향인 양근(楊根)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정씨 집안도 양근의 토호였다. 보우로 인하여 어머니 역시 삼한국대부인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의 고향인 익화현(益和縣)도 양근군으로 승격되었다.

3 출가와 참선수행, 그리고 깨달음

보우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고 하는데 13세가 되던 해에 회암사(檜巖寺) 광지선사(廣智禪師)에게 출가하였다. 19살부터 조주(趙州)의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들어 참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보우는 1333년(충숙왕 2년)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 승당에서 지낼 때 아직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면서 만법귀일의 화두를 들고 7일간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용맹정진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날 밤 푸른 옷을 입은 두 동자가 나타났는데 동자 하나는 백비탕(白沸湯)이 담긴 병을 들고 다른 한 동자는 잔을 들어 백비탕을 받아 권하니, 보우가 이를 받아 마시고 홀연히 그 첫 번째 깨달음을 얻어 여덟 구의 게송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26세 때에는 승과(僧科)인 화엄선(華嚴選)에도 합격하였음을 볼 때 교학(敎學)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30세에는 열 두 가지 큰 서원을 가지고 용문산(龍門山) 상원사(上院寺)에서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였다. 그 열 두 가지 원이 무엇이었는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 뒤로는 칼같이 날카로운 지혜를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어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보고 모든 알음알이가 사라지는 두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37세가 되던 1337년(충숙왕 복위 6)부터는 알음알이[知解]를 떠난 화두수행에 들어가서 조주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는데, 동안거에 들어가 그 이듬해 1월에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를 얻었으나 마지막까지 무자화두에 대한 의심은 깨뜨릴 수가 없었다.

38세가 되던 3월에는 자신의 속가가 있는 양근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며 지내면서 공안(公案) 일천 칠백 칙(則)으로 일컬어지는 온갖 화두를 점검하였다. 이 때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 화두에 막혀 있다가 결국 이를 타파하고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는데, 행장에서는 이때의 깨달음을 20년 동안 고심했던 것이 끝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41세인 1341년(충혜왕 복위 2) 봄에는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 동쪽 봉우리에 암자를 지어 태고암(太古庵)이라 편액하고 5년 동안 머물면서 영가현각(永嘉玄覺)의 증도가(證道歌)와 같은 7언 및 6언 체제로 「태고암가(太古庵歌)」 한 편을 지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보우가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을 수용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에 정진하고 깨달음을 얻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4 입원구법 : 본분종사의 인가, 그리고 공민왕과의 만남

이 시기 고려의 승려들은 원나라에 유학하여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을 찾아가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받고 돌아오는 풍조가 있었다. 승려들에게 있어 원의 본분종사로부터의 인가는 고려 내에서 대단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보우 역시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고도 다시 임제선의 정맥을 찾아 자신의 깨달은 내용을 인가받아 돌아온다.

46세가 되던 1346년(충목왕 2) 보우는 원나라에 들어가 약 2년간 유학하게 된다. 처음 원나라 연경(燕京)에 들어갔을 때 그 소문을 들은 원 황제의 명으로 당시 원나라 태자의 생일 법회에서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였다. 고려에서 온 승려 보우가 원 태자의 생일 축하 법회에서 강설한 것은 당시 원나라 태자가 고려 출신 기황후의 소생인 아이유시리다라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보우는 원나라 각지를 유력하다 축원(竺源) 영성선사(永盛禪師)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으나 영성선사가 이미 입적한 뒤여서 다시 절강성(浙江省) 하무산(霞霧山)으로 가 석옥(石屋) 청공선사(淸珙禪師) 를 친견한다. 이 때 보우가 청공선사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하고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바쳤더니 청공선사가 크게 감탄하였다. 이에 보우는 임제의 18대 법손인 청공에게 그 깨달음을 인정받고 청공의 가사를 전수받았다. 보우가 청공에게 인가를 받고 연경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 그의 명성은 이미 자자하여 원의 황제로부터 또다시 설법을 요청받아 영녕사에서 법회를 주관하였다. 이 때 원 황제는 보우에게 금란가사와 침향목으로 만든 불자(拂子)를 하사하였고 태자 등 왕족들도 향과 폐백을 보내는 등 보우는 원 황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 때 맺은 원 황실과의 관계는 귀국한 뒤에도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356년(공민왕 5)에 봉은사(奉恩寺)에서 보우를 초청하여 법회를 개최했을 때 원 황실에서 오색비단과 가사 3백 벌을 보내왔다.

보우의 원나라 구법기의 행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영녕사 법회 때 왕기(王祺)와의 만남이다. 왕기는 당시 고려에서 질자(質子)로 연경에 머무르던 훗날의 공민왕(공민왕)이다. 왕기는 보우에 대한 원 황실의 극진한 환대와 성대한 법회를 보고 감탄하여 보우에게, 자신이 훗날 고려로 돌아가 새로운 정치를 하게 된다면 스승으로 모시겠노라고 하였다 한다.

5 왕사, 국사로의 책봉과 활동

보우는 48세가 되던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용문산(龍門山)에 소설암(小雪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머물게 된다. 이 때 보우는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 1편을 짓게 되는데, 여기서 원 천자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과 석옥 청공으로부터 법은 인가받고 온 것에 대하여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52세인 1352년(공민왕 원년)에 이제 왕으로 즉위한 공민왕이 보우를 찾아 개경으로 오게 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56세인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에 의해 왕사로 책봉되었다. 이 때 보우는 불교계의 제도를 정비하고자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선문구산을 한 종으로 통합하려 하였다.

62세가 되는 1362년(공민왕 11) 가을에 양산사(陽山寺) 주지로 부임하고 63세에는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의 주지를 맡았다. 한편 이 때는 신돈(辛旽)의 정계에서 활동하던 시기라 보우는 공민왕에게 상소하여 신돈을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뜻이 관철되지 못하자 신돈의 일로 왕사를 사임하였다. 68세가 되던 때 신돈에 의해 속리산에 금고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한 뒤에 보우를 다시 국사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보우는 이를 사양하였다.

이후 우왕(禑王)이 왕위에 오르고 1378년(우왕 4) 보우를 불렀을 때 비로소 국사로 취임하였다. 1381년(우왕 7)에 보우는 우왕에 의해 거듭 국사로 책봉되고 그 이듬해인 1382년(우왕 8)에 소설암에서 세수 82세, 법랍 69세로 입적하였다.

이에 왕이 향목을 하사하여 화장하였는데 100과의 사리가 나왔다. 이를 나누어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보월승공탑을 세웠으며 이 외에 석종을 만들어 양주 태고사(太古寺), 가은 양산사(加恩 陽山寺), 양근 사나사(舍那寺)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였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2권과 『태고유음(太古遺音)』 6책 등이 있다.

6 태고보우 법통설의 전개

여말선초 불교계를 주도했던 계파는 사실 나옹혜근(懶翁惠勤)과 그 문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혜근의 제자였던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는 지공화상(指空和尙)에서 나옹혜근을 이어 자신에 이르는 조파도(祖派圖)를 확정하고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로 간행하여, 이른바 고려말 삼화상의 계보를 완성하기도 하였다.

보우가 법통상의 조사(祖師)로 처음 부상한 때는 17세기 전반이다. 임진왜란 이후 계파의식이 강조도고 문파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사명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의 입적이 계기가 되어 이전 법맥의 계승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법통설이 제기되었다. 임제태고법통설은 석옥청공 – 태고보우 – 혼수(混修) – 각운(覺雲) – 정심(正心) – 지엄(智嚴) – 영관(靈觀) – 휴정[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가지며 조선초 교단을 주도했던 무학자초 등 나옹계 주류들이 배제되었다. 임제태고법통설은 태고보우를 통해 전해진 중국 임제종 정통법맥이 휴정에게 이어졌고 조선불교는 그 임제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정체성을 표방하고 있으며, 나옹법맥에서 태고법통으로 전법 인식이 뒤바뀌게 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1764년에 나온 『불조원류(佛祖源流)』에서 잘 표방되고 있다.

보우가 석옥 청공에게 의발을 전수받고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는 임제태고법통설은 조선후기 양대 계파인 청허계와 부휴계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주된 법통으로 확립되어 오늘날 조계종의 정체성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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