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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宣宗]

안정된 징검다리, 고려의 전성기를 잇다

1049년(문종 3) ~ 1094년(선종 11)

선종 대표 이미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고려의 전성기를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왕은 문종(文宗)이다. 안정된 국제 정세 속에서 40년 가까이 왕위에 있으면서, 나라 안팎으로 평온한 시대를 이어갔다. 문종의 후대 국왕으로 주로 이야기되는 왕은 숙종(肅宗)과 예종(睿宗)이다. 대내적으로는 화폐 사용 장려 등의 주목되는 조치가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별무반(別武班) 설치와 여진(女眞) 정벌이라는 굵직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있었던 선종(宣宗)은 이들의 광채에 가려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러나 셀로판지로 눈부심을 줄이고 해를 보듯 문종대부터 예종대를 본다면, 그 사이에 선종이라는 또 하나의 밝은 광원(光源)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2 가계

선종은 문종의 둘째 아들로, 인예태후(仁睿太后)에게서 태어났다. 형인 순종(順宗)이 즉위 직후 건강 악화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고려의 제1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부인으로는 정신현비(貞信賢妃) 이씨(李氏),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李氏), 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李氏)를 맞이하였다. 이들과의 사이에서 훗날 제14대 국왕이 되는 헌종(獻宗)을 비롯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그러나 자녀들의 운명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들 둘과 딸 하나는 어려서 죽어 그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고, 한산후(漢山侯) 왕윤(王昀)은 정치적 암투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헌종은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겪고 왕위를 삼촌에게 넘기고 말았다. 한편 딸인 수안택주(遂安宅主)는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일하게 경화왕후(敬和王后)만이 훗날 예종의 제1왕비가 되어 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나, 그녀 역시 31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 거란과의 분쟁: 외교와 자강(自强)의 병행

선종 재위 연간에 부각되었던 사건 중 하나는 거란과 압록강 유역 각장(榷場) 설치를 둘러싸고 빚었던 분쟁이다. 각장이란 일종의 국가 간 교역 시장으로, 거란이 압록강 일대에 양국의 물자를 교역하는 시장을 설치하려고 하자 고려가 극력 반대하여 중단시켰던 사건이다. 당시 고려는 외교적으로 거란에 지속적으로 각장 설치에 반대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물리적 충돌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를 갖추었다.

성종대(成宗代)에 양국은 압록강을 경계로 삼는 데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후 현종대(顯宗代)의 전쟁 과정에서 압록강 동쪽의 보주(保州), 즉 현재의 의주(義州) 지역이 거란에 의해 점령되었다. 거란은 보주 지역을 거점으로 고려 방면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하려 하였다. 이미 문종대에도 여러 차례 이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1086년(선종 3) 5월에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여 각장 설치 계획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각장이 단순한 교역 시설이 아니라 거란의 각종 거점으로 활용될 점을 우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송과 거란 사이에 설치된 각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었으므로, 고려의 이러한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을 것이다.

거란에서 당시 얼마나 구체적으로 각장 설치를 추진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료는 현재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는 상당히 예민하게 이에 대응하였다. 1087년(선종 4) 1월에 고주사(告奏使)와 밀진사(密進使)가 각각 파견되었던 것도 아마 이와 관련된 사행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선종은 같은 해 10월에도 다시 고주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논의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인지, 1088년(선종 5) 9월에 다시 태복소경(太僕少卿) 김선석(金先錫)을 파견하여 각장 설치를 중단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때 고려가 올린 표문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어 당시의 각종 관련 사안들의 진행 양상과 고려의 주장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는 거란에 대하여 선대의 합의에 따라 압록강 경계선을 준수할 것을 종용하며, 그 동쪽에 설치된 각종 시설물들을 철거하고 각장 신설을 중단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양국 간 경계 획정의 대원칙과 거란이 이를 위반한 역대의 여러 사례들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거란의 잘못을 지적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오래 조공을 보냈지만 이 문제로 그동안의 성의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원망이 커지고 있다고 하여, 완곡한 표현 속에 강한 불만을 내포하였다.

이렇듯 외교를 통해 각장 설치 중단을 요청하는 한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각종 군사적 조치도 서둘렀다. 1086년(선종 3) 9월에는 개경과 서경의 무관(武官)들을 소집하여 몇 달 동안 군사 훈련을 시켰고, 12월에는 다시 양경(兩京)의 문관(文官)들까지 소집하여 활쏘기를 시키고 검열하였다. 1087년(선종 4) 1월에는 거란에 고주사를 보낸 직후에 산천(山川)과 종묘(宗廟)·사직(社稷)에 신병(神兵)을 보내 전쟁을 도와달라는 기원을 담은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1088년(선종 5) 2월에는 각장 설치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안(李顏)을 장경소향사(藏經燒香使)라고 칭하고 귀주(龜州)에 가서 은밀히 변방의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고조되던 긴장은 1088년(선종 5) 11월에 거란이 김선석을 통해 보낸 회답으로 일단 누그러졌다. 이때의 회답은 각장 문제로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짧은 내용만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 숙종대(肅宗代)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 거란이 고려의 요청에 따라 각장 설치 계획을 중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양국 간 관계는 더 이상 수면 위로 갈등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는 거란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1091년(선종 8) 1월에는 병거(兵車)를 제작하여 귀주(龜州)에 배치해서 유사시에 대비하자는 서북면병마사 겸 중군병마사(西北面兵馬使 兼 中軍兵馬使) 유홍(柳洪)의 건의를 채택하였고, 1093년(선종 10) 6월에는 덕종(德宗)〜정종(靖宗) 시기에 박원작(朴元綽)이 제작하여 변방에 배치하였던 천균노(千鈞弩)의 사격 연습을 재개하자는 도병마사(都兵馬使)의 건의도 재가하였다. 또 같은 해에 역시 도병마사가 건의한, 전시에 병사들에게 입힐 옷을 미리 제작하여 급할 때 쓰게 하자는 주청도 허락하였다. 이 외에도 당시의 기록 곳곳에서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선종대에 고려는 거란과 벌어진 갈등 사안에 대하여 사대 관계를 지키면서도 지속적이고 명확한 외교적 어필을 제기하는 한편, 유사시를 대비하여 군사적인 조치도 병행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란의 각장 설치를 포기하게 유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 활발한 국제 문화 교류 참여와 문화 융성

11세기 후반의 동북아시아는 거란·송·고려가 평화 속에서 활발한 교류를 펼쳤던 시기였다. 물론 물밑에서는 치열한 견제와 경쟁이 있었으나, 적어도 그것이 전쟁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특히 고려와 송이 국교를 재개하면서 많은 문물 교류를 하고, 이를 통해 문화를 융성하게 북돋은 점이 이 시기의 고려 역사에서 주목되는 점이다.

선종은 선대부터 이어져 온 여진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였다. 많은 여진 부족들이 고려로 와 말 등을 헌상하고, 고려부터 작위와 회사품을 받아 갔다. 간혹 변경을 침범하는 여진인들도 있었으나,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탐라(耽羅) 역시 예전처럼 토산물을 헌상하고 작위와 회사품을 받아간 모습이 보인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것은 고려와 송의 교류이다. 선왕 문종대에 고려는 자국의 문화도 송에 뒤질 것이 없다는 자부심을 내비치기도 했는데, 송과 교류가 재개되고 문물이 왕래하면서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층 높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1091년(선종 8) 6월에 송에 파견되었던 이자의(李資義) 등 사신단이 돌아오면서, 고려에 있는 희귀도서들의 목록을 보내며 완질이 아니더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송 황제의 글을 가져온 일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물교류는 의천(義天)의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종의 형제였던 의천은 1085년(선종 2) 4월에 구법(求法)을 위해 송으로 향하였다. 의천은 부왕(父王) 문종이 재위하고 있을 때부터 송에 가려 노력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 때 문도(門徒) 두 사람만을 데리고 송의 상인을 따라 몰래 밀항을 하였다. 송에 도착한 의천은 송 황제의 큰 환대를 받았고, 그의 지원을 받으며 많은 고승(高僧)들을 만나고 귀중한 불교 전적들을 입수하여 고려로 돌아왔다. 이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거란·송·일본의 불교 서적들을 모아 고려 전래의 전적들과 함께 정리하였으니, 이는 동북아시아 불교문화를 집대성한 큰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087년(선종 4)에는 송의 상인들이 화엄경판(華嚴經板)을 헌상하였고, 1089년(선종 6)에는 13층 황금탑을 궁궐에 설치하는 등, 문화적으로 융성한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선종의 재위 기간이 전설 속의 요순시대처럼 평화롭고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가뭄이 여러 해 계속되어 어려움을 겪었고, 풍요로운 문화는 사치로 이어져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큰 사찰인 국청사(國淸寺)와 홍원사(弘圓寺), 홍호사(弘護寺)가 창건되는 이면에는 어려움이 가중되는 백성들의 삶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고려는 이러한 내부의 문제에 대해 선종 이하 조정의 신료들이 자성과 개선의 노력을 보이고 있었고, 거란의 각장 설치 시도과 같은 외부의 압력에 대해서도 다방면으로 대응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면을 종합해볼 때, 선종의 시대가 앞뒤시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빛은 덜하더라도 고려가 전성기를 누리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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