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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順宗]

준비된 국왕, 그러나 운명의 별이 떨어지다

1047년(문종 1) ~ 1083년(문종 37)

순종 대표 이미지

감지금니대반야바라밀다경 권175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순종(順宗)은 문종(文宗)의 아들로, 고려의 제12대 국왕이다. 원래 이름은 왕휴(王烋)였으나, 뒤에 왕훈(王勳)으로 고쳤다. 자(字)는 의공(義恭)이다. 1047년(문종 1)에 태어났고, 1083년(문종 37)에 왕위에 올랐으나 4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고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을 가졌던 왕이지만, 기록에 나타난 그의 사망 원인을 보면 일말의 숙연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을 살펴보자.

2 태자 시절

왕훈은 아버지가 국왕으로 즉위한 다음 해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이씨(李氏)였다. 문종과 인예순덕태후의 사이에서는 맏아들 왕훈을 비롯하여 훗날의 선종(宣宗)·숙종(肅宗)·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등 10남 2녀가 있었다.

원래 문종에게는 첫 번째 왕비로 현종(顯宗)의 딸인 인평왕후(仁平王后)가 있었으나, 그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아무런 정보가 전해지지 않는다. 당대의 중신(重臣) 이자연(李子淵)의 두 딸이 문종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중 장녀가 인예순덕태후였다. 처음에는 연덕궁주로 봉해졌다가 1052년(문종 6) 2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아마도 이자연의 위상과 왕훈의 존재가 함께 영향을 미쳤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왕태자 시절의 왕훈의 삶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몇몇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가 왕태자로 책봉된 것은 1054년(문종 8년) 2월의 일이었다. 8세 때였다. 이 때 이름을 왕휴에서 왕훈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4월에는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여 태자를 세운 것을 알렸다. 한편 5월에는 탐라(耽羅)에서 태자 책봉을 축하하는 사신이 온 것으로 보아, 책봉 사실이 널리 알려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거란에서는 이듬해 5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왕태자를 삼한국공(三韓國公)으로 책봉하였다. 고려의 태자가 거란의 책봉을 받은 것은 현종대 이후 첫 번째 일이었다.

1057년(문종 11) 3월에는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훈을 순의군절도사·삭무등주관찰처치등사·숭록대부·검교태위·동중서문하평장사·사지절·삭주제군사·행삭주자사·상주국·삼한국공·식읍 3,000호 식실봉 500호(順義軍節度使·朔武等州觀察處置等使·崇祿大夫·檢校太尉·同中書門下平章事·使持節·朔州諸軍事·行朔州刺史·上柱國·三韓國公·食邑 三千戶 食實封 五百戶)로 책봉하였다. 이 때 왕훈은 남교(南郊)로 나가서 책명을 받았는데, 문종이 몰래 행차하여 그 의례를 보았다고 한다. 또 1065년(문종 19년) 4월에는 여기에 시중(侍中)을 겸하고 특진(特進)을 더해주었다. 이런 모습은 고려가 10세기~11세기에 거란과의 전쟁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뒤로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해 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문종은 이렇듯 왕훈의 태자 책봉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고 공인받았다. 한편, 문종은 대내적으로도 왕훈의 위상에 상당한 신경을 썼던 것 같다. 1056년(문종 10) 9월에는 왕훈에게 여러 종친들 및 신하들과 함께 하는 잔치를 주관하도록 하였고, 10월에는 태묘(太廟)에 배알하도록 하였다. 태자의 생일은 장흥절(長興節)로 지정되어 중외(中外)의 신하들이 전(箋)을 올려 하례(賀禮)하였음도 알 수 있다. 1063년(문종 17) 4월에는 비각(秘閣)에 소장되어 있던 각종 서적들을 태자에게 하사하였으며, 1068년(문종 22) 8월에는 송(宋)의 진사(進士)들을 불러 시부(詩賦)를 시험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신하들과 잔치를 열 때에도 태자와 동석했다는 기록이 다른 왕대와 비교하여 유독 자주 등장한다. 1074년(문종 29) 4월에는 나아가 과거 급제자들에 대한 복시(覆試)를 태자에게 주관하도록 명한 적이 있으며, 1078년(문종 32)에는 송에서 온 사신단을 인도하는 임무를 명하기도 하였다. 1083년(문종 37)에는 송에서 보낸 대장경(大藏經)을 개국사(開國寺)에 봉안하는 일을 맡겼던 사실이 보인다.

이렇게 태자로서의 활동이 다른 시기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보이는 것은 문종의 오랜 재위 기간과도 상관이 있을 것이다. 가령 사신단을 맞이했던 1078년(문종 37)이면 이미 왕훈의 나이가 32세로, 당시로서는 정치 활동을 하기에 이미 충분히 원숙한 연배였던 것이다. 또한 부왕 문종이 풍비(風痺)라는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문종은 고질병으로 풍비를 앓아서, 송(宋)에 사신을 보내어 의원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송에서는 이에 황제가 의원과 약재를 보내주는 호의를 보였지만, 문종의 질병이 쉽게 낫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령에 질병이 겹치면서 문종은 막중한 국정의 총괄을 모두 감당하기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며, 이에 장성한 태자에게 그 일부를 맡기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3 즉위와 사망

왕훈은 이렇게 오랫동안 태자로 있으면서, 어려서는 아버지 문종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고, 장성해서는 부왕(父王)을 보필하며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문종은 1083년(문종 37) 7월에 병이 심해지자 왕위를 태자에게 넘기고 곧 서거하였다. 이렇게 하여 왕훈은 고려의 12대 국왕으로 즉위했으니, 바로 순종이다. 순종은 즉위 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왕의 서거를 알렸다. 이어 사면령을 내리는가 하면 궁궐에서 도량(道場)을 열고 대규모로 반승(飯僧)하는 등,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문제는 순종의 건강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는데, 부친의 상을 치르며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결국 즉위한 지 4개월 만에 동생 왕운(王運)에게 왕위를 전하고 서거하니,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른 죽음이었다. 그에게는 정의왕후(貞懿王后) 왕씨(王氏)·선희왕후(宣禧王后) 김씨(金氏)·장경궁주(長慶宮主) 이씨(李氏)라는 세 부인이 있었으나,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하였다.

오랜 세월 태자로서 국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던 왕훈. 그가 실제로 왕이 되어 어떤 정치를 펼쳤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의 건강 악화가 사료에 나온 것처럼 오롯이 부친의 돌아가심을 애통해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짧은 그의 치세 기간을 담은 책장(冊張) 한 쪽을 쉽게 넘기기에는, 혹 그의 진심어린 슬픔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늘 멈칫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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