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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주자학의 선구자

1243년(고종 30) ~ 1306년(충렬왕 복위8)

안향 대표 이미지

안향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안향(安珦)은 고려후기 학문 풍토를 변화시켜 이후 세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한국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문신관료로서도 활동하였던 그는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의 집권기 동안 원(元)의 선진 학문인 성리학(性理學)을 고려에 소개하였으며, 국학(國學) 개혁과 과거시험 주재를 통해 새로운 학파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인하여 안향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에 버금가는 동방의 대유학자로 평가받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한국 유교사 흐름에서 핵심적인 축을 점하고 있다.

2 세계(世系)와 출신가문의 위상

안향의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초명은 유(裕)였으나 후에 향(珦)으로 개명하였다. 1243년(고종 30)에 안부(安孚)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안향 열전(列傳)은 그의 세계(世系)와 관련하여, “아버지 안부가 향리(鄕吏)로서 의술을 업으로 삼다가 벼슬을 얻어 밀직부사(密直副使)까지 지냈다”라는 비교적 소략한 사실만을 전하고 있다.

구체적인 세계는 안향의 문집인 『회헌실기(晦軒實記)』를 통해 확인이 가능한데, 이에 따르면 안향의 증조부는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증된 안자미(安子美)이고 조부는 추밀원부사에 추증된 안영유(安永儒)이다. 어머니 단산(丹山) 우씨(禹氏)는 향공진사(鄕貢進士) 우천규(禹天珪)의 딸이자 역학(易學)에 능통했던 우탁(禹倬)의 누이였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인 안자미에 이르러 비로소 순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증조부 이전의 세계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이러한 사실과 아버지 안부가 본래 주(州)의 향리였다는 『고려사』의 기사를 참작할 때 안향의 가문은 대대로 지방 향리직을 역임하였던 중소지배층으로 보인다. 아버지 안부가 향공진사 출신인 우천규의 사위가 되었던 것 또한 중소지배층 단위의 계급내혼이 가져온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고려시대 향리, 특히 최상층 향리였던 호장(戶長)은 중앙관청인 상서성(尙書省)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의 사무를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으며, 동등한 위상을 갖는 인근지역 호장이나 중앙의 하급관리와 계급내혼 단위를 형성하였다. 또한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로 편입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향리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무신집권기 이후 과거제가 확대됨에 따라 다수의 향리 가문이 새롭게 중앙 정계에 대두하였는데, 아버지 안부의 혼인관계와 사회적 행적, 안향 자신이 과거를 통해 출세하게 되는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그의 가문은 고려후기 향리층이 중앙 관인층으로 성장해가는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3 출사(出仕)와 입신양명의 과정

어릴 적부터 학문연구를 즐겼던 안향은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에 수록된 고려시대 문과방목(文科榜目)을 살펴보면, 안향은 1260년(원종 원년)에 문과에서 3위를 차지한 것으로 확인된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당시 시험을 주관하여 안향의 좌주(座主)가 된 사람은 참지정사(叅知政事) 이장용(李藏用)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유경(柳璥)이다. 이들은 모두 고려후기 정치사를 서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인물들이었다. 이밖에 안향과 함께 급제하여 이장용의 문생이 된 인물로는 위문경(魏文卿), 김훤(金晅), 이존비(李尊庇), 박녹지(朴祿之), 오양우(吳良遇)가 확인된다.

과거급제 이후 안향은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다. 이윽고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승진한 그는 내시(內侍)로서 국왕을 측근에서 모시게 된다. 이와 같이 관료로서의 활동을 이어가며 안향은 본격적으로 중앙 관인층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는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등을 지낸 김녹연(金祿延)의 딸 한남(漢南) 김씨(金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1265년(원종 6년)에 아들 안우기(安于器)를 얻었다. 그리고 아들 안우기와 손자 안목(安牧)이 모두 과거에 급제함에 따라 그의 가문은 세족(世族)으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안향이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원종대는 고려의 격변기였다. 30년에 걸친 대몽항쟁을 끝내고 원(元)에 항복한 고려는 원종의 즉위와 함께 원의 군사력에 힘입어 무신정권을 종결시키고 왕정(王政)을 복고하였는데, 이에 궁지에 몰린 일부 무신들이 정변을 모의함에 따라 1270년에는 삼별초 항쟁[삼별초 난](三別抄抗爭)이 일어났다. 삼별초의 난은 안향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미처 도피하지 못하고 적에게 사로잡혔는데, 당시 적들은 그의 명망을 이용하기 위하여 “안한림(安翰林)을 놓아준다면 엄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군중을 협박하였다. 하지만 안향은 계책을 써서 가까스로 탈출하였고, 이를 계기로 국왕으로부터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 안향은 내시원(內侍院)에서 국왕을 보필하며 온갖 폐단을 없애는 데 힘썼으며 강직함과 청렴함이 알려져 감찰어사와 같은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의 즉위 이후 안향은 상주(尙州)·안동(安東) 등지에서 지방관으로 활동하며 세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후 다시 중앙으로 복귀한 그는 독로화(禿魯花)로서 원에 다녀온 공로를 인정받아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승진하였고, 곧이어 우사의(右司議)·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하였다.

이때 안향이 원에 들어가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사료부족으로 인하여 현재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원외랑(征東行城員外郞)에 임명되었다가, 1289년(충렬왕 15)에 고려 최초의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해본다면 그가 원에서 학문을 일취월장시켜 원나라 지배층으로부터 능력을 공인받았으리라는 추측을 쉽게 해볼 수 있다. 유학제거는 학교·제사·저술 등 유학교육 전반을 관장하는 관직으로서 원의 다른 행성보다도 먼저 고려에 설치되었다. 이처럼 고려의 교육·문화를 선도하는 중요한 직임을 원 황제가 안향에게 최초로 맡겼다는 사실은 안향 학문적 역량에 대한 원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방증한다.

4 성리학 전파 이후 새로운 학문기반의 형성

한국사에서 안향은 원의 신진학문인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하여 문풍(文風)을 진작하고 유학의 명맥을 이어나간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유학제거로서 고려의 교육·학문연구와 관련된 일 전반을 관장하였던 행적과 회헌(晦軒)을 호로 삼을 만큼 회암(晦菴) 주희(朱熹)를 존경하였던 태도만 보아도 후대인들은 그가 고려후기 사회에서 얼마나 선구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안향을 대유학자 반열에 올려놓을 만큼 널리 극찬 받았던 업적은 무엇보다도 국학 개혁과 후학 양성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밀직사사(密直司事) 등의 고관을 역임하다가 찬성사(贊成事)에 오른 안향은 고려의 교육기관이 점차 쇠퇴하는 것을 염려하여 재상들에게 “재상의 직무 가운데 우선할 것은 인재 교육입니다. 지금 양현고(養賢庫)가 비어 선비를 양성할 수 없으니, 6품 이상에게서는 은 한 근을, 7품 이하에게서는 베를 차등 있게 내어 양현고로 보내주신 뒤 그 이자를 섬학전(贍學錢)으로 삼게 해주십시오”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걷힌 기금으로 섬학전을 설치한 뒤, 남은 돈으로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畵像)을 만들고 제기(祭器)·악기·육경(六經)·사서(史書)를 사왔다.

안향은 국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층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유능한 선비를 기를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후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이곡(李穀)·이색(李穡)과 같은 걸출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국제적으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안향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안향은 충렬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과거를 주관하고 개인적으로도 이름난 인재들을 물색하는 등 적극적으로 후학양성에 힘썼다. 1288년(충렬왕 14)에 중찬(中贊) 허공(許珙)을 도와 문과를 주관한 안향은 윤선좌(尹宣佐)와 채우(蔡禑)를 선발하였고, 6년 뒤인 1294년(충렬왕 20)에는 직접 지공거가 되어 민지(閔漬)와 함께 윤안비(尹安庇)·이언충(李彦冲)·홍유(洪侑)·김광식(金光軾)·신천(辛蕆)을 뽑았다. 김이(金怡)·백원항(白元恒)과 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출세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들을 알아본 사람 또한 안향이었다고 한다. 안향이 발견한 다수의 인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제현이 있었다.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천거해 친분을 쌓았던 안향은 그가 이이(李異)와 더불어 과거에 급제해 유명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앞에 불러 시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시를 통하여 이제현은 귀한 신분이 되고 오래 사는 반면 이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이 사례는 단순히 안향의 선견지명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유능한 인물을 찾아 지원하는 일에 안향이 상당히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앞서 서술한 사례는 전해주고 있다.

5 후대의 평가

1306년(충렬왕 32)에 안향이 6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은 그에게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 날에는 국학의 유생들이 소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며 대유학자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즉, 안향이 세운 혁혁한 업적들, 특히 학문 분야에서의 공로는 그의 생전부터 이미 당대인 모두에게 공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1337년(충숙왕 6년)에는 그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때 그를 폄훼하는 사람이 섬학전을 설치한 공만으로 문묘종사를 운운할 수는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안향의 문생이었던 신천(辛蕆)이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 문묘종사가 성사되었다.

안향에 대한 추숭작업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의 지배층 또한 기자(箕子)를 통해 전래된 중화(中華)의 도(道)가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향을 통해 전수되었음을 인정하고 안향의 신위(神位)를 문묘에 모셨다.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본관인 순흥에 세워진 시설이었다는 사실 또한 특기할 만하다. 1550년(명종 5년)에 영의정 이기(李芑), 좌의정 심연원(沈連源), 우의정 상진(尙震)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국왕의 이름으로 편액(扁額)과 서적·토지·노비를 보내달라는 청을 올리자, 국왕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이와 같이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최고위층인 삼정승이 안향의 현창에 관심을 가졌을 만큼 한국사에서 안향이 갖는 의미는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안향은 사후까지도 한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드러내고 전통을 이어주는 인물로서 기억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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