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예종

예종[睿宗]

문치와 무위를 겸비한 고려를 꿈꾸다

1079년(문종 33) ~ 1122년(예종 17)

1 개요

예종(睿宗)은 고려의 16대 국왕이다. 15대 국왕인 숙종(肅宗)과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동복 형제로 상당후(上黨侯) 왕필(王佖),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 등이 있었다. 1079년(문종 33)에 태어나 1100년(숙종 5)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1105년(숙종 10)에 부왕이 돌아가신 후 즉위하였으며, 1122년(예종 17)에 사망하였다. 이름은 왕우(王俁), 자(字)는 세민(世民)이다. 부인으로 선종(宣宗)의 딸인 경화왕후(敬和王后)와 이자겸(李資謙)의 딸인 문경태후(文敬太后)를 맞이하였으며, 문경태후와의 사이에서 17대 국왕이 되는 인종(仁宗)과 승덕(承德)·흥경(興慶) 두 궁주(宮主)를 얻었다. 능은 유릉(裕陵)이다.

2 여진 정벌의 꿈, 미완으로 남다

2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예종에게는 당면한 큰 과제가 있었다. 바로 선왕 숙종대에 터졌던 여진과의 갈등 문제였다. 11세기 말부터 북만주 하얼빈 일대에 살던 여진의 한 부족인 완안부(完顔部)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점차 고려로도 미쳤다. 완안부의 세력이 확장하며 고려와 완안부 사이에 있던 여진 부족들이 동요하게 된 것이다.

고려는 숙종대에 두 차례에 걸쳐 완안부와 전투를 벌여 모두 대패하는 참사를 겪었다. 이에 숙종은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여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였으나, 그 준비 도중에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국상(國喪) 기간에 잠시 고려와 완안부의 갈등은 잦아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이슈는 다시 수면으로 부상하였다.

1107년(예종 2) 10월, 변방의 장수로부터 급박한 보고가 올라왔다. “여진이 횡포하여 변방의 성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그 추장이 호리병박[胡蘆] 하나를 꿩의 꼬리에 매달아 여러 부락에 돌려 보이며 일을 의논하는데, 그 심중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예종은 조정의 신하들과 논의를 거쳐 여진 정벌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대의 중신이었던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아 약 17만 명의 대군을 동원한 큰 전쟁이었다. 고려는 11세기 초반에 거란의 공격에 맞서 20만~30만의 병력을 동원한 적이 있었으나, 선제 공격을 위하여 이렇게 대규모의 군대를 조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해 12월 초, 고려의 대군은 동계(東界)에서 여진족의 영역으로 돌입했다. 수륙으로 다섯 갈래의 부대가 진군하여 불과 2개월 만에 5천여 명 이상을 베고 막대한 포로를 잡은 한편, 상당한 영역을 점령하였다. 그 영역에 대하여 『고려사』에는 ‘동쪽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다.’라고 하였고,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서는 ‘그 지방이 300리로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개마산(盖馬山)에 닿았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주에 접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영역이 어디까지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니, 대체로 함흥평야설‧길주(吉州) 이남설‧두만강 이북설 등이 있다. 윤관은 이 영역에 여러 성을 쌓아 방어 거점을 만들었다. 이 성들은 통칭 ‘9성’이라 불린다. 예종은 남부로부터 6만 5천여 명의 주민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이는 해당 영역에서 여진족을 제거한 후 고려인들로 채우고, 병목처럼 된 유일한 교통로를 막아 여진족의 왕래를 막겠다는 구상에서 진행된 작전이었다. 1108년(예종 3) 4월, 예종은 9성의 축조를 마치고 개경으로 개선한 윤관을 공신에 책봉하고 잔치를 열어 크게 격려하였다. 그 순간, 아마도 예종은 부왕의 숙원을 해결했다는 기쁨과 고려의 무위(武威)를 떨쳤다는 흥분, 그리고 나라의 판도를 크게 넓혔다는 뿌듯함에 가득했으리라.

하지만 축배를 들기엔 너무 일렀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여진족은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더구나 이들의 요청에 따라 완안부의 군대까지 파병되었다. 애초에 고려가 세운 작전의 핵심인 지리정보도 잘못되어 있었다. 병목 같은 통로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륙으로 수많은 길이 나 있었던 것이다. 성에 틀어박힌 고려군은 이제 여진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었다. 각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진 채 고려군은 큰 위기에 빠졌다. 기근과 질병도 고려를 괴롭혔다.

여진족은 전투를 벌이는 한편, 사자를 파견하여 9성을 반환해 주기를 거듭 요청하였다. 완안부에서도 화친을 청해왔다. 1109년(예종 4) 5월, 예종은 신하들을 소집하여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는 일을 논의하였다. 조정의 논의는 분분했다. 결국 그 해 7월, 예종은 9성을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여진 추장들로부터 “지금부터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 대대로 조공을 바치겠나이다. 이 맹세를 위배한다면 번토(蕃土)는 멸망할 것입니다.”라는 맹세를 받고 모든 장비와 인원을 철수시켰다. 뼈아픈 실패였다. 예종이 느낀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까. 비록 여진으로부터 불침범과 조공의 맹세를 받아냈으나, 국력을 기울인 원정에서 실질적인 소득은 얻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예종이 힘을 쏟았던 여진 정벌의 꿈은 미완으로 끝이 났다.

3 고려의 문풍을 진작시키다

즉위 초반에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여 상무적(尙武的)인 군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 예종은 문치(文治)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의 예종 총서에서도 그가 어려서부터 유학을 좋아했다는 점을 특기하고 있다.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사찬(史贊)에도 예종이 문치를 닦아 예악으로 풍속을 바로잡으려 했다고 높이 평가하며, 한안인(韓安仁)의 말을 빌려 ‘17년 동안의 왕업이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하였다.

예종은 즉위한 직후인 1105년(예종 즉위년) 10월에 제서를 내려 문과(文科) 급제 출신의 지방관들에게 해당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여진 정벌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107년(예종 2) 1월에는 학교 설치에 대해 속히 논의하도록 조정 신하들을 재촉한 모습이 보인다. 예종이 즉위 초부터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9성을 반환한 두 달 뒤인 1109년(예종 4) 7월에는 국학에 7재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각각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주례(周禮)』, 『대례(戴禮)』, 『춘추(春秋)』를 전공으로 삼아 심도 있는 유학 교육을 시행하는 기관이었다. 예종의 각종 정책을 통해 고려의 경학(經學) 수준이 한층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또한 이곳에 무학(武學)을 전공으로 하는 재가 함께 설치된 점도 주목된다. 여진 정벌 실패의 반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이 뒤로도 예종은 국학에 몸소 찾아가 선성(先聖)께 예를 올리고 학생들을 격려하였고, 1119년(예종 14) 7월에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국학의 교육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또 1116년(예종 11)에는 궁궐 안에 청연각(淸讌閣)을 지어 학사 등을 두고 아침 저녁으로 경서를 강론하는 한편, 몇 달 뒤에는 다시 보문각(寶文閣)을 지어 학사들이 모여 강론하고 휴식을 취하기에 편리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듬해에는 송에서 보낸 황제의 어필 등을 보관하기 위하여 천장각(天章閣)을 인근에 지었다. 한편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하여 송의 태학에 입학을 시키기도 하였고, 송에서 보낸 대성악(大晟樂)과 각종 제기들을 수용한 모습도 보인다.

예종은 청연각과 보문각에서 학사들과 자주 만나며 강론을 듣고 책의 편찬을 지시하곤 하였다. 또 때로는 이곳에서 잔치를 열어 함께 즐기곤 하였다. 예종은 여기에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학문과 정치를 논하며 문치가 이루어진 세상을 꿈꿨으리라.

한편, 예종은 풍수지리와 도참, 불교 등 다양한 분야에도 깊이 관심을 가졌다. 1106년(예종 원년) 3월에 지리에 관한 책들을 모아 정리하여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짓게 하였고, 신하들에게 음양비술(陰陽祕術)로 약해진 땅의 기운을 되살릴 방안을 제출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경(西京)의 용언(龍堰)에 궁궐을 지어 국운 연장을 도모하였다. 또한 경주의 황룡사(皇龍寺)와 남경의 삼각산 승가굴(僧伽窟), 개경의 안화사(安和寺)를 중수하고 천수사(天壽寺)를 옮겨 짓는 등 불교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직접 여러 사찰에 행차하거나 궁궐에 각종 도량을 설치하는 일도 잦았다. 유학적 원리에 따른 문치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고려의 전통적인 문화적 측면들도 폭넓게 북돋았던 것이다.

4 고려의 현실, 구름이 끼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란의 공격을 당당하게 물리쳤던 증조부 현종대의 고려. 문물이 융성하여 전성기를 구가했던 조부 문종대의 고려. 예종은 이를 겸비하여 고려를 한층 더 끌어올리겠다는 꿈을 좇았던 것은 아닐까. 그의 일생에 걸친 여러 노력은 그가 꿈을 이루기 위해 참 많은 공을 들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우선 국제 정세 면에서 완안부는 계속 세력을 키웠다. 국내 정치면에서는 점차 문벌의 형성이 심화되었으며,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전란과 기근, 지방관들의 기강 해이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점차 어려워졌다. 이 시기에 민의 유망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차차 누적되어 예종의 아들인 인종대에 심각하게 터져 나오게 된다. 이제 고려의 운명에 서서히 구름이 끼고 있었다. 예종의 꿈과는 달리.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