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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禑王]

원(元)·명(明) 교체기의 국왕, 신돈의 아들로 매도되다

1365년(공민왕 14) ~ 1389년(공양왕 1)

1 개요

고려왕조의 제32대 국왕이었던 우왕(禑王)은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극적인 생애를 살았던 인물이다. 공민왕(恭愍王)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출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왕위에 올랐으나 그만큼 취약한 세력기반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그는, 즉위한 순간부터 정통성 논란에 휩싸이며 희극과 비극 사이를 오가야 했다. 더욱이 공민왕대 개혁정치가 실패하면서 누적된 사회적 모순, 명(明)의 부상과 원(元)의 몰락이라는 국제적 지각변동,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대두와 같은 다양한 변수들이 집권기 내내 복잡한 정치적 문제들을 야기하였다. 그에 따라 우왕의 삶에는 점차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결국 그는 후대의 기록 속에서 정통 고려국왕이 아닌 반역자로 치부되며 왕조 패망의 책임을 떠안게 된다.

2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 출신을 둘러싼 논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던 세력들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고려말 역사를 대대적으로 윤색하였다. 고려왕실의 신성성(神聖性)을 폄훼하고 조선왕조 개창의 당위성을 피력한다는 두 가지 목적의식 하에, 이들은 고려왕실의 정통 계보가 이미 오래전 단절되어버렸으며 천명(天命)은 새로운 적임자에게 계승되었다는 논리를 창안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다. 우왕은 공민왕의 자식이 아닌 신돈(辛旽)의 자식이며, 신씨에게 왕위를 넘김으로써 정통 계보를 더럽힌 고려 왕실은 파멸을 자처하였다는 것이 이 논리의 핵심이었다.

『고려사(高麗史)』는 철저히 우창비왕설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 시기의 편년기사들은 다른 왕의 경우처럼 「세가(世家)」로 편입되지 않고 각각 신우열전(辛禑列傳)·신창열전(辛昌列傳)에 별도 수록되었으며, 이들에 대한 호칭 또한 ‘왕’이 아닌 ‘신우’·‘신창’으로 통일되었다. 나아가 『고려사』 신우열전은 우왕의 출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신우의 초명은 모니노(牟尼奴)로, 신돈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에게서 출생하였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반야가 임신해 만삭이 되자 신돈이 자신의 벗이자 승려인 능우(能禑)의 모친에게로 보내 해산시켰는데, 이곳에서 자라던 아이가 미처 돌도 되지 못해 죽었다. 능우는 신돈의 노여움을 염려하여 비슷하게 생긴 아이를 찾았다. 마침 이웃집 군졸의 아이를 훔쳐 다른 곳에 숨기고 신돈에게 아이가 병이 나서 다른 곳에 옮겨 기르겠다고 청하니, 신돈이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한 해가 지난 뒤 신돈은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기르면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횡(金鋐)으로부터 뇌물로 받은 노비 금장(金莊)을 유모로 삼았다. 반야 또한 이 아이가 자기 소생이 아니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때 공민왕이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다 하루는 평복 차림으로 몰래 대궐을 나와 신돈의 집을 찾았다. 신돈은 아이를 가리키며 후사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왕이 곁눈질하고 웃음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으나, 내심 이미 허락하였다.”

인용한 사료에서 확인되듯이,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전기 관료들은 우왕이 공민왕은커녕 신돈의 아이조차도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가 정상적인 왕통(王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누차 강조한다. 물론 이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서술이기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산재된 기록들을 취합해볼 때, 우왕의 출신과 관련하여 미심쩍은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선 우왕의 등장시점을 들 수 있다. 신돈을 축출한 이후에야 비로소 공민왕은 측근에게 우왕의 존재를 알리고 그에 대한 관리를 시작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7월에 신돈을 숙청한 공민왕은 근신(近臣)에게 “신돈의 여종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그의 집에 있으니 잘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다.

심지어 오랜 시간 고려국왕과 장인-사위 관계를 맺으며 고려 왕실에 깊이 관여해 온 원조차도 우왕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다. 공민왕 사후 원에서는 그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심왕(瀋王) 왕고(王暠)의 손자인 톡토부카(脫脫不花)를 고려국왕에 책봉하였다. 1375년(우왕 1)에는 원의 장군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 “전왕(前王)에게 아들이 없는데 누가 왕위를 물려받았는가”를 물어보기도 하였다. 이는 우왕의 입궁 후에도 공민왕이 그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공식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다음으로 우왕에 대한 명덕태후(明德太后)의 태도를 거론할 수 있겠다. 1373년(공민왕 22)에 공민왕은 모니노를 후계자로 삼기 위하여 당대의 명유(名儒)인 이숭인(李崇仁)을 그의 스승으로 삼으려 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는 달가워하지 않으며 “아이가 아직 어리니 조금 더 장성한 뒤 가르쳐도 된다”고 말하였고, 이에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 사업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후계자의 필요성을 피력해야만 했다. 심지어 명덕태후는 공민왕이 피살된 직후 종실 중에서 적임자를 골라 다음 왕으로 세울 것을 건의하기까지 한다. 계보상 모니노의 친할머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왕이 공민왕의 정통 후계자로 지명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니노를 원자(元子)로 삼은 이후에도 공민왕이 여전히 후사문제에 집착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국공주가 서거한 이후 공민왕은 측근을 사주해 후궁들을 겁탈하였고, 그러한 비정상적 관계 속에서 아이를 얻으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환관 최만생(崔萬生)이 익비(益妃)가 홍륜(洪倫)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에 공민왕은 기뻐하면서 “노국공주의 영전을 부탁할 사람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익비가 이미 아이를 가졌으니 무엇을 염려하랴”라고 하며, 사실을 알고 있는 최만생·홍륜을 죽여 입을 막으려고 하였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공민왕은 홍륜·권진(權瑨)·홍관(洪寬)·한안(韓安)·노선(盧瑄)에게 피살되었다. 우왕이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게 되는데, “원자가 있으므로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만족스러워 하던 공민왕이 왜 이렇게까지 후사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우왕이 실제 공민왕의 아들인가라는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전술한 세 가지 사례들은 최소한 그의 출신배경이 기존 왕위계승 전통에서 용납될 수 없을 정도로 한미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본래 고려는 부계만큼이나 모계가 강조되는 사회였다. 국왕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출신이 천하면 후계자로서의 자격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결혼한 상대 또한 사회적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내가 왕실의 서출(庶出)이었기 때문에 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던 손변(孫抃)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실제로도 우왕 이전 고려의 국왕들은 모두 왕실 내부의 근친혼이나 명문가와의 통혼관계 속에서 출생한 인물들이었다. 이를 고려할 때, 노비 소생의 우왕이 국왕으로 등극한다는 것은 당시 지배층 문화에서 쉽게 용인되기 힘든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추후 이러한 태생적 한계가 그에게 미치게 될 악영향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3 즉위과정과 취약한 지지기반

생전에 모니노를 후계자로 낙점한 공민왕은 권중화(權仲和)를 이색(李穡)의 집으로 파견하여 개명(改名)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시된 여덟 개의 글자 가운데 우(禑)를 골라 새로운 이름으로 삼은 후, 경복흥(慶復興)·염흥방(廉興邦)·백문보(白文寶)를 불러 우를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책봉하고 백문보·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스승으로 임명하였다. 우를 세자로 삼기 위한 작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계 쪽의 결점을 감춰야만 했던 공민왕은 우왕의 어머니로 이미 사망한 궁인(宮人) 한씨(韓氏)를 지목하고, 한씨의 선조를 추증하였다.

우왕을 후계자로 삼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374년(공민왕 23)에 갑작스럽게 공민왕이 시해되자 고려의 중앙지배층은 국왕 추대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명덕태후·경복흥·이수산(李壽山) 등이 종친 가운데 적임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던 반면,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세력은 공민왕의 유지를 받들어 우왕을 추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때의 논쟁에서 이인임 일파가 승리함에 따라 우왕은 10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즉위 초부터 우왕은 정통성 문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였던 명덕태후에게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일부 권신(權臣)의 지지에 힘입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사실상 그는 반쪽짜리 왕이었다. 왕권을 획득하자마자 우왕이 한 행동이 어머니로 지목된 궁인 한씨에게 순정왕후(順靖王后)라는 시호를 내리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이러한 정통성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음을 드러낸다.

동시에 우왕은 정국운영 과정에서 자신을 추대한 세력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인임을 중용해 대다수의 정치적 문제를 그의 뜻에 따라 처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인임의 친족인 이림(李琳)의 딸을 근비(謹妃)로 맞아들임으로써 결속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로써 그의 치세에는 이인임·염흥방·임견미(林堅味) 등 측근에 의한 정권 농단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게 된다. 그럼에도 최영(崔瑩)이 정국을 장악하였을 때 우왕은 똑같은 방식으로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려 하였다. 1388년에 이인임이 축출되자마자 최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딸을 영비(寧妃)로 삼아 새로운 정국 주도자와의 유대관계를 보다 끈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우왕에게 있어 취약한 지지기반을 보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이러한 선택은 새로이 대두하고 있던 정치세력들과의 공조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종국에 그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안겨주게 되었다.

4 정치적 실패와 고려의 패망

우왕의 집권기는 공민왕대를 거치며 중앙정계에 대두한 신진사대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 했던 시기이다. 이들은 국정운영 방침에 따라 파벌을 형성하여 상호 견제하였는데, 우왕대에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원·명과의 관계 문제였다. 일찍이 이인임은 명에서 공민왕 시해의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하여 원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때 임박(林樸)·박상충(朴尙衷)·정도전(鄭道傳) 등의 신진세력들은 명을 배반할 수 없다는 입장을 펴며 이인임의 결정에 대항하였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사실상 원과 명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는 문명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이며 현실정치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와 연결된 고차원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갈등은 한시적 에피소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논의를 불러왔다. 하지만 일부 권신에 기대어 정국을 운영해가던 우왕은 신진세력의 목소리에 능동적으로 반응하지 못하였고, 이러한 행태는 결국 요동정벌 문제를 계기로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1388년에 명으로부터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받은 우왕은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이성계에게 총책임을 맡겼다. 이에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으며 농번기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불합리하다. 모든 군대가 원정을 떠나게 되면 왜구가 나타날 우려가 있고, 장마철이라 행군에 어려움이 있다”는 네 가지 문제점을 거론하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이른바 4불가론으로 불리는 위의 이야기들은 이성계라는 한 개인만의 생각을 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원과의 교류를 거부하고 고려를 쇄신하고자 했던 세력의 입장이 이성계의 의견 속에 반영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감안할 때, 우왕과 최영의 패착은 다양한 정치세력의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위화도 회군은 우왕대 측근정치의 폐단이 오랜 시간 누적된 결과 발생하게 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1388년(우왕 14년), 요동정벌을 떠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에 있는 우왕과 최영을 몰아낸다. 하지만 이색과 조민수(曺敏修)의 개입으로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이 다음 왕으로 추대되고, 이성계는 이색·이숭인·권근(權近) 등의 정적을 축출할 때까지 잠시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곧이어 1389년(창왕 원년)에 이색 일파를 정계에서 몰아낸 이성계 세력은 진짜 왕씨를 추대한다는 명목으로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후, 강릉(江陵)에 있던 우왕과 강화도(江華島)에 있던 창왕의 목을 베었다.

이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우왕은 왕조 패망의 책임을 떠안은 채 고려의 반역자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조선왕조 지배층의 정치적 의도에 맞추어 각색되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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