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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元宗]

몽골의 도움을 얻어 왕정복고를 이룩한 임금

1219년(고종 6) ~ 1274년(원종 15)

원종 대표 이미지

소릉(개성)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내우외환의 시대

원종(元宗)은 고려 제24대 왕으로, 이름은 왕식[王禃]이고 원래 이름은 왕전(王倎)이며, 자는 일신(日新)이다. 고종(高宗)의 맏아들로, 모친은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이며, 1219년(고종 6) 3월에 출생하였다. 1235년(고종 22)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259년(원종 즉위년) 즉위하여 1274년(원종 15)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즉위하기 이전까지 고려 왕실은 안팎으로 거센 도전을 마주하고 있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으로 시작된 무신정권은 최충헌(崔忠獻)이 권력을 잡은 기간 동안 국왕을 두 번이나 갈아치우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국왕을 압도하고 있었다. 1206년(희종 2) 칭기스칸의 즉위로 시작된 몽골의 세계정복은 1231년(고종 18)에 이르러 드디어 고려를 목표로 삼기 시작하여 3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고종의 재위 기간 끝 무렵에 고려 왕실은 내심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최씨 정권은 끝내 항전을 고집하고 있었다. 몽골은 강화의 조건으로 출륙환도(出陸還都), 즉 고려의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길 것과 국왕의 친조(親朝), 즉 국왕이 친히 몽골 대칸에게 와서 항복할 것을 내걸고 있었다. 이 가운데 후자는 국왕이었던 고종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태자의 친조로 대체되었다. 결국 1259년(고종 46), 당시 태자였던 원종이 몽골로 향하면서 양국 사이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전자, 즉 수도를 육지로 옮기는 일은 이후로도 10여 년 만인 1270년(원종 11년)에야 완수되었다.

2 원종과 쿠빌라이의 조우, 그리고 그 파급

원종이 태자의 자격으로 대칸을 만나러 가던 도중, 마침 남송(南宋) 공격을 지휘하고 있던 대칸 뭉케가 갑자기 사망하고, 그의 아우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가 각각 대칸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내전이 시작되었다. 원종은 뭉케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가,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남송 공격을 중단하고 몽골 고원으로 돌아가고 있던 쿠빌라이와 마주쳤다.

이것이 의도된 판단이든 우연한 만남이든, 이들 사이의 조우가 몰고 온 파급효과는 상당했다.

먼저 쿠빌라이에게 고려의 태자가 찾아온 것은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선전할 만한 좋은 사건이 되었다. 동생과의 제위 다툼을 눈앞에 두고서 더 많은 세력을 끌어 모을 필요가 있던 쿠빌라이로서는 30년 가까운 전쟁 끝에도 굴복하지 않던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항복하러 자신을 찾아온 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하며 크게 기뻐하였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로, 당 태종(太宗)이 친정하였음에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세자가 스스로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쿠빌라이는 신료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원종을 번왕(藩王)의 예로 접대하며, 그의 국왕 즉위를 지지하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태자였던 원종이 친조를 위해 나라를 떠난 사이, 무려 46년 동안이나 왕위를 지키고 있던 고종이 승하하였다. 고종은 유언으로 태자인 원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지시하였으나, 당시의 무신집정자였던 김준(金仁俊)은 고종의 둘째 아들이자 원종의 친동생인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滄)을 추대하려고 하였다. 대신들의 반대로 결국 원종이 왕위에 추대되기는 하였으나,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왕위의 안전을 무난하게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때에 몽골에서 매우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며, 아울러 실제 군사를 동원하여 그의 귀국길을 호송하게 하였으니, 원종으로서도 자신의 즉위를 든든하게 지원해줄 세력을 등에 업은 셈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종과 쿠빌라이의 우연한 만남은 동생과 왕위를 다투고 있던 둘 모두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파급효과는 이후 한 세기 동안 이어질 양국관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 몽골과의 관계

오랜 전쟁의 결과, 그러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성립된 양국의 외교관계에서 몽골은 고려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우선 몽골은 한반도 곳곳에 배치해두었던 몽골의 군대와 감독관인 다루가치들을 모두 철수시키기로 하였다. 또한 고려의 의관(衣冠)을 비롯한 풍속을 몽골식으로 고칠 필요 없이 원래대로 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른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원칙이라는 것으로, 이는 이후 한 세기 동안 지속될 양국관계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개경으로의 환도(還都)가 늦어지고 김준을 비롯한 고려 집정자들의 몽골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이지 않은 것을 확인한 몽골은 1268년(원종 9) 무렵부터 고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른바 육사(六事), 즉 인질 제출, 군사 원조, 군량 공급, 역참 설치, 호구조사와 그 결과의 제출, 다루가치 배치 등 여섯 가지의 요구사항을 고려에 이행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몽골의 힘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국왕이었기 때문에, 몽골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그들의 요구가 거세질수록 고려 국내의 정치에서도 원종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4 몽골의 힘으로 왕위를 회복하다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과의 강화 직전에 막을 내렸지만, 그 뒤를 이은 무신 집정자들은 여전히 고려의 정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몽골에서 6사의 이행과 출륙환도를 재촉하면서 양국 관계가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고, 나아가 집권자인 김준의 입조를 요구하는 상황에 이르자 1268년(원종 9), 김준은 몽골의 사신을 죽이고, 나아가 국왕까지도 폐위하고자 하였다. 김준은 그해 연말 임연(林衍)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로써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새로 정권을 장악한 임연 역시 원종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원종이 출륙환도를 서두르자 이듬해인 1269년(원종 10) 임연은 끝내 그를 폐위하고 안경공 왕창을 옹립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원종 폐위사건, 혹은 안경공 추대사건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몽골에 표문을 보내, 국왕에게 병이 있어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몽골은 여전히 원종을 고려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몽골에서는 즉각 사신을 보내와서 사태의 전말을 조사하는 한편 국왕의 안위를 보장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몽골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게 된 데에는 당시 몽골 조정에 가 있던 태자 심(諶), 즉 이후의 충렬왕(忠烈王)의 활약이 컸다. 마침 몽골에서 돌아오고 있던 태자는 원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로 되돌아가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몽골은 국경 근처까지 군대를 파견하면서 원종과 왕창, 그리고 임연의 입조를 촉구하였다. 결국 왕창은 사저로 돌아가고 원종이 복위하게 되었다.

원종은 그해 연말 몽골에 입조하여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임연 일파를 제거하고 출륙환도를 추진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듬해 5월, 원종은 몽골군과 함께 귀국하면서 먼저 사신을 보내 수도를 개경으로 옮길 것을 명령하였다. 임연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임유무(林惟茂)는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송송례(宋松禮) 등에 의해 살해당하게 되었고, 출륙환도가 드디어 단행되었다. 이로써 100년에 걸친 무신집권기가 종언을 고하였으며, 고려와 몽골의 강화도 완전하게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뒤이어 몽골에서 요구했던 6사 역시 모두 실행되었다.

한편 원종은 몽골과의 관계에 얽힌 다양한 문제를 풀어내는 데에도 집중하였다. 우선 서경(西京)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켜 원에 귀부했던 최탄(崔坦) 세력의 처리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들 세력을 받아들인 쿠빌라이의 조치에 대해 원종은 여러 경로를 통해 서경 일대의 반환을 요청하였다. 또한 이 시점에서는 이후 양국관계에 큰 전환점이 되는 논의가 오가고 있었는데, 바로 왕실통혼 문제였다. 원 황실의 공주를 고려 왕족과 혼인시키자는 왕실통혼 제안은 원종폐위사건 당시 원에 입조해있던 세자, 즉 이후의 충렬왕이 먼저 제시하여 이미 허락을 받은 사안이었다. 원종은 1270년(원종 11) 원에 입조하여 공식적으로 세자 청혼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 결과 1274년(원종 15) 쿠빌라이의 딸 쿠두루칼리미쉬[忽都魯揭里迷失] 공주, 즉 이후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충렬왕 사이의 통혼이 정식으로 성사되었다.

5 시대의 전환기

원종의 시대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시대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한 세기에 걸친 무신집권기와 반세기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다시 한 세기 동안 지속되는 원간섭기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개인으로서의 원종은 그 격동의 한 가운데서 풍파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안으로는 무신집권자들과의 정권 경쟁으로, 밖으로는 몽골의 압력으로 그의 재위 기간은 파란의 연속이 되었다. 태자 시절까지 합하면 세 차례 몽골에 친히 다녀왔는데, 이는 한국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즉위할 기회를 놓칠 뻔하기도 하였으며, 재위 중에 폐위를 당하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원종은 당시 몽골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으며, 다시 그 힘을 등에 업고 복위하였다. 국내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는 몽골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후 한 세기 동안 이어진 몽골에 복속된 고려의 모습을 예견하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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