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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尹瓘]

‘여진 정벌’의 명암을 짊어진 당대의 재상

미상 ~ 1111년(예종 6)

윤관 대표 이미지

윤관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고려 문종(文宗)~예종(睿宗) 시대에 주로 활동한 문신으로 숙종(肅宗)과 예종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여진 정벌의 화려한 성과로 정벌 직후 큰 영광을 누렸으나, 상황이 악화되고 결국 9성 지역을 여진에게 돌려주게 되면서 문책을 당하였다.

2 가계

윤관(?~1111)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그의 고조부인 윤신달(尹莘達)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던 인물이었다고 하며, 아버지인 윤집형(尹執衡)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을 지냈다고 한다. 증조부와 조부에 대해서 『고려사(高麗史)』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윤관의 후손들의 묘지명을 통해 이들을 추적해볼 수 있으나, 서술이 일관되지 않아 학자에 따라 다소의 견해 차이가 있다. 윤관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윤관은 경원(慶源) 이씨(李氏)인 이성간(李成幹)의 딸과 혼인하였고, 『고려사(高麗史)』에 열전이 수록된 윤언이(尹彦頤)를 비롯하여 7남 2녀를 두었다. 윤관 이후 그의 가문은 상당히 번성하여, 왕실과 혼인을 하는 등 당대의 명문으로 거듭났다.

3 출사와 관료로서의 활동

윤관은 1073년(문종 27) 10월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후 그는 각종 정치적 현안 및 외교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는 등 학식을 발휘할 기회도 누렸다. 기록의 편중으로 인하여 보통 윤관에 대해 여진 정벌을 위주로 논하게 되지만, 우선 관료로서의 그의 활동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기록상 확인되는 윤관의 최초 관력은 문종[고려](文宗) 때에 습유(拾遺)와 보궐(補闕)을 역임했다는 것이다. 두 관직 모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한 간관(諫官)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다음 국왕인 선종[고려](宣宗) 시대에는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광·충·청주도(廣·忠·淸州道)의 출추사(出推使)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그리고 숙종[고려](肅宗) 시대에 관료로서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윤관은 1095년(숙종 즉위년) 10월에 거란에 숙종의 즉위를 알리는 고주사(告奏使)로 파견되었다. 또한 1098년(숙종 3)에는 송에 고사위사(告嗣位使)로 파견되어 역시 새 국왕의 즉위를 알렸다. 어린 조카 헌종[고려](獻宗)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 숙종의 즉위는 자연스러운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민감한 외교적 사안이 될 수 있었으므로, 이런 사실을 설명하는 사신으로 선발된 것은 당시 윤관이 상당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송에 사신으로 파견될 당시 그의 관직은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로, 숙종이 태자의 교육을 맡길 정도로 학식을 인정받고 신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때 태자를 보좌하는 첨사부(詹事府)에는 숙종의 즉위 과정에서 공을 세웠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정계의 신진·중진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숙종은 이를 통해 태자의 지위를 강화하려 하였고, 이는 곧 자신의 입지 강화와도 연결되는 일이었다.

1101년(숙종 6)에 윤관은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1103년(숙종 8)에는 이부상서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겸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국왕의 측근에서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를 담당하는 추밀원(樞密院)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더구나 이 무렵 관료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상서를 겸직했고, 1102년에는 관료를 감찰하는 어사대부(御史大夫)도 역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였으니, 이는 새로 관료가 될 인재들을 선발한 것이다. 고려 시대에 지공거가 그 해의 급제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윤관이 국왕의 측근 요직에 있으면서 관료 조직의 선발·인사·감찰에 깊숙이 개입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내용은 윤관의 역임 관직을 통해 그의 정치적 활동을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직에 올라 있었는지 만으로 그의 정치적 활동상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정치적 활동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주목할 만한 것으로 화폐 주조·유통론을 지지한 점과 남경(南京) 개창 준비 작업에 투입된 점을 들 수 있다.

고려 시대에 화폐의 유통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성종[고려](成宗) 시대에 이미 철전(鐵錢)인 건원중보(乾元重寶)가 만들어졌으나 널리 쓰이지 못했다. 한 때 적극적으로 화폐 사용을 추진하였으나, 목종(穆宗) 때에 민간의 불편이 심하다는 이유로 일반 거래에서는 다시 베를 쓰는 것도 허용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적극적으로 금속화폐의 제작과 유통을 추진하였다. 1097년(숙종 2)에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관련 업무를 다루게 하였고, 1101년(숙종 6)에는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여 주화 제작에 나섰다. 그리고 이듬해인 1102년(숙종 7)에 마침내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관료들에게 나누어주고 사용하게 하였다.

화폐의 유통이 활성화되지 못하자 숙종은 개경 및 각 지방에 주식점(酒食店)을 열어 거래를 촉진하게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조치는 숙종의 동생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올린 주전 건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당시 의천은 송에서 화폐를 이용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고려에도 이를 도입하려 했다고 한다. 이 정책은 숙종의 왕권강화책 및 국가재정 확보책이라는 측면과 관련지어 생각되기도 한다. 윤관은 당시 화폐의 유통을 청하여 숙종의 정책을 뒷받침하였다고 한다.

한편, 1101년(숙종 6)에 윤관은 남경(南京)을 다시 설치하는 일에도 투입되었다. 문종대에 도참설에 따라 국운 융성을 위해 창건되었던 남경은 몇 년 뒤에 폐지가 되었다. 그런데 숙종이 즉위한 뒤 김위제(金謂磾)라는 신하가 다시 남경을 창건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고, 조정의 논의를 거쳐 재설치가 결정되었다. 이 때 윤관은 최사추(崔思諏),임의(任懿) 등과 함께 현지로 내려가 궁궐터를 살펴보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보고에 따라 숙종은 공사 개시를 명하였고, 1104년(숙종 9)에 궁궐이 완성되었다. 이렇듯 당시 윤관은 국정의 현안마다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4 여진 정벌과 윤관의 영광, 그리고 굴욕

12세기 초반의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축조’는 한국사에서 큰 사건 중 하나이며, 이 시기에 벌어졌던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윤관 개인에게도 그의 일생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벌어질 무렵의 국제 정세를 살펴보고, 동시에 ‘여진’이 어떤 세력인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10세기부터 11세기까지 동북아시아의 주요 국가는 대륙 북방 초원의 거란, 대륙의 송, 그리고 한반도의 고려라 할 수 있다. 1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이들 국가들 간에는 큰 마찰이 발생하였다. 거란과 송 사이에 여러 차례의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거란은 송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양국 간에 수립된 ‘전연(澶淵)의 맹약’에 따라 송은 매년 거란에 상당한 양의 은과 비단을 보내야 했다. 아울러 송의 황제가 당시 거란의 실권자였던 승천황태후를 숙모로 대우하는 격식을 갖추기로 하였다. 거란은 고려 역시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침공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와 송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차단하고 고려의 조공을 받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전쟁에서는 후기로 갈수록 거란군이 오히려 큰 타격을 입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본 송은 고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노력했고, 거란도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고려는 두 나라에 대해 예를 지키며 안정과 실리를 추구하였다. 11세기 후반이 되면서 세 나라 사이에는 경쟁과 긴장 속에서 많은 문물 교류가 이루어졌고, 동북아시아는 공존과 교류,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도는 11세기 말부터 여진족이 성장하면서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여진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일대에 부족별로 흩어져 살고 있었고, 이 시기에는 부족마다 상황에 따라 고려 혹은 거란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금의 하얼빈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던 완안부(完顔部)가 세력을 키우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부족은 과중한 공물 요구 등의 이유로 거란에 대한 불만을 키워가고 있었다. 완안부는 영가(盈歌)와 오아속(烏雅束)이라는 유능한 부족장의 지휘 하에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규합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부족과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그 세력권도 점차 늘어나 두만강 일대까지 확장되었다. 완안부의 성장이 고려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여진 부족 중에는 고려에 귀부한 곳들도 많았다. 11세기 후반 문종대에는 자신들의 거주지를 아예 고려의 주현으로 삼아주기를 청하는 부족들이 몰려들어, 고려에서 기미주(羈縻州)로 삼기도 하였다. 특히 한반도 동북부의 함경도 일대에서는 고려에 귀부한 부족들과 그렇지 않은 부족 간에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완안부가 성장하며 이 지역으로 세력을 뻗쳤기에 고려와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다. 숙종과 고려 조정도 이러한 정세를 인식하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고려와 여진 간의 본격적인 충돌은 1104년(숙종 4) 1월에 벌어졌다. 이 때 완안부의 군사가 대립하던 부족을 추격하여 고려의 변경인 정주(定州)의 관문 밖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당시 이 부근의 여진 부족들의 향배를 둘러싸고 고려가 완안부와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에 고려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삼아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간은 섣부르게 병력을 출격시켜 공격했다가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에 승세를 탄 여진군이 정주 관내로 들어와 약탈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에 숙종은 다시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였다.

윤관이 여진 정벌에 개입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부터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시기는 윤관이 숙종의 측근이자 조정의 중신으로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던 때였다. 그러나 숙종의 신임을 받고 출동한 윤관은 큰 패전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윤관은 병력의 태반을 잃고 ‘비굴한 말’로 화의를 맺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는 고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오래 전 일이기는 하나 동북아시아의 최강자였던 거란과의 전쟁도 승리로 종결지었던 고려가, 그동안 자신들에게 복속되어 있던 여진에게 패전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윤관 개인에게도 그동안 순탄했던 인생에 큰 시련이 되었을 것이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이 군대의 구성에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즉 여진은 기병이 주력인데 고려군은 보병이어서 상대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에 숙종은 윤관이 건의에 따라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였다. 별무반은 동원이 가능한 거의 모든 젊은 성인 남성을 편제하여 기병·보병·노병 등으로 나누고, 승려들도 동원하여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제한 국가총동원체제였다. 숙종은 이듬해에 활쏘기를 사열하는 등 전쟁에 대비한 정국 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그 해 겨울에 사망하여, 고려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하지는 못하였다. 숙종 사후 고려와 여진은 사신을 교환하며 잠시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107년(예종 2)에 고려는 다시 여진을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변방에서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새 국왕 예종(睿宗)이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며 개전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진과의 전쟁 경험이 있었던 윤관을 다시 한 번 원수로 임명하였다. 윤관은 부원수로 임명된 오연총(吳延寵)이 주저하자 성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며 의욕적으로 출병하였다. 약 17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원정이었다. 이른바 ‘윤관의 여진 정벌’의 시작이었다.

윤관은 고려군을 다섯 갈래로 나누어 기습적으로 공격을 단행하였다. 압도적인 병력과 계획된 작전을 앞세운 고려군은 여진족 부락들을 각개 격파하며 급속도로 전진했다. 일부 지역에서 여진족의 저항을 맞닥뜨리거나 기습을 받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맹장 척준경(拓俊京) 등의 활약이 곁들여진 고려군은 결국 여진족을 대파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윤관이 승전을 알리는 표문을 올리고 개경으로 귀환하기까지 불과 3~4달의 작전 기간 동안, 고려군은 약 135개의 여진 촌락을 함락시키고 5천여 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또 그만큼의 여진군을 죽였다고 한다. 또한 점령한 지역에 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함주(咸州)·공험진(公嶮鎭)·의주(宜州)·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을 비롯해 여러 성을 수축하였다.

이들 지역을 통틀어 이른바 ‘윤관 9성(九城)’ 혹은 ‘동북 9성’이라 부른다. 고려는 이 지역에 남쪽 지방으로부터 무려 6만 9천호의 인구를 이주시켰다. 윤관은 1108년(예종 3)에 국왕 예종의 큰 환대를 받으며 개선하여 대승을 보고하고 큰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임명되고 다시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천 5백호 식실봉(食實封) 3백호에 봉해졌다. 윤관의 일생에서 아마도 최고의 영예로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절정은 그리 길지 못하였다. 사실 윤관은 개선하여 승전을 보고했으나, 이미 1108년(예종 3) 초반부터 고려군은 완안부가 파견한 군대 및 현지 여진족의 반격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고려군은 여러 성에 분산된 채 여진족에 의해 포위공격을 당하였고,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나오지 않으나 당시 사람인 이탄지(李坦之)의 묘지명에서 웅주성(雄州城)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던 정황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에 예종은 윤관과 오연총을 다시 파견하였으나, 상황을 호전시키기는 어려웠다.

이에 고려 조정 내에서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점점 힘을 얻었다. 마침 여진에서 화의를 제안하자 고려는 이를 수용하였다. 여진이 예전처럼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침범하지 않는 대신 9성 지역을 돌려준다는 조건이었다. 1109년(예종 4) 6월의 일이었다.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소모했지만 사실상 고려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뼈아픈 실패였다. 이후 1115년(예종 10)에 완안부는 나라를 세워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거란을 멸망시켰으며, 송의 수도를 함락시켜 중국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제 윤관은 패전의 책임자라는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예종은 그를 보호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윤관은 공신호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예종은 얼마 뒤 그에게 다시 관직을 내렸으나, 윤관은 이를 고사하였다.

그리고 1111년(예종 6)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훗날 그는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며 숙종과 예종의 측근으로 탄탄한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나, 여진과의 전쟁이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몰락하게 되었던 비운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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