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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

현실에 타협한 채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문장가

1168년(의종 22) ~ 1241년(고종 28)

이규보 대표 이미지

이규보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대표적인 고려 문인, 이규보

이규보(李奎報)는 1168년(의종 22)에 태어나 1241년(고종 28)에 사망한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文人)이자 관료이다. 원래 이름은 이인저(李仁氐)이었지만 나중에 이규보로 개명하였다. 자는 춘경(春卿)이고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등을 사용하였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본관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인 황려(黃驪)였다.

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증조부 이은백(李殷伯)은 중윤(中尹)을 지냈고, 조부 이화(李和)는 검교교위(檢校校尉)였으며, 아버지 이윤수(李允綏)는 호부낭중(戶部郞中)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울진현위(蔚珍縣尉)를 지낸 김시정(金施政)의 딸로, 훗날 금란군군(金蘭郡君)에 봉해졌다.

이규보는 그가 남긴 저술을 모아 편찬한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으로 유명하다. 이 문집은 당시의 사회상은 물론, 그 시기에 전해지고 있었던 전승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따라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고려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저작물이다. 이에 관해서는 『동국이상국집』 항목에서 더 다루어질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그의 일생에 대하여 주로 살펴보겠다.

2 파란만장했던 생애

이규보의 삶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의 이규보 열전 및 『동국이상국집』의 연보, 그의 묘지명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이규보의 삶은 무신집권기라는 시대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세 살이었던 1170년(의종 24) 8월, 정중부(鄭仲夫)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에 이규보의 아버지 이윤수는 성주(成州)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윤수는 어린 이규보를 포함해 가족들을 데리고 부임하였다. 수많은 살육이 벌어지며 흉흉했던 이 때, 아마도 개경을 벗어나는 편이 이들 가족에게 더 안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규보가 7살이 되던 1174년(명종 4)에 이윤수는 내시(內侍)로 발탁되어 가족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어린 이규보는 글을 익힌 뒤로 글짓기에 재능을 보였다. 11세 때에는 이미 숙부의 동료들 앞에서 글을 지어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14세에 당시 최고의 사학이었던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성명재(誠明齋)에 입학하였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의 하과(夏課)에서 거듭 1등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10대 초반의 이규보는 아마도 주변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한껏 자신감에 차 있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당(唐)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에 견주어 말하였다고 하니, 그 자부심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글공부를 하고 학교를 다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과거 급제를 통한 관직 진출이었다. 이규보도 16세 때부터 과거의 예비 고시인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했지만,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그는 ‘7현’이라 불리던 오세재(吳世才) 등의 벗들과 어울리며 풍류를 즐기느라 과거 준비에 전념하지 않았다고 한다. 22세에 네 번째로 응시해서야 합격하였는데, 이 때 1등으로 뽑혔으니 그와 가족들이 무척 기뻐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189년(명종 19) 5월에 유공권(柳公權)이 주관한 국자감시의 십운시(十韻詩) 분야에서 1등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 때 꿈에서 규성(奎星)이 그의 장원급제를 예언해 주었다 하여 이름을 이인저에서 이규보로 바꾸고 시험을 보았다고 한다.

힘들게 국자감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것이 밝은 미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규보는 1190년(명종 20)에 열린 예부시(禮部試) 제술과(製述科)에 가장 낮은 등급인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하였다. 그는 크게 실망하고 급제를 사양할 생각까지 했지만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그런 전례도 없었으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예부시의 지공거(知貢擧)였던 이지명(李知命)과 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사망이 크게 상심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고, 지공거와 그 해 합격자의 관계가 좌주(座主)-문생(門生)이라 하며 중시되었던 당시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지명의 사망도 그에게 심리적·현실적 타격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후 그는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이규보는 이 무렵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았고, 거처를 앵계초당(鸎溪草堂)으로 옮겼으며,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과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저술하였다. 그런데 비록 과거에 급제했지만 이규보는 바로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무신들이 권력을 쥔 뒤로 인사(人事)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1196년(명종 26)에 최충헌이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집권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큰 매형이 귀양에 처해졌고, 국자감시를 주관했던 유공권마저 사망하였다. 네 살이 된 큰 딸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규보의 능력을 인정한 몇몇 관료들이 그를 추천하였지만, 번번이 관직을 받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겨우 하급 산직(散職)을 가졌던 모습만이 보인다. 이 무렵 작성된 시 중에 여러 관료들에게 구직을 부탁하는 것들이 다수 남아있다. 겨우 지방의 말단 관리로 부임했다가도 주변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곧 파직되었고, 1202년(신종 5)에 운문산 일대의 반란군 토벌에 자원하여 종군하였지만 논공행상 때에는 제외가 되었다. 40세가 될 때 까지도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벼슬을 구걸하고 있었다. 이러한 엄혹한 현실이 그를 짓눌렀다.

그가 40세가 되었던 1207년(희종 3),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대의 집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이 새로 모정(茅亭)을 짓고, 이규보 등 몇 사람을 불러 기(記)를 짓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 이규보가 지은 글이 제일로 뽑혔다. 얼마 뒤 이규보는 국왕의 문서를 짓는 한림원(翰林院)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관직을 얻었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최충헌의 눈에 들었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었다. 이 무렵 이규보는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로부터도 큰 신임을 받았다. 최충헌이 이규보의 능력에 대하여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최우가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기회를 주었던 일화가 전해진다. 이규보 개인에게는 드디어 출세의 길이 열린 것이었으나, 그러한 현상 자체가 무신집권기 인사 행정의 난맥을 보여주는 씁쓸한 대목이다.

이때부터 이규보는 개경에서 관리의 삶을 살았다. 최충헌에게 여러 차례 초청되어 시를 지어 올렸고, 그에 대한 포상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50세가 되었던 1217년(고종 4), 그는 우사간 지제고(右司諫 知制誥)가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잠시 최충헌의 눈 밖에 나서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나, 마침 이 때 최충헌이 사망하고 아들 최우(崔瑀)가 집권하여 다시 소환될 수 있었다. 더구나 이제는 정5품의 시예부낭중·기거주·지제고(試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최우의 집권기에 이규보는 인생의 절정기를 누릴 수 있었다. 58세가 된 1225년(고종 12)에는 국자감시를, 1228년(고종 15)·1234년(고종 21)·1236년(고종 23)에는 예부시를 주관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1227년(고종 14)에는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선대 국왕의 실록 편찬도 영광이었겠으나, 당시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가 된다는 것은 문신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명예로운 일이었기에, 이 시기에 이규보는 상당한 뿌듯함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 그의 인생에 다시 한 번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63세가 된 1230년(고종 17)에는 팔관회 의례 진행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벌어진 논쟁에 휘말려 섬으로 유배되는 사건이 터졌다. 다행히 이듬해에 바로 사면되어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더 큰 사건이 이제 기다리고 있었다. 1231년(고종 18),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참혹하고 기나긴 전쟁기의 도래였다. 이규보는 이 때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외교문서는 단순히 문체의 아름다움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전후 상황에 대한 조리 있는 설명과 설득·회유 등 외교의 총체적인 내용이 담기는 것이다. 이규보의 글을 보고 몽골 황제가 감격하고 깨달아 철군하였다는 『고려사』 이규보 열전의 표현은 과장된 것이겠으나, 중요한 시국에서 그가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몽골이 잠시 물러간 1232년(고종 19)에 최우는 강화도(江華島)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규보도 강화로 옮겨가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최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관로(官路)도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오른 그였다. 아들들도 관리가 되어 조정에 출사하였고, 딸들은 어엿한 관리들과 혼인을 맺었다. 1238년(고종 25)에는 네 차례에 걸쳐 그가 선발한 과거 급제자들이 모여 합동으로 잔치를 열고 이규보를 기쁘게 하였다. 또한 당대의 화가로 칭송되던 정이안(鄭而安)으로부터 묵죽과 초상화를 선물받기도 하였다. 여러 병에 시달렸지만 늘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가야금 타는 일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냈다. 아마도 행복한 노후 생활이었을 것이다. 이규보가 당시 지은 시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천도란 예부터 하늘 오르기만큼 어려운 건데 / 遷都自古上天難
공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 / 一旦移來似轉丸
청하의 계획 그토록 서둘지 않았더라면 / 不是淸河謀大早
삼한은 벌써 오랑캐 땅 되었으리 / 三韓曾已化胡蠻
백치 금성에 한 줄기 강이 둘렀으니 / 百雉金城一帶河
공력을 비교하면 어느 것이 나은가 / 較量功力孰爲多
천만의 호기가 새처럼 난다 해도 / 萬千胡騎如飛鳥
지척의 푸른 물결 건너지는 못하리 / 咫尺蒼波略未過
강산 안팎에 집이 가득 들어찼네 / 表裏江山坐萬家
옛 서울 좋은 경치 이에 어찌 더할쏜가 / 舊京形勝復何加
강물이 금성보다 나은 줄 안다면 / 已知河勝金城固
덕이 강물보다 나은 줄도 알아야 하리 / 且更諳他德勝河
(「바다를 바라보면서 천도(遷都)한 것을 추경(追慶)함」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18. 한국고전번역원 권오호 역)

바로 그렇기에, 이규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당시 몽골군이 내륙을 휩쓸며 온 나라가 전란에 휘말려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최우와 이규보 등이 누렸던 여유로운 삶의 모습은 이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이규보의 문생들이 합동으로 잔치를 열어주던 바로 그 해, 경주(慶州) "황룡사(黃龍寺)의 탑은 몽골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규보가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나, 재상의 지위에 오른 그가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한 나라의 재상의 역할과 그에 어울리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자기의 장점을 살려 직분만 수행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을 위하여 노력해야 마땅한 것일까? 정답을 고르기가 어려울지 몰라도,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규보는 1237년(고종 24)에 70세의 나이로 치사(致仕)하였다. 이미 병에 시달리고 있던 이규보였다. 그의 생전에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최우의 후원 하에 아들 이함(李涵)이 주관하여 그의 문집 편찬이 서둘러 착수되었다. 그러나 1241년(고종 28) 9월, 이규보는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임종하기 불과 얼마 전까지도 글짓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규보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글은 지금 우리에게 당시의 시대상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더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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