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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원나라 과거에 합격한 인재, 고려에서 성균관을 중건하다

1328년(충숙왕 15) ~ 1396년(태조 4)

이색 대표 이미지

이색초상(목은영당본)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색(李穡)은 고려 말인 1328년(충숙왕 15)에 출생하여 조선 초인 1396년(태조 5)에 타계한 유학자이자 문신(文臣)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이색이 왕성한 정치적 활동을 펼치던 시기는 100년 가까이 중국을 지배하던 원(元)이 쇠락하고 신흥 왕조인 명(明)이 대륙의 패권을 장악해가던 때였다. 이와 맞물리며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의 등장과 함께 원의 속박 하에 미약해졌던 왕권(王權)을 강화하고, 원에 편승해 부와 권력을 탐하던 무뢰배들을 숙청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등 커다란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색은 이러한 변혁의 시대를 가로질러 살며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공세에 고통을 받았으나 끝내 고려에 대한 절의를 버리지 않았던 그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충성과 지조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2 출생에서 출사(出仕)까지

이색은 1328년(충숙왕 15)에 정동행중서성낭중(征東行中書省郞中)·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이곡(李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곡은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서 장원급제를 한 후 원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고려인이라는 약점을 딛고 차석을 한 당대(當代)의 명유(名儒)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진 학문을 접할 수 있었던 이색은 14세의 나이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명성을 떨쳤다. 1348년(충목왕 4)에는 이곡이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에 임명되자, 조관(朝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원에 입국하여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이 되었다가 3년 만에 고려로부터 부친상(父親喪) 소식을 전해 듣고 귀국하기도 하였다.

이색이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고려에서는 유신(儒臣)들의 지지 하에 공민왕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한다. 당시 고려는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의 연이은 실정(失政)으로 국내 정치가 문란해져 그 어느 때보다도 개혁에 대한 열망이 커져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이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젊고 인망 있는 국왕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색은 상중(喪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에 대한 포부를 담아 상소를 올렸다. 당시 그가 올린 상소문에는 토지·군사·교육·불교 등 각 분야에서 고려가 당면한 과제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우선 이색은 심각한 토지겸병 문제를 지적하며 국가에서 권세가들이 불법적으로 탈취한 토지를 바로잡고 새롭게 개간한 토지의 넓이를 측량해 조세를 부과할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으로 왜구(倭寇)가 빈번히 출몰하고 중국 대륙에서 원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 무과(武科) 설치를 비롯한 군사제도 개편을 건의하였다. 마지막으로 지방 향교(鄕校)와 중앙 학당(學堂)의 인재들을 성균관(成均館)에 진학시켜 이들을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해 관료를 선발할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며 도첩제(度牒制)의 시행을 촉구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마친 이색은 1353년(공민왕 2)에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과 동지공거(同知貢擧) 홍언박(洪彦博)이 주관하는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시험에서 그와 함께 등제하여 이제현의 문생(門生)이 된 인물로는 박상충(朴尙衷), 정추(鄭樞), 권중화(權仲和)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이색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려 말 개혁정치를 이끈 주역이 되었다.

과거 급제 직후 숙옹부승(肅雍府丞)에 임명된 이색은 같은 해 가을 정동행성 향시에 급제해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된 뒤 원으로 가서 제과에 응시하였다. 이듬해인 1354년에는 회시대책(會試對策)과 전시(殿試), 정시(庭試)에서 급제하여 주목을 받았다. 당시 시험을 주관하던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으로부터 극찬을 받아 칙지(勅旨)로 응봉(應奉)·한림문자(翰林文字)·동지제고겸국사원편수관(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았다.

3 고려말 정치·학문의 중심으로 부상

1355년(공민왕 4)에 원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어 고려와 원 두 조정을 섬기며 관인생활을 지속하던 이색은 이듬해인 1356년(공민왕 5)에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려로 돌아와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임명되었다. 곧이어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옮겨가 7년 동안 공민왕을 곁에서 모셨던 그는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난(紅巾賊-亂)으로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공민왕을 안동(安東)까지 호종하여 홍언박, 정세운(鄭世雲), 원송수(元松壽) 등과 함께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 1등에 책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을 보필하며 정치적 주역으로 성장해가던 이색은 1363년(공민왕 12) 원으로부터 정동행중서성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제수 받은 이후 명실 공히 고려 유학의 주축으로 부상하게 된다.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을 재건한 공민왕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였던 이색으로 하여금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직하게 하였다.

이색은 생원(生員)의 수를 늘리고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에게 교관(敎官)을 겸직시킴으로써 성균관의 중흥을 도모하였다. 『고려사』 이색 열전(列傳)에 따르면, 이색은 성균관 학식(學式)을 고쳐 생원들이 경전을 나누어 매일 명륜당(明倫堂)에서 수업을 받고 수업이 끝난 뒤에도 토론을 이어가도록 하였다. 이에 배우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감흥을 나눔으로써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이 비로소 흥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국공주의 죽음을 계기로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후퇴하였을 때 이색은 국왕의 전횡을 막고 고려의 내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힘썼다. 당시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서거한 이후 승려 출신인 신돈(辛旽)을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임명해 국정 전반을 위임한 뒤 칩거생활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러한 처사는 곧바로 유신(儒臣)들의 반발을 야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색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동년(同年) 정추(鄭樞)이다. 1366년 좌사의(左司議) 정추는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을 탄핵하고 그에게 국정을 위임한 공민왕의 잘못을 논하였다. 이에 분노한 공민왕은 이색으로 하여금 정추와 이존오를 단죄하도록 하였는데, 이색은 간관을 죽이는 것을 옳지 못하다는 것을 역설하여 이들을 구명하였다. 또한 1368년(공민왕 17)에는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이 지나치게 호화롭다는 것을 이유로 건립을 반대하다 공민왕으로부터 중죄를 받게 되었는데, 이색은 그의 죄목이 크지 않다는 것을 간언함으로써 유탁이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민왕이 이색의 공정한 처사를 믿고 그를 중용하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심지어 공민왕은 1371년(공민왕 20)에 이색이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관직을 내려놓고 떠나자 이듬해 기복(起復)시켜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삼아 그를 최측근에 두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이색은 병을 이유로 사임하여 1382년(우왕 8)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기 전까지 관직을 멀리하였다.

4 이성계 일파와의 정치적 대립

사료상 이색과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입장 및 행보 차이는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계기로 조금씩 표면화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388년(우왕 14)에 명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해오자, 명의 독단적 처사에 분노한 우왕(禑王)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이성계에게 군대 통솔을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성계는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 둘째, 농번기인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모든 군대가 원정을 떠나게 되면 왜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다. 넷째,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반면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실린 졸기(卒記)에 의거할 때 이색은 요동정벌에 대해 뚜렷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에서는 우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대부분의 신하가 요동정벌을 찬성하는 가운데 이색 또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랐다고 한다. 그는 자제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의리에 반하는 논의를 하였다”고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수준의 소극적 저항만을 보여주었다. 이 일화는 향후 이색의 행보가 이성계 일파의 적극적인 개혁운동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주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색과 이성계 일파의 갈등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직후 새로운 국왕을 추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절정에 이른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조민수(曺敏修)와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직전 신돈의 아들인 우왕을 몰아내고 다시 왕씨의 후손을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실제로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한 직후 이성계는 애초의 결의대로 종실 가운데 적임자를 골라 왕으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조민수는 이인임(李仁任)이 자신을 천거해주었던 은혜를 생각하여 그의 족친(族親)인 근비(謹妃) 이씨의 아들 창(昌)을 국왕으로 추대하길 도모하였다. 이에 다른 장수들이 자신의 뜻에 거스를 것을 염려한 조민수는 ‘유종(儒宗)’이라 칭송받던 이색을 찾아가 후왕 문제를 논의하였고, 이색 또한 “마땅히 전왕의 아들로 후계를 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창왕의 즉위를 지지하였다.

이색의 이러한 처사는 위화도 회군의 정치적 명분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였으며, 동시에 그를 이성계 일파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만들었다. 창왕은 즉위 직후 이성계를 수시중(守侍中)에 임명함과 동시에 이색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음으로써 이성계 일파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색에게 정치적으로 의존하였다. 이색 또한 자신에게 부과된 정치적 사명을 명확히 이해하고 이성계 일파와의 갈등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1388년(우왕 14)에 명 남경(南京)으로 사행(使行)을 떠나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을 서장관(書狀官)으로 동행시킨 일화는 이색 스스로가 이성계에 의한 정변이 다시 한 차례 발생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이색은 이성계의 위세가 나날이 높아져 자신이 귀국하기 전 변란이 발생할 것을 염려해 이성계의 아들 중 한 명을 인질로 요구하였다.

이색과 이성계 일파는 토지제도 개혁을 둘러싸고 다시 한 차례 첨예한 대립구도를 보인다. 1389년(창왕 원년)에 들어서며 이성계는 심각한 토지겸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사헌 조준(趙浚)과 함께 본격적으로 사전(私田)을 개혁하고자 하였는데, 이색은 옛 법을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며 이성계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이에 조정 관료들은 토지제도 개혁이라는 안건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이임(李琳)·우현보(禹玄寶)·변안열(邊安烈)·권근(權近)은 이색의 견해에, 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은 조준의 견해에 찬동하였다. 대체적으로 사전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은 권세가의 자제들이었다고 한다.

토지제도의 개혁을 둘러싼 당시의 갈등은 단순히 경제적 이권을 쟁취하기 위한 대립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고려의 정통성과 전통적 질서를 인정하는 세력 대 부정하는 세력 사이의 정치적 대결이었다. 실제로 토지제도 개혁 논쟁을 전후로 관료들 사이의 정치적 입장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 상황에서 이성계 일파는 이색과 그의 당(黨)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1389년(창왕 원년) 3월에는 아버지의 상례(喪禮)를 제대로 치르지 않고 국가가 정한 기복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는 혐의를 씌워 이색의 처조카인 민중리(閔中理)를 탄핵하였으며, 8월에는 사전 개혁을 논의할 때 간관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문익점(文益漸)의 파면을 주장하였다. 이윽고 10월에는 이색의 문인(門人)이자 최측근인 이숭인(李崇仁)에 대한 탄핵이 진행되었다. 간관(諫官) 오사충(吳思忠)을 필두로 하는 이성계 일파는 기복하여 시험관을 맡은 죄, 명에 입조하여 사사로이 매매(賣買)한 죄, 종친을 무함한 죄를 들어 이숭인을 탄핵하였다. 나아가 권근이 이숭인을 비호하기 위하여 움직이자 그에 대한 죄를 물었다.

이색의 최측근이었던 이숭인과 권근에 대한 탄핵은 유신들로부터 명망을 얻고 있던 그의 정치적·사회적 위상을 깎아내리기 위한 행위였다. 이 사건은 실제 이색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오사충의 탄핵으로 인하여 이숭인과 그를 옹호하던 권근이 유배형에 처해진 이후, 이색은 개경을 떠나 장단(長湍)에 은거하게 된다. 창왕이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보내 위로하고 관직에 돌아올 것을 명하였으나 이색은 끝내 복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색이 부재하는 가운데 같은 해 11월, 이성계 일파는 왕씨를 추대한다는 명목 하에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켰다.

5 고려의 멸망과 이색의 정치적 고난

공양왕의 즉위와 함께 이색은 이성계 일파로부터 탄핵을 받아 장단으로 폄척당하고, 이듬해인 1390년(공양왕 2)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귀양을 갔다. 이로써 이색을 향한 정치적 탄압이 가속화된다. 같은 해 5월에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에 몰래 입조하여 이성계가 명을 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밀고하자 이색·우현보(禹玄寶)·권근 등 수십 인은 그들을 사주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청주(淸州)에서 국문을 당하였다. 『목은집(牧隱集)』에 수록된 이색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당시 상당히 가혹한 형벌이 가해져 이색 등 사건 연루자들은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청주에 난데없는 수해(水害)가 발생함으로써 조정에서는 이들을 석방하고 불문에 부쳤다.

공양왕은 비록 이성계 일파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고려 왕실의 유지를 위해 이색과 그의 당을 중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색은 누차 조정으로 소환되었으나 그때마다 정도전·조준 등의 탄핵으로 쫓겨나게 된다. 행장에 따르면, 세간에서는 이러한 이색의 모습을 보며 그를 조롱하기도 하고 그의 안위를 염려하여 출사를 말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색은, “신하의 도리는 오로지 임금의 명령을 따라 부르면 나아오고 물리치면 떠나야 하는 것이다. 죽음도 무릅써야 하는 것이거늘, 왕래하는 것을 어찌 걱정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번거롭게 조정에 나아오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1392년(공양왕 4) 7월에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즉위하자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의 일부 개국공신들은 이색에게 극형을 가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태조(太祖) 이성계는 이색의 인품과 옛 정을 참작하여 번번이 그를 구명하였고, 나아가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여 친구의 예로써 대접하였다. 이후 1396년(태조 5) 5월에 조선왕조에서의 출사를 거부하고 산천을 유람하며 살아가던 이색은 여강(驪江)으로 피서를 가던 도중 병을 얻어 69세의 나이로 작고한다. 이색의 부음을 전해들은 이성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문정공(文靖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비록 이색은 창왕의 즉위 이후 연이은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활동이 제약되었고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에도 직접적으로 정치 일선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사후 조선왕조의 정치와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남은 등 이색과 대척점에 서있던 인물들이 숙청되고 이색의 최측근이었던 권근이 새로운 정치주역으로 부상함으로써, 이색의 학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추숭(追崇)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태종(太宗) 이방원의 즉위 이후 이색은 ‘동방(東方)의 대유(大儒)’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학문은 도학(道學)의 중심을 위치하게 되었다. 동시에 고려에 대한 절의를 버리지 않았던 그는 조선전기 사림(士林)에 의해 절의와 지조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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