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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李承休]

불운했던 정치가, 역사를 남겨 불멸을 얻다

1224년(고종 11) ~ 1300년(충렬왕 복위2)

이승휴 대표 이미지

제왕운기(帝王韻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승휴는 고려의 국제적 위상과 내정을 바로세우기 위해 고심하였던 고려후기의 대표적 문신이다. 1224년(고종(高宗) 11)에 출생하여 1300년(충렬왕(忠烈王) 26)에 사망한 그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고려의 대내외적 상황이 격변하던 시대를 살았다. 그전까지 중국 왕조들과 조공-책봉 관계를 이어나가면서도 ‘해동(海東)’이라는 독자적 세계 속에서 황제국 제도를 운용하던 고려는 그가 생존하던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원(元)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맞닥뜨리고 ‘부마국(駙馬國)’으로서 원 중심의 질서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고려 내부에는 원 황실의 권위에 기대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도 출현했다. 이처럼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이승휴는 언관(言官)이라는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국왕과 관리들의 비행을 비판하였다. 나아가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시기에는 저술활동을 통해 세간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무너져가는 고려의 기강을 다잡았다.

2 성장배경과 초년의 삶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며, 출신지역은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嘉利縣)이다. 최씨 무신정권이 고려의 국정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난 그는 사료에서 확인되는 정황상 사회적 명망이나 위세를 갖춘 집안의 출신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이승휴 열전에는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가계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입신양명하였던 먼 선조 혹은 시조에 대한 기록조차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 알려진 가리 이씨의 계보는 이승휴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승휴는 불우하게도 십대 초반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다행히 친척 어른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당당히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이후 그가 관직에 나아가기 까지는 십여 년이 걸렸다. 급제 후 어머니를 뵈러 삼척(三陟)에 내려갔을 때 하필 몽골군이 침공하여 고향을 떠날 수 없었고, 이후 좌주(座主)와 그동안 돌봐주시던 친척 어른이 돌아가시는 불운이 겹쳤다. 관직 수여를 권력자들이 좌우하던 당시의 현실에서 중앙 정계에 변변한 연줄을 가지지 못했던 이승휴는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삼척에 머물며 직접 농사를 짓고 어머니를 봉양하며 십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승휴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본 안집사(安集使) 이심(李深)이 개경에 갈 것을 권유하자 뒤늦게야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적극적으로 관직을 구하였다. 그 결과 당대의 실권자였던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의 눈에 들어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에 임명되었으며, 마침내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가 되어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40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3 정치적 활동과 좌절

몽고와의 전쟁과 강화, 삼별초(三別抄)의 난 등 국가의 존망을 다투는 굵직한 사건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승휴는 백성들의 고통을 감소시키고 국가를 보존하기 위하여 여러 계책들을 고심하였다. 삼별초의 난 중에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부터 탈출하여 적을 고립시킬 수 있는 방안을 왕에게 제안하였고, 군수물자를 핑계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는 지방관들의 행태를 지적하며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세자가 원 황실의 부마가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파견되어 원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황제로부터 고려의 풍속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이승휴는 고려가 중요한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나라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왕성히 활동하였지만, 그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간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파직되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감찰어사(監察御史)·우정언(右正言)·우사간(右司諫)을 역임하는 동안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시정의 득실과 탐관오리의 죄상을 과감하게 밝히며 내정을 바로잡는 일에 전념하였다. 심지어 전중시사(殿中侍史)를 맡았던 1280년(충렬왕 6)에는 진척(陳倜)·문응(文應)·심양(沈諹)과 함께 ‘국왕이 사냥을 일삼고 저속한 자들과 어울린다는 것’을 문제 삼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로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승휴는 조정에 복귀하지 못한 채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총망라한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이 시기에 탄생한 대표적 역작이다. 이 외에도 이승휴는 불교에 심취하여 『내전록(內典錄)』를 짓거나 원에 다녀온 경험을 살려 『빈왕록(賓王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4 뒤늦은 정치적 부활

1298년(충렬왕 24) 2월, 충선왕(忠宣王)이 아버지 충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야 비로소 그에게 관직으로 돌아오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선대의 권신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 했던 충선왕은 서한으로 간곡한 마음을 표현하며 이승휴에게 조정에서 복무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의 아들 이임종(李林宗)으로 하여금 몸소 아버지를 모시고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승휴가 돌아오자 그를 사림시독·좌간의대부(詞林侍讀·左諫議大夫)로 삼은 뒤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으로 충원하였다. 언관으로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던 경력과 『제왕운기』를 편찬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대표적인 문한직(文翰職)을 모두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미 70세의 나이를 훌쩍 넘긴 이승휴는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조정에서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충선왕을 보필하며 원과 고려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에 충선왕은 거듭 더 높은 관직을 제수하며 그를 중용하였다. 충렬왕을 지지하는 세력과 충선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끊임없이 원 황실에 상대를 폄훼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충선왕은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이승휴에게 많은 자문을 구하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이승휴에게 충분히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반 년 동안 조정에서 헌신한 이승휴는 고령으로 인하여 퇴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충선왕이 폐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함에 따라 두 번 다시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그로부터 2년 뒤인 1300년(충렬왕 26)에 이승휴는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5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역사적 의의

이승휴는 고려에 대한 원의 내정간섭이 심화되는 과정, 홍다구(洪茶丘)와 같은 인물들이 원에 아부하며 고려를 위기에 빠뜨리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충렬왕의 분노를 피해 두타산에 은거하던 20년가량의 시간 동안 역사서 집필에 전념하였다.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하락하고 고려인들이 이합집산 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우선 『제왕운기』를 통하여 이승휴는 중국과 고려의 역사를 별개로 보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총망라한 이 책에서 그는 신화시대부터 원에 이르는 중국사를 상권에서 다루고 단군조선(檀君朝鮮)부터 충렬왕 당대까지의 한국사를 하권에서 다룸으로써 양자를 분리시켰다. 또한 고려의 시조로 단군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양자가 뿌리부터 달랐음을 강조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통합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가 통일신라와 후삼국을 거쳐 고려로 이어져온 과정을 상술하였으며, 무엇보다 발해(渤海)까지도 서술대상에 포함시켜 그 정통성이 고려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피력하였다. 요동과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수많은 국가들이 고려라는 하나의 나라 속에 녹아들어 독자의 세계를 구성하였다는 역사관을 뚜렷하게 드러낸 것이다. 특히 현전하는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켜 요동 강역이 고려의 역사무대임을 명시하였다는 측면에서 그의 기획은 큰 의미를 지녔다.

원과의 관계가 긴밀해짐에 따라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사람이 속출하였던 이 시기, 이승휴는 비록 현실정치로부터 멀어졌으나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제왕운기』는 이러한 고심의 흔적을 담았던 이승휴의 역작으로서, 그가 생존하였던 시기의 시대적 상황과 당시에 요구되었던 역사의식 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재까지 큰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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