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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

고려의 지식인, 원제국의 수도에서 학문을 논하다

1287년(충렬왕 13) ~ 1367년(공민왕 16)

이제현 대표 이미지

이제현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제현(李齊賢)은 원(元) 제국의 힘이 고려를 잠식해가던 시기 고려 왕조의 명맥을 지키기 위하여 헌신한 정치가이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시대사조로 부상하고 있던 성리학이 고려 지식인 사회로 확산되어 보다 높은 이해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조한 유학자이기도 하다. 원 내부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고려국왕의 즉위·폐위가 결정되고, 개인의 이득을 위해 고려를 원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했던 세력이 활보하던 파행적 상황 속에서 이제현은 중요한 정치적 국면이 나타날 때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고려후기 역사에 의미 있는 한 획을 그었다. 실로 고려후기 역사는 정치·사회·문화 어느 한 분야도 이제현이라는 인물을 배제한 채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출생배경과 입신양명의 과정

이제현의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또는 역옹(櫟翁)이다. 초명은 지공(之公)이었으나 후에 제현으로 개명하였다. 이진(李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총명함을 드러내어 15세의 어린 나이로 정선(鄭僐)이 주관한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이색(李穡)이 찬술한 「이제현묘지명」에 따르면, 당시 과거에 응시한 사람 모두 재능을 뽐내며 자웅을 겨루었으나 이제현의 글을 본 이후에는 기세가 꺾여 함부로 최고를 자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같은 해 5월, 이제현은 밀직사사(密直司事) 권보(權溥)과 좌부승지(左副承旨) 조간(趙簡)이 주관하는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 시험은 향후 그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킨다. 당시 지공거(知貢擧)로서 이제현을 선발하였던 권영은 개명한 이름인 권보(權溥)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데, 대대로 고관을 역임하고 유력한 가문들과 혼인해 온 권세가였다. 훗날 여섯 명의 아들과 세 명의 사위 모두 군(君)에 봉해져 9봉군(封君)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정도로 상당한 정치적·사회적 위상을 갖고 있었던 권영은 이 시험을 계기로 이제현을 눈여겨보고 그에게 자신의 둘째딸을 출가시켰다.

같은 시험에 급제한 노승관(盧承綰)·이언승(李彦昇)·박원계(朴元桂)·전신(全信)·민상정(閔祥正) 등의 여타 문생(門生)들을 제치고 비교한 한미한 가문 출신인 이제현만이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전통적으로 고려는 한 개인이 자신의 뛰어난 역량에 의거해 과거를 통과하고 관직에 진출하였을지라도 종래의 지배가문과 혼인이나 혈연으로 얽히지 않는 이상 최상층으로의 진출이 어려운 사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현은 권영의 사위가 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는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사헌규정(司憲糾正)·선부산랑(選部散郞)·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량을 키워갔다.

3 고려후기 학문의 선도

권영의 사위가 되면서 이제현은 출세를 보장하는 가문 배경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의 학문적 역량을 증진시키기에 유리한 지적 환경까지 얻게 된다. 권영 또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인재로, 원의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한 안향(安珦)이 그의 좌주(座主)였다. 그는 『사서집주(四書集注)』의 발간을 제안하고 유교적 효의 보급을 목적으로 『효행록(孝行錄)』을 편찬하는 등 고려 지식인의 성리학 이해를 제고하기 위한 학술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사위인 이제현 또한 권영의 아들인 권준(權準)과 함께 이들 사업에 참여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의 복위와 함께 이제현은 본격적으로 고려후기 학문을 선도하기 시작한다. 원 세조(世祖)의 외손자였던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에게 왕위를 돌려준 뒤 원 조정에 머물며 황위계승 분쟁에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마침 원의 내란을 진정시키고 무종(武宗)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국왕으로 복위하게 된다. 동시에 원으로부터 심왕(瀋王)이라는 봉호를 받은 그는 즉위기간 대부분을 원에 머물며 고려의 유능한 학자들을 불러들여 신진학문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혜택을 향유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제현이다.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원의 수도에 머물며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원에 와있는 인물들 모두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데 지금 나의 가까이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수치다”라 한탄하면서 이제현을 원으로 불러들였다. 이로써 이제현은 요수(姚燧)·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와 같은 당대 최고의 원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며 나날이 학문을 일취월장시킬 수 있었다.

고려에 있던 충숙왕 또한 이제현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지공거로 임명하였다. 1320년(충숙왕 7)에 박효수(朴孝修)와 함께 시험을 주관한 이제현은 최용갑(崔龍甲)·백문보(白文寶)·이곡(李穀)·윤택(尹澤)·안보(安輔) 등을 선발하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1353년(공민왕 2)에 다시 한 차례 지공거에 임명된 이제현은 동지공거(同知貢擧)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이색(李穡)·정추(鄭樞)·권중화(權仲和) 등을 선발하기도 했다. 당시 이제현에 의해 선발되어 그의 문생이 된 자들은 모두 고려 말 정치·사상을 서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인물들이다. 공민왕대 후반에 정권을 장악한 신돈(辛旽)은 “유생들이 좌주·문생을 칭하며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니 이제현의 문생이 그러한 자들입니다”라고 공민왕에게 참소한 바 있다.

이는 다수의 유학자들이 신돈의 전횡을 비판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신돈이 이제현과 그 주변 인물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악의적으로 한 말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지만, 분명 이제현과 그 문생들의 영향력이 고려 말에 상당히 비대해졌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4 고려왕조의 수호를 위한 활동

충선왕의 폐위와 복위 과정이 보여주듯, 이제현이 활동하던 시기는 원 내부의 정세변동에 따라 고려 정국이 요동치는 상황이 잦았다. 일례로 1320년(충숙왕 7)에 원에서 충선왕에게 적대적인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충선왕은 참소를 받아 토번(土蕃)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에 이제현은 충선왕을 몸소 찾아가 비통한 심정을 전하고, 한 나라의 상왕(上王)이 척박한 외지로 귀양 가는 비참한 현실을 애통해하며 여러 수의 시를 남겼다. 또한 그는 개인의 안보를 위해 어떤 세력과 결탁해야 하는 지만을 궁리하던 대다수의 신하와 달리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원에 머물며 승상(丞相) 바이주(拜住)에게 글을 올려 충선왕의 귀환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321년(충숙왕 8)에는 충선왕의 조카인 심왕(瀋王) 왕고(王暠)가 원 황제에게 충숙왕을 참소하여 충숙왕마저 원에 억류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충선왕은 아들인 충숙왕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국왕의 자리는 충숙왕에게, 원으로부터 받은 심왕이라는 봉호는 조카 왕고에게 물려주었는데, 그것이 이때에 이르러 치명적 결과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원 황실과 통혼하여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고려국왕이 될 기회를 틈틈이 노리고 있었던 왕고는 원 황제에게 충숙왕이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참소하여 그의 귀국을 막았다. 이로 인하여 고려 지배층은 국왕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누구를 지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분열하게 된다.

그 결과 1323년(충숙왕 10)에는 심왕을 지지하던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에 의해 제2차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발생하는 등 고려의 정세는 급격하게 악화 일로를 걸었다. 입성책동이란 고려가 갖고 있는 독립된 왕조로서의 지위를 박탈하고 고려를 원의 지방행정기구인 성(省)으로 만들려는 운동이다. 원이 만약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면 앞으로 한반도는 영영 중국의 직할지가 될 수도 있었다. 이제현의 정치적 역량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제현은 400년간 이어져 내려온 고려의 장구한 역사와 원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글을 지어 원에 올림으로써 유청신·오잠 등의 계획을 저지하였다. 이때 이제현이 올린 글은 바이주·왕약(王約)과 같은 원 고위관료의 지지를 끌어내어 입성론을 그치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1339년(충숙왕 후8)에 충숙왕이 서거한 직후 왕고가 다시 한차례 고려의 왕위를 넘보고 충혜왕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조적의 난(曹頔-亂)이 발생하는데, 이제현은 충숙왕의 적자인 충혜왕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342년(충혜왕 3)에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하고 난 이후에도 원의 세력에 편승하여 고려 왕실을 뒤흔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제현은 전통적인 왕위계승 원칙을 고수하는 입장에서 왕조의 안녕을 위해 힘썼다. 원 황제의 명으로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에 끌려가게 된 이후에도 권한공(權漢功)·이능간(李凌幹)과 같은 대다수의 신하들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느라 침묵하고 있을 때, 이제현은 김영돈(金永暾)·김륜(金倫)과 같이 충혜왕을 구명하였다.

「이제현묘지명」에서 이색은 그가 기존 질서를 극단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보다 이전의 것을 정비하여 활용하려는 성향을 지녔다고 평가하였는데, 앞서 서술한 사례들처럼 고려 왕조의 전통적인 왕위계승 원칙을 지키고 이에 기반하여 등극한 국왕을 보호하려고 하였던 이제현의 모습을 볼 때 이색의 평가는 비교적 정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5 고려의 개혁정치를 향한 열망과 좌절

충혜왕의 뒤를 이어 그의 어린 아들인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이제현은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제수 받고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때의 인사는 고려에 개혁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원 황제의 의중에 따라 단행된 것이었다. 충숙왕·충혜왕 시기 입성책동과 심왕옹립운동으로 인해 국왕의 폐위와 복위가 난잡하게 이루어졌고, 더욱이 충혜왕이 사적인 이익 추구를 위해 중앙정부를 기형적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 고려의 내정은 여러 측면에서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원 황제의 의중을 읽은 이제현은 승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에 글을 올려 개혁정치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전반적으로 그가 쓴 글은 국가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원의 비호 하에 양민(良民)들에게 해악을 끼쳐왔던 세력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그는 국왕이 자주 조회에 참석하여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펼칠 것, 정방을 폐지하여 인사권을 바로잡을 것, 지방관의 자질을 높일 것, 사치스러운 풍속을 바로잡을 것, 권세가들이 빼앗은 토지를 돌려줄 것 등을 역설하였다.

충목왕 즉위년에 제출된 이제현의 글은 1347년(충목왕 3)부터 시작되는 정치도감(整治都監) 활동의 아웃라인을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의 순제(順帝)가 폐정개혁을 명함에 따라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旽)을 중심으로 설치된 정치도감은, 지방관의 횡포 및 권세가들의 토지점탈을 시정하고 악질적인 부원배(附元輩)들을 처단하는 활동에 집중하였다는 측면에서 2년 전 이제현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던 일련의 개혁들과 일맥상통한다. 사실상 정치도감의 총책임자였던 왕후는 권영의 아들로서 충선왕의 양자가 된 인물로, 이제현과는 처남·매부 관계였다. 따라서 사료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정치도감 중심의 개혁정치가 이제현과 깊은 관련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한 타당성을 갖는다.

이제현의 열망과 달리 정치도감의 활동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다. 기황후(奇皇后)의 친족이었던 기삼만(奇三萬)이 정치도감에서 문초를 받던 중 옥사하자 원에서 이를 문제 삼아 담당 관리들을 처벌하였던 것이다. 왕후·김영돈 등의 총책임자들은 처벌을 면하고 하급실무자들이 주로 고초를 겪었으나, 이후 원의 개입이 잦아지면서 결국 정치도감 활동은 흐지부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는 원의 통제 하에서 고려의 개혁정치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제현이 활동하던 당시, 고려 내정의 본질적인 변화는 원과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개혁정치를 향한 이제현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다. 젊고 유능한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이제현은 공민왕대 초기 정국에 참여하며 그간 목표로 하였던 일들을 수행해 나갔다. 공민왕이 아직 고려로 돌아오기 이전, 그는 국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노영서(盧英瑞)·배전(裴佺)과 같은 부원배들을 처결하고 시급한 민생 현안을 처리하였다.

하지만 충숙왕 이후의 연이은 실정(失政)으로 고려의 정치적 기반이 전반적으로 취약해진 상황이었기에 공민왕과 이제현 모두에게 개혁정치를 수행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공민왕은 이제현과 같은 유신(儒臣) 세력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으나, 실질적으로는 아직 광범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에 머물던 시기부터 자신을 호종해오던 측근세력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또한 대다수의 유신들이 여러 권문세족(權門勢族)들과 복잡한 혈연·인척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공민왕의 입장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제현조차도 그 자손들이 공민왕의 최대 정적이었던 기황후 가문과 긴밀한 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기황후가 원 황제의 정비(正妃)가 되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원 조정의 시각에서 볼 때 기씨 가문은 고려 왕가만큼의 위상을 가진 셈이었다. 이는 곧 공민왕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었으며, 이제현은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였기에 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로부터 조일신(趙日新)·김용(金鏞)과 같은 인물들이 정권을 농단하게 되고, 이제현은 정승(政丞)의 자리에 오르더라도 곧바로 사직하고 떠나는 등 공민왕이 일정한 거리를 두며 신중하게 현실에 대처하기 시작하였다.

6 이제현의 죽음과 그의 유산(遺産)

공민왕의 측근세력들을 피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이제현은 뚜렷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는다. 공민왕이 그의 딸을 혜비(惠妃)로 맞아들이는 등 그를 존숭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제현은 1360년대에 들어서면서 복잡한 정계에서 한 걸음 떨어져 유유자적하였다.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신돈이 등장하여 정국을 좌우했을 때에도 그로 인한 파행을 염려하고 공민왕에게 신돈을 멀리하라 조언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사회에서 이제현의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우선 그의 문생이었던 이곡·백문보·이색 등이 공민왕대를 거치며 고려후기 정치·학문의 주축으로 부상하였다. 이들은 신돈을 견제하며 새로운 유교 정치를 구현해나갔다. 다음으로 이제현은 다수의 역사서를 남겼는데, 그가 증수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과 직접 찬술한 『충렬왕실록』·『충선왕실록』·『충숙왕실록』 등은 당대사(當代史)에 대한 지식인들의 역사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고려후기 역사에 의미 있는 한 획을 그었던 이제현은 1367년(공민왕 16)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공민왕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공민왕 사후 이제현은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문을 모은 『익재난고(益齋亂藁)』는 당대인들은 물론 조선시대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히며 시대를 초월하여 이제현의 문화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심지어 조선후기인 1692년(숙종 18)에는 그의 본관인 경주(慶州)에 그의 학문과 덕행에 대한 추모를 목적으로 하는 구강서원(龜岡書院)이 건립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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