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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

난세 속의 어린 왕, 꿋꿋이 헤치고 나아가다

1109년(인종 4) ~ 1146년(인종 24)

인종 대표 이미지

고려 인종대왕 시책(高麗 仁宗大王 諡冊)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인종(仁宗)은 고려의 제 17대 국왕으로, 예종(睿宗)과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초명은 구(構)였으나 후에 해(楷)로 바꾸었고, 자는 인표(仁表)이다. 1109년(예종 4)에 태어나 1115년(예종 10)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부왕이 사망하면서 1122년(인종 즉위년)에 즉위하였고, 1146년(인종 24)에 사망하였다. 능은 장릉(長陵)이다.

14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38세로 세상을 떠났던 인종. 그의 삶은 여러 번의 큰 파랑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러한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려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고려의 운명을 되살려 다시 반석에 올리려 다양한 시도를 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삶에 대해 살펴보자.

2 소년왕, 권력을 둘러싼 소용돌이에 빠지다

1122년(예종 17) 4월, 예종이 세상을 떠났다. 44세의 아직 한창 나이였다. 그의 후계자로는 이제 14세인 왕태자 왕해가 있었다. 그러나 시국은 어수선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당시 예종의 여러 동생들이 차기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를 예감했는지, 예종은 병석에서 “태자가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덕행을 오랫동안 갖추었으니 여러 공(公)들이 한 마음으로 도와서 조상들의 기업[祖構]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어린 왕태자를 왕위로 무사히 올린 것은 그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이었다. 당시에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책략으로 왕위를 노렸는지, 이자겸이 어떻게 왕해를 즉위시켰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왕위를 둘러싼 모종의 치열한 암투가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즉위한 지 8개월이 지난 12월에 이자겸은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를 추방했다. 아울러 한안인(韓安仁), 문공미(文公美) 등 유력한 정치 세력들도 축출되었다. 조정의 권력은 급속하게 이자겸 쪽으로 기울었다.

즉위 후 인종은 외조부에 대해 파격적인 우대 조치를 추진했다.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恊謀安社功臣 守太師 中書令 邵城侯)라는 높은 지위를 내린 것은 물론, 석 달 뒤에는 이자겸의 대우를 다른 관리와 다르게 우대할 방안을 논의해 아뢰도록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서(書)나 표문을 올릴 때에 신이라 칭하지 않고, 또한 임금과 신하가 크게 잔치를 할 때 백관과 더불어 뜰에서 하례하지 않고 곧바로 〈임금의〉 장막[幕次]에 나아가 절하며, 임금께서는 답례로 절을 한 이후에 전각에 앉도록 하십시오.’라고 건의하였다. 이는 김부식의 반대 논리에 막혀 실현되지 못했으나, 당시 이자겸이 어느 정도의 위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후에도 이자겸은 인종으로부터 거듭 높은 지위와 포상을 받았고 숭덕부(崇德府)를 열었다. 점차 그는 국왕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자 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자신의 두 딸, 즉 인종의 이모 둘을 인종과 다시 혼인시키기까지 하였다. 권력 독점을 위한 이자겸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이러한 외조부의 곁에서 인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세월이 흘러 점차 청년이 되면서, 인종은 이자겸의 행동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1126년(인종 4) 2월, 인종의 측근인 김찬(金粲), 지녹연(智祿延) 등이 무력으로 거사를 일으켜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당시 인종이 김인존(金仁存) 등에게 의견을 구하고, 이들이 거사에 반대해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인종 본인이 상당히 깊숙이 거사에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인종도 18세. 더 이상 어린 소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이자겸의 사돈이자 여진 정벌 당시의 전쟁 영웅인 척준경(拓俊京)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자겸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척준경은 수하들을 모아 무장시키고 궁궐을 포위하였다. 인종은 담대하게 직접 신봉문(神鳳門)에 나아가 군사들을 해산시키려 시도했으나 척준경의 호령으로 실패했다. 척준경은 궁궐에 불을 질렀고, 인종은 할 수 없이 측근들과 궁궐을 나와 이자겸에게 유폐되다시피 하였다. 참담한 실패였다. 인종을 따랐던 수많은 신하들과 군사들이 이 때 살해당했고, 인종 본인도 이자겸의 집 서원(西院)에 머물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최악의 상황이었으나, 인종은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아직 남은 측근인 최사전(崔思全)의 진언을 받아들여 척준경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권력은 나누어 가지기 어려운 것. 결국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인종은 척준경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척준경의 세력마저 숙청하여 모두 유배를 보냈다. 1127년(인종 5) 3월의 일이었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 지 1년여 만에 그 세력을 모두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종은 서경(西京)에서 유신(惟新)의 뜻을 담은 교서를 반포하며 새로운 정치 구현을 선포하였다.

3 고려의 운명, 어떻게 해야 피어날 수 있을까?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며 국내 정치의 혼란상은 다소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려에는 사실 더 심각한 문제가 대두하고 있었다. 하얼빈 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운 완안부(完顔部) 여진은 이제 금(金)을 세워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금나라는 1125년(인종 3)에 거란을 멸망시켰다. 고려에 대해서는 사대를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126년(인종 4) 3월에 금에 대해 사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급기야 1127년(인종 5) 3월에는 금에서 충성을 다짐하는 맹세의 글을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금나라의 기세는 더욱 강성해져, 1127년(인종 5) 9월에는 북송의 수도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을 사신을 통해 알려왔다. 결국 1129년(인종 7) 11월에 고려는 “삼가 군신(君臣)의 의리에 맞추어 맹세하고 대대로 번병(藩屛)의 직책을 수행할 것입니다. 충성스런 마음은 밝은 해와도 같습니다. 만약 제가 마음이 달라져서 변한다면 신이 죽음을 내릴 것입니다.”라는 글을 보내야 했다.

예종대의 여진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이제는 금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게 된 현실에 대해 많은 고려인들은 불만을 가졌다. 한편으로는 거란과 북송을 무너뜨린 금의 창끝이 고려로 향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답답하고 분한 현실 속에서,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등장하였다. 바로 묘청(妙淸)이었다.

묘청은 서경 출신의 승려였다. 그러나 불교적인 색채는 거의 보이지 않고, 풍수지리와 도참 , 음양가(陰陽家) 쪽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정지상(鄭知常)과 백수한(白壽翰) 등의 지지를 받으며 고려 조정에 등장한 묘청은 서경천도를 모든 문제의 해결법으로 제시하였다.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하여 올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묘청 등의 주장을 ‘서경 천도 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정 관리들은 묘청에게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여기에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와 대외 정책관의 차이, 개경과 서경이라는 지역적 연고의 차이, 유학과 풍수도참이라는 사상적 차이 등 여러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다. 근본적으로 묘청의 주장은 그가 처음 제기한 독특한 것이 아니라, 국초부터 내려온 풍수지리적 관념과 서경‧남경 운영을 통한 국운 부흥이라는 관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관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종은 고심했다. 한편으로는 서경에 대화궐(大華闕)을 짓게 하고 여러 차례 행차하는 등 묘청측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도 묵살하지 않고, 천도까지 단행하지는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묘청이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이 1127년(인종 5)이다. 이후 9년에 걸친 천도 논의 과정에서 묘청측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대화궐을 지었으나 국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고, 각종 자연재해가 벌어지는 등의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1135년(인종 13) 1월에 묘청측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다. 인종은 이에 진압군을 파견하여 1년여에 걸친 공방 끝에 서경을 평정하였다. 서경 천도를 통해 불안해진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의 운명을 다시 꽃피울 수 있을까 했을 일말의 기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4 파란의 시대, 태평성대를 향한 꿈

인종의 시대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라는 두 개의 큰 사건으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인종과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고려를 다시 반석에 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당시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해야 하겠으나, 노력했던 모습 자체를 바라보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인종이 당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관대하고 자애로웠다’는 평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인종은 스스로 검소하게 살며 비단 등 화려한 것을 멀리하였고, 흉년이 들면 진휼에 힘쓰고 대비원(大悲院)과 제위보(濟危寶)를 수리하여 질병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죄수에 대한 가혹한 심문을 금지하고 지방관들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도록 감찰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과도한 세금 수취를 금지하고 군사들의 수고를 덜어주며 백성들이 살기 힘겨워 유리(流離)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러한 내용은 특히 그가 서경에서 반포한 유신 교서에 잘 담겨 있다. 비록 다소 상투적인 사항도 있고 얼마나 실행되었는가를 검증할 자료도 없지만, 이러한 점은 조정의 지향점이라는 측면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인종은 문치(文治)를 이루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앙과 지방의 학교 제도를 개편하여 교육을 강화하려 하였고, 신하들과 경연(經筵)을 열어 문풍을 진작시켰다. 과거 시험 제도 역시 한층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예종대에 설치된 무학재(武學齋)를 없애고 무거(武擧)를 정지한 것은 아쉬움을 사는 부분이다.

특히 인종은 서적 편찬을 중시하였다.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여 책을 비치하고,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윤포(尹誧)의 묘지명을 통해 당시 『정관정요(貞觀政要)』의 주해본, 『당송악장(唐宋樂章)』, 『대평광기촬요시(大平廣記撮要詩)』 등 다양한 서적이 편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부식(金富軾) 등에게 명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게 한 것의 의미는 매우 크다. 이는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한반도의 역사서로,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인종은 이러한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여 문치를 추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인종의 시대에 윤언이(尹彦頤) 등의 신하들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이는 묘청 세력의 주장과 중첩되었고, 이들이 제거되는 과정에서 윤언이 등도 함께 정계에서 밀려나는 원인이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크게 안타까워하며, 이런 일을 야기한 묘청을 광망(狂妄)한 자라고 극렬히 비판하였다. 칭제건원이 태평성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고려의 국운이 다시 융성하여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기를 소망했던 인종과 당시 사람들의 소망이 비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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