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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 선죽교에서 쓰러지다

1337년(충숙왕 복위 5) ~ 1392년(공양왕 3)

정몽주 대표 이미지

정몽주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로 시작하는 단심가(丹心歌)의 저자 정몽주(鄭夢周). 명운이 다해가는 고려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충신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정몽주가 활약하던 시기 고려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직면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해오던 원(元)이 쇠락하고 신흥 왕조 명(明)이 대두함에 따라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고려 내부에서는 국정을 쇄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사회적으로는 개혁정치를 갈망하던 신진세력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기득권층과 충돌하였으며, 이들이 근간으로 삼던 성리학(性理學)이 새로운 시대사조로 자리매김한 결과 문화적 차원의 변화 또한 수반되었다. 이처럼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에 선 정몽주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안타까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2 하늘이 내린 신동, 고려 중앙정계에 진출하다

충숙왕(忠肅王) 복위 후 6년째가 되던 해인 1337년, 정몽주는 정운관(鄭云瓘)과 영천(永川)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정몽주 열전에서는 그의 세계(世系)와 관련하여 고려중기 명신(名臣)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을 기록할 뿐,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와 같은 가까운 선조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전해주지 않는다. 아버지 정운관의 행적이나 관력(官歷) 또한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없다. 이로부터 미루어볼 때 정몽주는 오랜 기간 중앙의 고관(高官)을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초명은 몽란(夢蘭)이었으나 두 차례나 이름을 바꾸어 몽주가 되었다. 그를 낳기 직전 어머니 이씨는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깨뜨리는 꿈을 꾸고 아들의 이름을 ‘꿈속의 난’이라는 뜻의 몽란으로 하였다. 당시 그는 비상한 용모를 갖고 태어나 어깨 위에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9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이씨는 다시 한 차례 신이한 꿈을 꾼다.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를 올라가는 꿈이었는데, 이날 이후 몽란은 몽룡(夢龍)이 되었으며 관례(冠禮)를 마친 뒤에는 몽주로 개명하였다.

정몽주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모습을 보였다. 학문적으로 성숙했던 그는 공민왕(恭愍王) 6년인 1357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고, 이로부터 3년 뒤인 1360년(공민왕 9)에는 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 당시 과거를 주관한 사람은 김득배(金得培)와 한방신(韓方信)이었으며, 정몽주의 동기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는 임박(林樸)·문익점(文益漸)·이존오(李存吾)·곽추(郭樞)가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고려의 국정을 바로잡겠다는 지향 속에 정몽주와 뜻을 함께 하면서 정치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였다. 임박은 고려가 명을 배반하고 원에 귀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존오는 공민왕의 폐신(嬖臣) 신돈(辛旽)을 비판하다 불우한 삶을 살았다. 곽추는 정몽주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조선왕조에서의 출사(出仕)를 거부한 채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과거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정몽주는 1362년(공민왕 11)에 예문검열(藝文檢閱)에 임명되었다. 1364년(공민왕 13)에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함께 화주(和州)에서 여진족 장수 삼선(三善)·삼개(三介)를 격파해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서 부각되었으며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 한미한 가문에서 출생한 정몽주는 이와 같이 철저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고려의 핵심인물로 거듭나고 있었다.

3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신기원을 열다

신진세력 육성을 위해 교육제도를 개편한 공민왕은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을 재건하고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직하게 하였다. 이에 이색은 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들에게 교관(敎官)을 겸직시켰는데,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내던 정몽주 또한 발탁되어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었다. 이로써 정몽주는 고려말 유학계의 핵심인물로 거듭난다. 당시 고려에 전래된 경서(經書)는 『주자집주(朱子集註)』가 유일했기 때문에 중국의 선진학문인 성리학(性理學)을 국내에서 연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많은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의 교설을 강론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내용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능가하는 것이었기에 듣는 사람들로부터 자못 의심을 받았다. 이후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고려에 들어오자 유학자들은 비로소 그의 우수성을 알고 감탄하게 된다. 정몽주가 성리학 기본경전인 사서를 이해하는 수준은 『사서통』과 비교하였을 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유학의 대가라 평가받던 이색마저 그를 ‘동방이학의 조종(祖宗)’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정몽주가 살던 시기 성리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가치관을 뒤바꾸는 거대담론으로서 새로운 행동양식을 요구하였다. 정몽주는 몸소 성리학적 가치를 실천에 옮겼다. 성리학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孝) 또한 생전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유교적인 삼년상을 강조하는데, 그는 부모의 상을 당하자 홀로 여막을 짓고 제사를 극진히 모셨다. 불교문화와 토속문화가 강하게 작용하던 고려는 전통적으로 백일 만에 장례를 마치는 문화였다. 부모상을 당한 관료가 관직을 그만두고 삼년상에만 전념해야 하는 중국과 달리 고려는 국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백일의 휴가를 줬으며, 삼년상 중인 관원을 불러들이기 위한 예식인 기복제(起復制) 또한 변종된 형태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정몽주가 보여준 행동은 실로 이례적인 것이었다. 고려 정부는 그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해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주었다.

동시에 정몽주는 혼자만의 실천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 열의를 다하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고려의 상장례(喪葬禮)와 제례는 유독 불교나 토속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정몽주는 처음으로 지배층과 서민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해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나아가 국왕이 불교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 그 파급력을 염려하여 극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공양왕(恭讓王)이 옛 제도를 따라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王師)로 받아들이려 하자 성석린(成石璘)·윤소종(尹紹宗)과 같은 이성계 세력의 유신(儒臣)들이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정몽주 또한 경연(經筵)을 활용하여 국왕에게 불교가 인륜을 저버리는 그릇된 도(道)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성균박사(成均博士) 김초(金貂)가 불교를 비방하는 글을 올려 엄벌을 받게 되었을 때 여타 유신들을 이끌고 국왕을 저지한 사람 또한 정몽주였다.

4 고려말 대외교섭을 책임지다

『고려사』는 “명이 건국되자 정몽주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고려가 가장 먼저 귀부하였다”는 기사를 수록하여 고려와 명의 관계가 시작되는 데에 정몽주의 공이 컸음을 전해주고 있다. 실제로 정몽주는 고려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원과의 관계를 끊고 명과 통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대명외교(對明外交)를 개시하는 단계뿐 아니라 양자의 관계를 지속하는 과정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 사신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정몽주는 명에 들어가 촉(蜀) 지역이 평정된 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374년(공민왕 23)에는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우왕(禑王)이 즉위하였는데, 명의 문책을 두려워한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그 다음해에 명의 사신을 죽이고 원과의 관계를 회복하려하자 임박·박상충·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몽주는 지윤과 이인임에 대한 처벌을 강도 높게 주장하였다.

외교문제를 계기로 이인임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원에 보내는 글에 서명하지 않거나 원사(元使) 영접을 반대한 인물들 모두 국문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이숭인·김구용·임박·정도전·권근(權近)·이첨(李詹) 등 공민왕대를 거치며 고려 중앙정치 전면에 대두하게 된 신흥유신 세력 대부분이 여기에 연루되었다. 정몽주 또한 언양(彦陽)으로 쫓겨났다가 2년 뒤에야 가까스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정몽주가 구비하고 있는 외교능력이 워낙 탁월하였기에 이윽고 고려 조정은 그를 필요로 하게 된다. 1377년(우왕 3)에 왜구(倭寇) 문제로 고심하던 우왕은 정몽주를 정치 일선에 복귀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이로써 일본에 파견된 정몽주는 고려와 일본의 이해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일본의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왜구 방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었다. 또한 탁월한 문예 감각을 활용하여 일본 승려들을 탄복시켰으며 포로가 된 고려인들 수백 명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정몽주는 일본에 끌려간 고려인들을 환국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1380년대에 들어서며 원의 패색이 짙어지자 고려는 명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에 대한 고려조정의 의존도는 점차 높아진다. 당시 고려는 명과의 잦은 분쟁으로 사이가 틀어져 명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세공(歲貢)을 요구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몽주가 직접 황제를 대면해 고려의 상황을 명쾌히 설명하니 상당한 양을 감면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고려 말 외교 분야에서 정몽주는 실로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5 이성계와 정몽주, 공조와 이반의 갈림길에 서다

애초 이성계와 정몽주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1364년(공민왕 13)에 정몽주와 함께 삼선(三善)·삼개(三介) 세력을 제압한 이후 이성계는 그를 신임하여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그를 데리고 갔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를 천거하였다. 정몽주 또한 이성계 세력이 갖는 문제의식에 동조하였다. 온갖 폐단의 온상이었던 불교를 비판하거나 명과의 통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윤소종·정도전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인물들과 뜻을 같이 하였다. 또한 정몽주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창왕(昌王)에게 이성계에 대한 특혜를 요청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일에도 가담한 행적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비록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에서는 이성계와 이색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으나, 분명 공양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과 공조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공양왕의 즉위 이후 이성계와 정몽주는 점차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야욕이 국왕을 교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그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였다. 우선 이초(彛初)의 옥(獄)을 빌미로 이성계 세력이 정적(政敵) 이색을 맹렬히 공격하자 정몽주는 이색·권근을 사면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죄상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다시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다음으로 창왕을 옹립한 죄로 공격받고 있는 이색을 구명하기 위해 공양왕이 조민수(曺敏修)의 협박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동정론을 펴자, 정몽주 또한 그 견해에 동조하였다. 당시 정몽주는 공양왕을 설득하여, 또 다시 이색의 죄를 묻는다면 무고죄로 다스린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거동이 불편한 상황을 틈타 이성계 세력을 숙청하려 한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이래(李來)·권홍(權弘)·유기(柳沂)를 이용해 조준(趙浚)·정도전·윤소종 등을 탄핵하였다. 이어 이들에 대한 극형을 요구함과 동시에 이성계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

정몽주의 시도는 이성계의 아들 태종[조선](太宗)이 개입함에 따라 실패로 끝났다. 일찍이 이방원은 이색보다도 정몽주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예견하였다. 이에 이성계의 동생 이화(李和) 및 사위 이제(李濟)와 모의하여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정몽주가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조영규(趙英珪)·고여(高呂) 등을 보내 그를 암살하였다.

그의 나이 쉰여섯이 되는 해였다. 일설에는 이방원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이성계가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는 사실에 분개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조선 건국 이후 하륜(河崙)이 정종[조선](定宗)에게 이방원이 없었다면 정몽주의 난을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라 이야기한 사실을 근거로 정몽주 암살의 주모자가 분명 이방원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로써 고려는 왕조의 마지막 수호자를 잃었다. 정몽주가 죽은 직후 그를 지지하던 인물들은 모두 국문을 당한 뒤 유배되었으며 이미 정계에서 축출된 이색 세력들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탄압이 가해졌다. 이윽고 같은 해 7월, 이성계 세력의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된 공양왕이 왕위를 내려놓음으로써 고려왕조는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장대한 역사를 끝맺게 된다.

6 역사의 아이러니 : 이방원, 정몽주를 칭송하다.

태종(太宗)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몽주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하였다. 이는 권근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조치였으나, 정몽주 암살의 주범인 이방원이 친히 정몽주를 추증하였다는 것은 분명 현대인의 상식 속에서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사실 정몽주 추증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는 태종 즉위기의 시대적 분위기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해명할 수 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던 시점에 신흥왕조 조선은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권근과 같이 고려 말에 이성계와 반대 노선을 걸었던 인물들이 조선에 출사하였고 왕실의 정통성 또한 전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제 조선은 개혁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상은 절개를 지키며 체제를 수호하는 인물이었다. 정몽주와 길재(吉再)에 대한 평가는 이때부터 달라졌다. 일찍이 이방원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진정한 절개라고 말하며 길재를 충신으로 평가한 바 있다. 고려의 부활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제 그는 충성의 대상이 고려든 조선이든 절개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정몽주에 대한 현창은 세종대(世宗代)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사실상 태종이 정몽주를 추증하였음에도 조정의 신하들은 공공연하게 정몽주를 거론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1430년(세종 12)에 세종이 정몽주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자 시강원(侍講院) 관원이었던 설순(偰循)은 그가 충신이라는 것은 말은 들었으나 국왕으로부터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언급하지 못하였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세종은 선대에 이미 추증하였으니 마땅히 충신의 반열에 넣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길재와 정몽주를 충신도(忠臣圖)에 넣어 신하들을 권면하였다.

이후 조선의 지배층에게 정몽주는 길재와 함께 충신의 대명사로 간주되었다. 특히 성종대(成宗代)에는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계승했다고 자임하는 사림(士林)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위상이 더욱 높아진다. 조선후기까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을 비롯한 13개의 서원에서 정몽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동방이학을 전수하고 동시에 그를 제향하였다. 정몽주의 삶은 그의 죽음 이후 더욱 찬란한 꽃을 피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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