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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定宗]

큰 뜻을 품었던가, 그저 꿈을 꾸었는가

923년(태조 6) ~ 949년(정종 4)

정종 대표 이미지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고려의 제3대 국왕 정종(定宗)은 923년(태조 6)에 태어나 945년(혜종 2) 9월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949년(정종 4) 3월에 사망하였으니, 불과 4년이 채 되지 못하는 기간 동안 재위하였다. 당시는 국내외의 정세가 여러 모로 불안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남아있는 기록이 매우 적어 자세한 상황을 알기는 어렵다. 현전하는 자료를 토대로 그가 삶을 찾아가 보자.

2 가계

정종의 이름은 왕요(王堯)로, 태조 왕건(太祖 王建)과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버지는 충주(忠州)의 유긍달(劉兢達)로, 당시의 이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다. 왕자로서의 서열은 제2대 국왕 혜종(惠宗)이 되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의 아들 왕무(王武)에 이어 두 번째였다. 신명순성왕태후는 왕요 외에도 여러 자녀를 낳았는데, 왕소(王昭)·왕태(王泰)·왕정(王貞)·증통국사(證通國師)·낙랑공주(樂浪公主)·흥방공주(興芳公主)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왕소는 훗날 정종의 뒤를 이어 제4대 국왕 광종(光宗)으로 즉위하는 인물이다.

3 즉위 과정

왕자로서 왕요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그리 남아있지 않다. 936년(태조 19)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으니, 왕요는 14세에 이 큰 변화를 맞이했던 것이 된다. 943년(태조 26)에 아버지인 태조 왕건이 운명했을 때 왕요는 21세였고, 11세 위의 배다른 형인 왕무가 새 국왕으로 즉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왕요가 왕위를 둘러싼 비정하고 참혹한 다툼에 휘말린 모습에 관한 기록도 이 무렵부터 찾아볼 수 있다.

945년(혜종 2)에 왕요가 동생인 왕소와 함께 모반을 꾸몄다는 제보가 국왕 혜종에게 전해졌다. 제보자는 왕규(王規). 선왕(先王) 태조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었으며, 태조의 고명대신(顧命大臣)이었던 당대의 중신(重臣)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당시 왕규는 혜종과 왕요·왕소 등을 해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앉히려고 도모했다고 한다. 이른바 ‘왕규의 난’이라 불리는 이 시기의 일련의 급박한 사건들은 기록이 소략하여 자세한 전모를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 왕요·왕소와 왕규가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고 파악하는 것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혜종은 왕규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왕요와 왕소를 더욱 가까이 하고, 심지어 자신의 딸을 왕소와 혼인시켰다. 이 혼인의 이유가 왕요 형제에 대한 지지인지, 반대로 이들로부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나,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정짓기는 어렵다.

945년(혜종 2) 9월, 혜종은 극도로 불안한 정국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젊은 나이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러자 왕규와 왕요·왕소는 각각 세력을 규합하여 정국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왕요는 서경(西京)에 책임자로 나가 있었던 종친 왕식렴(王式廉)의 힘을 빌렸다. 혜종이 서거하자 왕식렴은 즉시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개경(開京)으로 들어와 왕요를 호위하였고, 왕규를 잡아 귀양 보냈다가 처형하였다. 당시 왕규의 무리 300여 명이 처형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갈등의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혜종의 사망 직후 왕요는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혜종이 유언으로 왕요에게 왕위를 승계시켰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역시 자료의 부족으로 더 이상 확실한 근거를 가진 추론을 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하여 고려의 제3대 국왕 정종이 즉위하였다.

4 국방 강화책 추진

정종대에 관한 기록도 극히 소략하여,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다만 국방에 많은 신경을 썼던 흔적이 보이는데, 이를 살펴보자. 우선 947년(정종 2)에 현 덕창진(德昌鎭)에 성을 쌓은 것을 비롯하여, 철옹(鐵甕)·박릉(博陵)·삼척(三陟)·통덕(通德)·덕성진(德成鎭) 등 북방의 여러 요충지에 성을 쌓았다. 이는 한반도의 서북부부터 동북부까지 여러 지역에 걸쳐 있는데, 태조대 이래로 점차 북방 지역에 대한 영역화 작업을 추진했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948년(정종 3) 9월에 동여진의 소무개(蘇無盖) 등이 내조(來朝)하여 말 700필을 바친 것은 이러한 북방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것은 광군(光軍)의 설치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극적이다. 태조대의 명신(名臣)인 최언위((崔彦撝)에게는 아들 최광윤(崔光胤)이 있었는데, 후진(後晋)에 유학을 갔다가 거란(契丹)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관직에 임명되었는데,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귀성(龜城)으로 왔다가 장차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고 여진족을 통해 서신을 전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정종은 군사 30만을 선발하고 ‘광군’이라 불렀으며,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 시기에는 거란과의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으나, 훗날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을 치르는 데에 이러한 사전 준비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5 서경 천도 추진

정종대의 주요한 사업으로 서경 천도 준비를 들 수 있다. 947년(정종 2)에 정종은 서경에 왕성(王城)을 쌓도록 지시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규모로 어디에 축성한 것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대체로 서경을 정비하여 개경에 준하는 규모로 육성하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에 관해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정종이 도참(圖讖)을 믿어 서경으로 천도하려 하였다고 서술하였다. 한편 이 시도가 불안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지지 세력인 왕식렴의 근거지인 서경으로 천도하려 한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연구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당시 정종이 서경으로 천도를 준비하였으며, 이것이 많은 노역을 야기하고 개경 주민의 서경 이주까지 수반하면서 큰 불만 요인이 되었다는 기록은 수긍이 간다. 훗날 최승로는 이에 대하여 ‘강제로 사람을 징발하여 공사를 시키니 원망이 일어나고 재앙의 조짐이 나타났다.’라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정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서경 천도는 중단되었다.

6 불교 존숭과 이른 사망

정종에 관해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특기된 것으로 불교에 대한 존숭을 들 수 있다. 946년(정종 원년)에는 직접 부처의 사리(舍利)를 모시고 걸어서 개국사(開國寺)에 모셨고, 아울러 곡식 7만 석을 여러 사찰에 시주하는 한편, 불교를 배우는 승려들을 위해 불명경보(佛名經寶)와 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시 행위에도 불구하고, 정종은 949년(정종 4)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신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왕식렴이 사망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 두 사건을 연결시켜 정종의 사망에도 기록되지 않은 흑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정종은 임종하기 전에 동생 왕소에게 왕위를 선양하였고, 제석원(帝釋院)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정종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으니,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朴氏),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 김씨(金氏)였다.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모두 태조대의 중신 박영규(朴英規)의 딸이었고, 청주남원부인은 김긍률(金兢律)의 딸이었다. 문성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과 공주 하나를 두었으나, 그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경춘원군은 광종대에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훗날 이 시기를 겪었던 최승로의 회고에 따르면, 정종은 즉위 초반에 밤낮으로 좋은 정치를 위해 노력하여 밤에 촛불을 켜고 신하들을 불러 보기도 하고, 식사 시간을 미루어가며 정무를 처리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단순한 덕담만은 아닐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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