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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鄭仲夫]

무신(武臣)들의 울분, 한 칼에 날리다

1106년(예종 1) ~ 1179년(명종 9)

1 개요

정중부(鄭仲夫)는 1106년(예종 원년)에 출생하여 1179년(명종 9)에 사망한 고려의 무신이다. 그는 무신으로 출세하여 상장군에 올랐다가 1170년(의종 24)에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주동하여 이후 100년 가량 이어지는 무신집권기의 서막을 열었으며, 1174년(명종 4)부터는 정권의 일인자로서 고려의 정치를 좌우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생애를 무신정변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무신정변 이후의 상황은 그에 앞서 집권했던 이의방(李義方) 집권 시기와 그의 집권 시기로 다시 나누어 살펴보겠다. 그러면서 1170년(의종 24)의 무신정변부터 그가 죽기까지 10년 동안 고려의 정치와 사회가 겪었던 큰 격변의 모습을 아울러 훑어보겠다.

2 무신정변을 주도하다

정중부의 가계와 출신에 대해서는 그가 해주(海州)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신장이 7척이 넘고 수염이 아름다워 무인다운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에서 그를 군적에 올려 개경에 보냈는데, 재상 최홍재(崔弘宰)가 군사를 선발하던 중 그를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발탁하여 공학군(控鶴軍)에 충당시켰다. 이후 인종 대에는 견룡대정(牽龍隊正) 자리에 올랐다.

이후 정중부는 무신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인종[고려](仁宗)과 의종을 모두 곁에서 모셨으며, 의종대에는 무신의 최고위직인 정3품의 상장군 반열에 올랐다. 당시 고려에 1·2품에 해당하는 무신의 관품은 없었으니, 무신의 정점에 선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고려 정치는 문신들이 주도하고 있던 때로, 무신들은 자신보다 관품이 낮은 문신들에게 마저 모욕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정중부 역시 젊은 시절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인 신진 관료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그의 수염을 태워버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무신, 장교들뿐만 아니라 하급군인들 역시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각종 노역에 동원되면서 불만의 뜻을 키워가고 있던 중이었다. 여기에 국왕 의종이 정치에 뜻을 잃고 하루가 멀다 하고 문신들과 어울려 개경 인근을 순회하면서 연회와 향락에 빠진 생활을 반복하자, 이를 호위하면서 고생해야 했던 무신들과 군인들의 불만은 폭발하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1170년(의종 24)에 이르면 무신들이 본격적으로 정변을 모의하는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이를 주도했던 것은 이고(李高), 이의방 등 젊은 하급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거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이들은 정변을 앞에서 지휘할 명망 있는 무신을 찾고자 하였고, 정중부는 이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결국 그해 8월 30일, 국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계기로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켰고, 이로서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

정변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9월 1일, 이고와 이의방 등이 개경으로 진입하여 문신들을 살육하는 동안 정중부는 의종과 함께 보현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국왕을 시해하고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을 주장하는 혈기 넘치는 장교들을 설득하며 진정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巨濟縣)로 유폐시키고 명종을 옹립함으로써 정변은 일단락되었다. 정변 직후의 인사발령에서 정중부는 종2품의 문관직인 참지정사로 승진하였고, 곧이어 가장 큰 공을 인정받아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책정되었다.

3 암중모색의 시기, 이의방 정권(1170~1174년)

1170년(의종 24)에 일어난 무신들의 정변을 흔히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무신 정권에서 정중부는 곧바로 1인자로 나설 수 없었다. 가장 선두에 서서 가장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던 젊은 장교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이의방, 이고, 채원(蔡元) 등이 그들이었다. 정변 당시 정8품의 산원(散員) 벼슬에 있던 이들은 정변 직후 여러 등급을 뛰어넘어 곧바로 종3품의 대장군직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들 3인은 무신들 내부에서도 그들의 과격함에 찬동하지 않았던 고위급 무관들인 대장군 한순(韓順), 장군 한공(韓恭), 신대여(申大輿), 사직재(史直哉), 차중규(車仲規) 등을 숙청해버렸다.

그리고는 곧이어 3인 사이에서도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먼저 이고가 움직였다. 그는 몰래 불량배들과 평소부터 친분이 있던 승려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었다. 이의방과 채원은 먼저 손을 써서 이고를 제거하였다.

곧이어 채원 역시도 조정 신하들을 모두 죽일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제거되었다.

이로써 정권은 이의방이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의방 혼자서는 확고한 권력의 기반을 갖추었다고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때 정중부는 권력투쟁의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우려하여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원로 무신으로서, 정변의 공으로 보나 무신들 사이에서의 인망으로 보나 정중부는 당시 무신들 가운데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이의방은 그를 찾아가 부자관계를 맺을 것을 청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와중 개경의 무신정권에 대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1173년(명종 3)에 김보당(金甫當)이 의종 복위의 기치를 들고 동계(東界)에서 일어났다. 이를 김보당의 난(金甫當-亂)이라 부른다. 그는 한언국(韓彦國), 장순석(張純錫) 등을 규합하여 거제도에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경주(慶州)로 모시고, 자신은 서북면으로 이동하여 개경으로 남하를 준비했다. 그러나 김보당의 기대와는 달리 개경의 문신들이 호응하지 않았던 탓에 반란은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체포된 김보당은 국문을 당하면서 “문신들로서 누가 함께 모의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의방은 이를 빌미로 수많은 문신을 학살하였다. 계사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사서에서는 계사의 난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경인년(1170년)에 일어난 무신정변과 함께 ‘경계(庚癸)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무신들의 쿠데타와 이에 대한 역 쿠데타를 하나로 묶은 표현이라 다소 어색함이 있으나, ‘난(亂)’이라는 상황에 비중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경주로 나왔던 의종은 이의방이 파견한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뒤이어 1174년(명종 4)에는 조위총(趙位寵)이 서경(西京)에서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김보당의 난과는 달리 서북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등에 업은 조위총의 반란은 이후 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의방 정권은 윤관(尹瓘)의 손자인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鄭筠)과 기탁성(奇卓誠)을 부원수로, 그밖에 최균(崔均), 진준(陳俊), 경진(慶珍), 두경승(杜景升) 등 당대 최고위의 무신들을 총동원하여 토벌군을 편성하는 한편, 개경에 남아있던 서경 출신의 문관들을 주살하여 이들이 호응할 것을 차단하였다.

반란의 진압이 한창이던 무렵,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면서 더욱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고 있었고, 이 탓에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자 조위총의 난 토벌군에 종군했던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승려 종참(宗旵)을 회유하여 이의방을 살해하게 하였다. 뒤이어 그의 형인 이준의(李俊儀)와 동생 이린(李隣) 및 그의 측근들도 모두 체포하여 살해하였다.

이로써 이의방 정권은 막을 내리고, 명실상부하게 정중부가 집권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4 정중부의 세상

이의방을 제거한 직후인 1174년(명종 4) 12월, 정중부는 재상의 자리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69세였다. 그와 함께 정변 당시 온건한 입장을 보였던 양숙(梁肅), 경진, 기탁성, 이광정(李光挺) 등이 재상직에 올랐고, 또한 정중부의 사위이자 최측근이었던 송유인(宋有仁)도 추밀원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175년(명종 5)에 이르러 정중부는 고려 관료사회에서 정년에 해당하는 70세에 이르렀다. 그러나 낭중 장충의(張忠義)의 제안에 따라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아 은퇴하지 않고 그대로 중방(重房)에서 국사를 좌우하였다.

그러나 정중부 정권은 개경 안팎에서 많은 위기와 도전에 봉착해있었다. 서북면에서 일어났던 조위총의 난은 이후로도 1년 반이나 더 이어지다가 1176년(명종 6) 6월 서경이 함락됨으로써 일단 진압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그 해 정월부터 공주(公州)의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개경에서는 2월에 대장군 정황재(丁黃載) 등을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 진압군은 반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난이 채 진정되기도 전인 9월에는 예산(禮山) 일대에서 손청(孫淸)이, 그리고 익산(益州)에서는 미륵산적(彌勒山賊)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아울러 남적(南賊)이라 부르며 위기감을 느끼면서 대장군 정세유(鄭世裕)를 사령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반군은 북상을 거듭하며 예산, 직산(稷山)을 거쳐 여주(驪州) 일대까지 진격하는 등 지금의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때 이들 반란군은 “차라리 칼날 아래 죽을지언정 항복하여 포로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군사를 몰고 왕경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라는 서신을 보낼 정도로 강한 결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반란은 1년 반이나 지속되다가 진압되고 말았지만, 중앙의 무신들에게 위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개경에서도 내분과 하극상이 줄이어 일어났다. 우선 이의방의 잔당들이 그의 원수를 갚겠다며 정중부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누설되는 바람에 모두 먼 섬으로 유배당하였다.

또한 하급 군사들은 다음과 같은 익명의 방을 붙이며 정중부와 정균 등을 처단할 뜻을 천명하였다. “시중 정중부와 그의 아들 승선 정균, 그 사위 복야 송유인이 권력을 잡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기에 남적이 일어난 것이다. 군사를 동원해 반란군을 토벌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 무리부터 제거해야 한다.”

내외의 위기에 더하여 정중부와 그 일가의 탐욕스러움이 당시 무신과 관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시중의 지위에 오르자 땅을 크게 늘렸으며, 그의 아들 정균은 옛 태후의 별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 거처하지 않자 자신의 사저로 삼아 거창하게 집을 짓는 공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송유인은 의종이 건설한 이궁 가운데 하나인 수덕궁(壽德宮)을 달라고 요구해 자신의 처소로 삼았는데 부귀와 사치가 왕실 못지않았다고 한다.

1178년(명종 8) 11월, 정중부는 시중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의 나이가 정년을 지나 이미 73세이 이르렀으니 그럴만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뒤를 이어 그의 사위인 송유인이 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송유인은 곧이어 문신 가운데 두터운 인망을 얻고 있던 문극겸(文克謙)을 탄핵하는 등 정권을 농단하는 처사를 계속하였다. 이는 결국 잃었던 인심을 정권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1179년(명종 9) 9월, 정중부 정권이 일거에 몰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균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스스로 공주에게 장가를 들려 하였다. 이 계획은 다른 무신들과 고위관료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20대의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은 거사를 일으켜 우선 정균을 처치하고, 정중부의 측근인 이경백(李景伯), 문공려(文公呂) 등을 살해한 뒤 송유인과 그의 아들 송군수(宋群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중부를 모두 제거했던 것이다.

이로써 약 5년에 걸친 정중부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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