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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王昌]

망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운의 왕으로 전락하다

1380년(우왕 6) ~ 1389년(공양왕 1)

창왕 대표 이미지

태조실록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제33대 고려 국왕으로 등극한 창왕(昌王)은 감당할 수 없는 망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왕권을 회복하고 국정을 정상화시키려 하였던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저항과 끊이지 않는 외침(外侵)의 와중에서 공민왕의 비극적 죽음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더구나 중국 대륙에서 원(元)과 명(明)이 각축하던 시기를 맞아, 고려 조정은 어떤 쪽과 손을 잡을 것인지에 대하여 격론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공민왕의 죽음 이후에도 고려의 관료들은 친원세력과 친명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는데, 양자의 대립은 결국 위화도회군을 통해 친명세력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아버지 우왕(禑王)의 폐위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창왕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격변의 시대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은 외부적으로 중국의 신흥왕조인 명이 견제의 끈을 놓지 않는 현실을 타개해야 했으며, 내부적으로는 개혁에 대한 열망을 수용하여 왕조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만 했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복잡한 정세는 어린 나이에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른 창왕에게 있어서 쉽게 떠안을 수 없는 거대한 짐이었을 것이다. 결국 고려라는 낡은 틀 대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통해 개혁을 지향하였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창왕은 부왕인 우왕과 함께 망국의 책임을 떠안고 비운의 왕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2 불완전한 출신과 불안한 즉위과정

창왕은 1380년(우왕 6) 8월에 우왕과 근비(謹妃) 이씨(李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공민왕의 즉위 이래로 고려 왕실이 오랫동안 고대해오던 왕자였으나 이른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기반을 가진 존재였다. 그의 아버지 우왕은 여타 고려 국왕들과는 달리 천한 신분의 어머니를 두었다. 공식적으로는 공민왕의 궁인(宮人)이었던 한씨(韓氏)를 어머니로 내세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돈(辛旽)의 여종이었던 반야(般若)를 우왕의 생모로 지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간에는 우왕이 공민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이에 공민왕이 피습된 직후에는 할머니였던 명덕태후(明德太后)마저도 그를 외면한다. 어머니 쪽의 혈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여 종실이나 명문가 여성과의 혼인을 통해 얻은 왕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고려의 분위기 속에서 여종의 아들로 알려진 우왕은 그 기반이 극히 불안정하였다.

우왕의 즉위에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공민왕 사후, 명덕태후는 물론 대부분의 고관들이 종실 가운데 적임자를 골라 왕으로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나, 이인임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린 우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따라서 우왕은 이인임과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며 그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였다. 이림(李琳)의 딸인 근비를 들인 것 또한 이인임과의 관계를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림은 이인임의 외사촌이었으며, 창왕은 바로 근비의 소생이었다.

조반(趙胖)의 땅을 약탈한 일이 발단이 되어 1388년(우왕 14)에 이인임이 몰락한 이후, 창왕의 운명에는 조금씩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를 외척으로 두고 있었던 창왕에게 있어서 이인임의 몰락은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을 잃게 만든 사건이었다. 곧바로 우왕은 정계의 핵으로 부상한 최영(崔瑩)으로부터 영비(寧妃)를 맞아들이는 등 최영과 긴밀하게 결탁하며 새로운 기반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우왕은 개혁을 요구하는 광범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그 자신이 왕위에서 축출되는 운명에 처하였다.

우왕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폐주(廢主)의 아들이었던 창왕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실제로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개혁파에서는 우왕과 창왕의 혈통을 문제 삼으며 종실 중에 한 명을 뽑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위화도회군의 일등공신이었던 조민수(曺敏修)는 물론, 당시의 대학자였던 이색(李穡) 또한 창왕의 즉위를 지지하자 판도는 달라졌다. 우왕이 강화(江華)로 쫓겨난 바로 그 다음날, 고려 왕궁에서는 정비(定妃)의 전교에 의하여 9살의 어린 창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3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서다

고려 조정은 창왕의 즉위를 전후하여 기존 국가 운영체제에 대한 개혁 방안을 두고, 점진적 개혁과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두 세력 간에 논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민수·이색 일파와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 일파는 위화도 회군 이후 기세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이 과정에서 창왕은 개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1388년(우왕 14) 7월부터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을 전면에 내세운 이성계 일파는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고려의 통치체제에 대하여 전면적인 개혁 작업을 시도하였다. 가장 먼저 조준은 토지제도[田制] 개혁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 그는 관직복무의 대가로 관료들에게 주어지는 토지가 제대로 국가에 회수되지 않아 국고가 고갈되었으며, 토지 겸병의 현상이 확산되어 일부 권세가에게 막대한 양의 토지가 집중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사전(私田)의 전면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땅을 빼앗으면서 사전의 개혁을 저해하였다는 이유로 조민수를 탄핵하여 조정에서 쫓아내었다. 이는 경제적·사회적 우위를 점유한 구래의 기득권층을 이성계 일파가 전면적으로 공격한 사건이었다.

그 다음 달인 8월에 조준은 다시 한 차례 장문의 상소를 올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개혁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우선 당시의 중앙 통치기구가 갖고 있었던 문제점을 열거한 뒤, 6부의 기능을 정상화하고 재상의 숫자와 역할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현감(縣監)·현령(縣令)·안집사(安集使)와 같은 지방수령들의 선발방식을 개선하여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자 하였다. 또한 형벌의 공평한 적용, 이인임으로부터 피해 받은 자들을 위한 보상, 복장의 개혁 등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사회적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하였고, 수취제도 및 신분별 통제방안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였다.

창왕은 이와 같이 중대한 역사적 국면을 맞이하여 이색 세력과 이성계 세력 사이에서 힘겹게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그는 왕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색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성계를 수시중(守侍中)에 임명함으로써 세력의 균형을 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두 세력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다. 특히 이성계 세력은 성리학적 명분을 이용하여 이색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였다. 결국 창왕이 즉위한 다음해인 1389년(창왕 원년) 10월, 이색의 최측근이었던 이숭인(李崇仁)이 탄핵된 일을 계기로 이색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로부터 창왕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4 ‘신창(辛昌)’으로 기억되다

이색이 중앙정계를 떠난 직후 설상가상으로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우왕의 계획이 발각되었다. 1389년(창왕 원년) 11월, 황려(黃驪)에 유배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를 만나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곽충보의 변심으로 이 계획이 이성계에게 알려지면서 우왕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폐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종국에 이성계 세력은 폐가입진(廢假立眞), 즉 “가짜 왕을 내몰고 진정한 왕을 추대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우왕을 강릉(江陵)으로 옮기고 창왕을 강화로 내쫓은 뒤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서균형(徐鈞衡)과 유구(柳玽)를 각각 강릉과 강화로 보내어 신돈의 자식으로서 외람되게 왕위에 오르고 국가를 더럽힌 죄를 물어 우왕과 창왕을 참수하였다. 이로써 창왕은 후대의 역사 속에 정당한 ‘고려 국왕’이 아닌, 신돈의 자손 ‘신창(辛昌)’으로 기록된다. 역사 속에서 그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변하는 인물로 남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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