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최무선

최무선[崔茂宣]

화약으로 왜구를 무찌르다

1325년(충숙왕 12) ~ 1395년(태조 3)

최무선 대표 이미지

최무선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최무선은 고려 말~조선 초 시기에 살았던 무신이다. 그는 염초를 제조하는 비법을 익히고 보급하여 고려의 화약무기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고려는 오랫동안 왜구(倭寇)의 침구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화약무기는 이를 격퇴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서는 최무선의 화약무기 개발 공로와 그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2 최무선의 가문 배경, 시대 배경

최무선은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永州)이며,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최무선 개인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관직에는 어떻게 진출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그의 성품을 묘사하여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기록에서는 “성품이 통달하고 민첩하여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또 중국어를 잘 알았다”고 하였다.

최무선이 활동하던 고려 말의 상황은 한마디로 외우내환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고려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이 왜구였다. 무장을 갖춘 해상세력이었던 왜구는 1351년(충정왕 2) 이후 고려 전국을 약탈하였다. 이들은 단순히 도적 집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맞이하여 일본 국내에서 무력 충돌을 빚고 있었던 영주들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즉 조직화된 대규모의 군대가 한반도의 인구와 물자를 약탈하기 위하여 습격하였던 양상이 자주 확인된다.

고려 조정은 여러 가지 방책을 동원하여 왜구를 격퇴하고자 애를 썼으나, 수군이 확고하게 조직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해상에서 이를 저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왜구들이 상륙한 이후에 지상전을 벌이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해안은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전국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왜구는 그 중에서도 특히 한반도 서남해안의 조운로를 따라 출몰하는 일이 많았다. 최무선의 아버지가 관직생활을 한 광흥창(廣興倉)은 지방의 세곡 가운데 관원의 녹봉으로 지급할 것을 보관해두는 부서로서,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 인근의 예성강(禮成江) 어귀에 설치되어 있었다. 각지에서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이 집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 말에 조운선은 왜구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개성(開城)에 가까운 예성강 일대까지 왜구가 침입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건대 최무선은 어려서부터 왜구에 의한 피해상을 목격하면서 이를 격퇴하기 위한 방략을 찾는 데에 애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최무선 이전에는 화약무기가 없었나

왜구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고려에서는 이를 퇴치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책으로 화기(火器)를 사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1377년(우왕 3)에는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때 화통도감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이 시점에 도감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기를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며, 실제 화약병기가 고려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356년(공민왕 5)에는 “재추들이 숭문관에 모여 서북면을 방어하는 병장기를 사열하였다. 남강(南岡)에서 총통을 쏘았는데 화살이 순천사(順天寺)의 남쪽까지 날아가 땅에 떨어져 화살깃까지 박혔다”

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1372년(공민왕 21) 10월에도 국왕이 인월곶(引月串)으로 행차하여 화전(火箭)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듬해에도 새로 건조한 전함과 함께 화전과 화통(火筒)을 시험해보았다고 한다.

즉, 고려는 이미 적어도 공민왕대부터 화약 무기를 제한적으로나마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해외에서 입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때의 화약무기는 기대했던 것보다 성능이 뛰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에 고려에서는 당시 세계 최고의 화약무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명나라에서 화약 등의 실물과 제작 기술을 얻어 보려 노력하였다. 공민왕은 명(明)과 외교관계를 맺은 직후인 1373년(공민왕 22) 11월에 명 조정에 사신을 보내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무기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때 보낸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적이 소란을 일으키며 다니는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는 본국 연해 주군의 요해처에 군사를 동원하여 방어하기만 했을 뿐 바다까지 나가 추격해 체포하지는 못했습니다. 최근 들어 적들의 세력이 이미 왕성해졌으니 이제는 바다에 나가 추격 체포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근심을 근절하고자 합니다. 관원을 차정하여 왜적을 체포할 배를 만들고 있는데, 그 배에서 마땅히 사용해야 할 기계와 화약, 유황, 염초(焰焇) 등의 물품은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조정에 아뢰오니 이 물품들을 내려주시어 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요청을 접수한 명 조정에서는 에둘러 거절한다는 뜻을 담은 문서를 고려에 보내왔다. 이 문서에 인용된 홍무제의 말은 다음과 같다.

“고려에서 문서를 보내 병기와 화약으로써 배를 만들어 왜구를 체포하고자 한다고 하니 내가 이를 보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전과 같이 백성들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고 드디어 백성을 구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렇게 중국에 문서를 보내온 것일 것이다. 그런데 왕전(王顓, 공민왕)이 진실로 나의 명령을 따르고자 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의 명령을 전달하여 그가 반드시 시행하게 하라. 빨리 문서를 보내어 그곳에서 염초 50만 근을 쓸어 모으고 유황 10만 근을 구해서 가지고 오게 하라. 그러면 이곳에서 별도로 필요한 화약을 배합해서 그에게 줄 것이다. (중략) 모두 같은 하늘, 같은 해 아래에 있는데 어찌 여기에는 있고 거기에는 없겠는가. 이 물품은 어디에나 있는데, 그들은 다만 배합하는 법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고려에서 화약과 유황, 염초 등을 요구한 데에 대해 명의 황제는 “그것은 어디에나 있는 물품인데, 다만 배합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하며, 고려에 전해주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제조술을 전수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명에서 직접 제조하여 전해주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명 조정의 입장에서는 건국 직후 아직 국내외의 안보가 확고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변국에 직접 화약을 공급해주거나 그 제조기법을 알려주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4 화약 제조술을 보급하다

홍무제의 발언은 반은 사실을 말한 것이다. 유황은 희귀하기는 하지만 일종의 광물이므로 그것을 얻는 데에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염초였다. 일반적으로 화약을 만드는 데에는 핵심적인 원료로 유황, 숯과 함께 염초가 필요한데, 그것을 제조하는 데에 기술이 필요하였다. 염초는 질산칼륨(KNO3)으로, 전통적으로는 담 밑에 있는 빛이 검고 맛이 매운 흙과 같이 질소 성분이 있는 흙에 알칼리 성분이 있는 쑥재와 곡식대재를 섞어 물을 넣고 끓이는 방식으로 제조하였다. 이런 흙이나 식물과 같은 재료는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둘을 혼합하여 염초를 만들어내는 비법은 경험상으로는 쉽게 터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최무선의 공로는 바로 이 염초를 확보하는 기술을 익혀서 보급했다는 데에 있다. 화통도감을 설치했음을 전하는 기록에는 이어서 “최무선이 원(元)의 염초장인 이원(李元)과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면서 잘 대우하고 가만히 그 비법을 물어서 가동(家僮) 몇 명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여 시험해보고, 드디어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최무선의 졸기는 좀 더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최무선은 항상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터득한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보고자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최무선을 사기 치는 자라고 험담하기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건의하여 마침내 그 뜻에 감동되어 화약국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밖에도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崔海山)의 말을 인용한 다음의 기록 역시 그가 염초를 구하는 기술을 확보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화약고기(火藥古記)」에,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 최해산 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이 일찍이 왜구가 침입하면 제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여, 수전(水戰)에서 화공을 쓸 방책을 생각하고서 염초를 구워서 쓸 기술을 찾았다. 중국인[唐人] 이원(李元)이라는 자는 염초 굽는 장인인데, 공이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하면서 은밀히 그 기술을 물어서 집에서 부리는 종 몇 명을 시켜 사사로이 기술을 익히게 하고 그 효과를 시험한 뒤에 조정에 건의하여 홍무 10년 정사(丁巳)년 10월에 처음으로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염초를 굽게 하였다. 또 중국인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자를 모집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고 공이 직접 감독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는 모두 최무선이 중국인 이원(李元)이라는 인물에게서 염초를 제조하는 법을 배워 익혔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의 출신을 두고 『고려사』에서는 원나라 출신의 염초 장인으로, 『태조실록』에서는 강남의 상인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중국인[唐人]으로 기록하고 있어, 최무선이 익힌 화약 기술의 원류가 원나라, 즉 중국 화북지방에서 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명나라, 즉 중국 강남 일대의 기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5 화약무기 도입과 그 효과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이 설치된 이후 화약은 급속도로 발달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그 이후 거의 20종의 화약무기가 생산되었다고 하는데, 이름으로 미루어 분류해보면 총포류로는 대장군포(大將軍砲), 장군포(二將軍砲), 삼장군포(三將軍砲),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㷁) 등이, 발사물로는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등이 있었고, 그밖에도 폭탄의 일종인 질려포(蒺藜砲), 로켓병기의 일종인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그 위력은 보는 사람들이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화통도감을 설치한 지 반년 만인 1378년(우왕 4) 4월에는 개경과 외방의 각 사찰에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을 정하였는데, 큰 사찰에 3명, 중간 사찰에 2명, 작은 사찰에 1명씩으로 하였다. 이 정도 수효의 전문부대를 편성하여 그들에게 지급할 정도로 화기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전에 투입된 화약무기는 대단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1380년(우왕 6)에는 진포(鎭浦), 즉 지금의 전라도 옥구(沃溝)에 왜구의 배 5백 척이 들어와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 때 화포로 정박한 적선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1383년(우왕 9)에는 진도(珍島)에서 화포를 가지고 적선 17척을 불태우는 승리를 얻기도 하였다. 이 싸움을 이끈 정지(鄭地)는 “일찍이 오늘과 같은 통쾌한 일은 없었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해상전뿐만 아니라 지상전에서도 화포는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였다. 해상에서의 열세로 상륙한 이후 내륙지방으로 깊이 들어온 왜구를 섬멸하는 데에도 화포가 유용하게 쓰였던 것이다. 왜구는 험한 산을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도 했는데, 화포를 쏘아 적의 진지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렇듯 고려군이 화포를 사용하게 되면서 왜구와의 전투는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30년 이상 전국을 들쑤셔놓았던 왜구는 화포의 위력 앞에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해상에서 고려군은 화포를 이용하여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왜구의 배들이 마음 놓고 한반도 연안을 횡행하지 못하게 하였고, 상륙한 왜구와의 전투에서도 화포의 활약으로 고려군이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화포의 역할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화통과 화포가 빠른 우레와 세찬 번개처럼 터져서 그들의 혼을 빼앗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 완악하고 사나운 왜구를 쉽게 굴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화약이란 것은 오병(五兵)을 보조하는 물건으로 제왕(帝王)이 이것을 써서 국위(國威)를 성대하게 선양하고, 포악하고 난동하는 자들을 제거하며, 백성을 사랑하여 공(功)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태평 시대를 유지하는 큰 벼리가 되는 물건이다. 30년 동안 왜구의 침략을 당했을 때에도 태평을 유지하게 된 것은 다른 힘이 아니고 여기에 있었던 때문이다.”

6 왜구 섬멸 이후의 화약무기

화통도감은 창왕 때인 1389년(창왕 원년)에 혁파되어 군기시(軍器寺)로 통합되었다. 그 폐지를 주장했던 조준(趙浚)은 “무릇 도감은 일이 생기면 설치하고, 일이 없어지면 혁파하는 것이 예”라고 하였다. 우왕 말년 이후로는 왜구가 한층 잦아들었던 것이 화통도감을 통폐합하게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화약무기 사용에 관한 기록이 현저히 드물게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로도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대에는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려는 뚜렷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태종[조선](太宗) 즉위 직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을 등용하면서부터 화약무기 개발은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407년(태종 7)에는 화약장(火藥匠)을 33명이나 두고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한다.

이러한 개발의 결과 1409년(태종 9)에는 화차(火車)를 개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태종실록』에서는 화차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화차(火車)의 제도는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구리통[銅桶]에 넣어서 작은 수레[小車]에 싣고 화약으로 발사하면 맹렬하여 적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화약무기 개발의 초석을 놓은 공로로 최무선은 사후인 1401년(태종 원년)에 의정부우정승·영성부원군(議政府右政丞·永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최해산은 대를 이어 군기시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한동안 그의 자손들은 최무선의 공으로 서용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