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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崔承老]

고려의 체제 정비를 위한 노력을 역사에 남기다

927년(태조 10) ~ 989년(성종 8)

최승로 대표 이미지

최승로 시무28조(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최승로는 고려 초기에 활동한 문신 관료였다. 927년(태조 10)에 태어나 989년(성종 8)에 사망하였으며, 이후 성종(成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경주 출신이며, 아버지는 최은함(崔殷含)이다. 출신지와 성씨로 미루어 보아, 6두품 집안의 후예로 여겨진다.

2 서라벌 출신의 소년, 태조 왕건을 만나다

최승로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현재 매우 소략하게 남아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통해 정치적 활동에 대하여 알 수 있다. 그리고 『보한집(補閑集)』에 그가 지었다는 시가 일부 전한다.

먼저 『삼국유사』 삼소관음 중생사(三所觀音 衆生寺) 조에 실린 그의 출생에 얽힌 일화를 보자. 당시 최은함은 오래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이곳의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올린 뒤에 최승로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생후 채 석 달도 되지 않았을 때, 견훤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을 침공했다. 이에 최은함은 아이를 안고 절로 가 관음보살상 아래에 숨기며 “아이를 지켜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돌아갔다. 무려 반달이 지난 뒤에야 겨우 찾으러 갈 수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기 최승로는 뽀얗게 젖내를 풍기며 무사히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내용은 그 관음보살상의 영험함을 전하기 위한 기록임을 감안하며 봐야 할 것이다.

935년(태조 18),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고려에 항복하였다. 개경(開京)으로 옮겨 살게 된 경순왕을 따라 최은함도 고려로 왔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조금 자란 최승로가 태조 왕건을 만났던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12세 때라고 하였으니, 938년(태조 21)의 일이다. 고려가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지 2년 째 되는 해였다.

태조 왕건은 영특하다고 소문이 난 소년 최승로를 불러 만나보고, 그에게 『논어(論語)』를 읽어보게 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적혀 있지 않으나, 태조는 최승로를 무척 기특하게 여기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그리고 원봉성(元鳳省)에 들어가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태조는 유학이든 불교든 어떤 쪽에서건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널리 환영하였다. 아직 어린 최승로였지만, 후대의 동량으로 키울 만한 인재로 인정을 받았던 모양이다. 다만 『고려사』의 최승로 열전에서 그가 “이때부터 문병(文柄)을 잡았다”, 즉 최고의 문신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적은 것은 정황상 과장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3 조각난 기록 속의 젊은 문신 최승로

최승로의 나이로 보아, 그가 본격적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것은 빨라야 태조의 말년 무렵부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때부터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기였다. 훗날 최승로가 이 시기에 대해 회고한 것에 따르면 군주가 신하를 의심하고 신하들 간에 알력이 극심했으며 내란과 숙청으로 국초 이래의 관리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혼란했던 정치적 격변기에 최승로는 어떤 관직 생활을 했을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남긴 시의 구절 등을 통해, 그가 주로 학사(學士) 계통의 업무를 담당하며 정치 활동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훗날 성종이 즉위했을 무렵, 그는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 行選官御事 上柱國)까지 올라 있었다.

4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스스로 역사가 되다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은 성종이 즉위할 무렵에 비로소 잦아들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젊은 국왕 성종은 다시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982년(성종 원년), 성종은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시국의 당면 과제에 대하여 의견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 때, 오랫동안 기록에서 사라져 있었던 최승로가 56세의 나이로 화려하게 다시 등장한다. 최승로는 장문의 글을 올려 자신이 직접 겪어온 경험을 토대로 태조 이래의 다섯 국왕의 본받을 점과 잘못한 점에 대해 논하고, 이어 당면 과제 스물여덟 가지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바로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과 「시무(時務) 28조」라고 불리는 상언이다.

우선 「오조정적평」을 올리며 최승로는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여신 이래로 신이 알게 된 것들은 모두 신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앞선 5대 조정의 정치와 교화에 대해서 잘되고 잘못된 행적들을 기록하고, 거울로 삼거나 경계할 만한 것들을 삼가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통일의 대업을 이룬 태조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며 나라가 미처 정비되기 전에 운명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혜종과 정종, 광종, 경종의 경우 대체로 초기에 신하들과 협력하여 정치에 힘쓴 것은 훌륭하였으나, 편파적인 인사와 신하에 대한 의심, 무리한 서경(西京) 천도 시도, 역량이 모자란 신진 인사 기용, 정치적 숙청, 사치와 향락 등의 문제가 있었다고 하였다. 특히 광종의 개혁 조치들에 대하여 상당히 강한 비판을 가하였다. 최승로는 성종에게 선왕들의 좋은 점은 본받고 나쁜 점은 경계하도록 이 글을 썼다고 하였다.

「시무 28조」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이 중 여섯 조항은 훗날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점령되었을 때 사라졌고, 지금은 스물 두 개의 조항이 전해진다. 우선 최승로는 불교계를 크게 견제하였다. 성종이 직접 고승을 초빙하거나 불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하고, 사찰과 승려들이 저지르는 각종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폐단들을 열거하여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앞에서 말한 불교계의 폐단 외에도, 변방에 차출된 병사의 수를 줄이자, 외관(外官)을 파견하여 토호(土豪)들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자, 섬에 사는 주민들의 공역(貢役)을 줄여주자 등의 내용이 포함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비를 조사하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는 풀어주도록 한 광종의 조치가 낳은 문제점들을 열거하며 현상을 유지하자는 의견도 개진하였다.

또 최승로는 사회제도와 문화적 측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건의하였다. 불교 행사의 억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산악(山嶽)과 성수(星宿)에 올리는 제사를 없애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도 축소하며, 지위에 따라 입는 옷도 규정을 정하고, 예악(禮樂)·시(詩)·서(書)의 가르침과 군신(君臣)·부자(父子)간의 도리는 중국의 것을 본받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궁궐 시위군의 수는 줄이고 신하들을 존중하여 예로 대하도록 권하였다.

위의 상언으로 최승로는 성종대의 조정에서 최고의 지위로 부상한다. 이후 성종대에 시행된 여러 체제 정비 사업은 최승로가 올린 상언과 궤를 같이 하는 점들이 많았다. 그의 말이 모두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었겠으나,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983년(성종 2)에는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강감찬(姜邯贊)을 장원으로 선발하였다. 이후 그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등의 고위 관직까지 오른 뒤에 989년(성종 8)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후 태사(太師), 대광 내사령(大匡 內史令)을 추증받았다.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의 부족으로, 최승로의 선대 왕들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객관적이고 사실에 부합하였는지, 또 그가 시국에 대하여 내린 진단이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지금 우리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당시 고려인들이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하여 어떤 고민을 했는지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그는 과거와 당대에 대한 기록을 통해 스스로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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