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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

요동 정벌을 꿈꾼 고려의 명장

1316년(충숙왕 3) ~ 1388년(우왕 14)

최영 대표 이미지

최영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최영(崔瑩)은 1316년(충숙왕 3)에 출생하여 1388년(공양왕 원년)까지 생존했던 고려 후기의 무신이다. 그는 공민왕(恭愍王) 과 우왕(禑王) 시대에 고려 정계에서 활동하며, 안으로는 거듭된 반란과 정치적 격변을 한가운데에서 겪었고, 밖으로는 홍건적의 난(紅巾賊-亂)과 왜구(倭寇)의 끊임없는 침입을 막아내는 대단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직함과 청렴함, 고집스러움과 잔혹함으로 대별되며,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 민간의 무속신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숭앙되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정치적 활동을 시대의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되짚어보도록 하겠다.

2 난세가 부른 영웅 – 공민왕대의 정치적 성장

최영의 본관은 철원(鐵原)으로, 철원 최씨는 고려 개국공신 최준옹(崔俊邕)을 시조로 한다. 의종 때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던 최유청(崔惟淸)이 그의 5대조였다. 그러나 그가 출생할 무렵에는 그의 가문이 그렇게 융성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은 벼슬이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이르렀는데, 최영이 16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떴다.

최영이 관직에 첫발을 들인 것도 비교적 늦었다. 이 무렵 고려 연안에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하였는데, 최영은 왜구를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우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우달치(于達赤), 즉 국왕의 숙위군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한 이후 벌어진 국내외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최영은 자신의 무재(武才)를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였다. 우선 1352년(공민왕 원년)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발생하자 최영은 이를 진압하였고, 그 공로로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하였다. 1354년(공민왕 3)에는 원에서 한족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자 출전하여, 27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는 전공을 세웠다. 또한 1356년(공민왕 5)에 단행된 일련의 반원정치의 일환으로 인당(印璫)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원의 역참을 공격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이후로도 고려 서북면의 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였고, 특히 1360년(공민왕 9)에 홍건적이 첫 번째로 고려를 침범하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서경(西京)을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들을 격파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 홍건적이 재차 압록강을 건너오자 공민왕을 비롯한 고려 조정은 남쪽으로 피난할 준비로 분주하였다. 이때 최영은 “주상께서는 조금 더 머무르시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를 지키소서”라고 하며 수도 개경 방어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최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복주(福州), 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安東)으로 피난하였고, 개경은 홍건적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최영은 이후 고려군을 규합·지휘하여 개경을 수복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1363년(공민왕 12) 윤3월에 홍건적을 물리친 후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중 개경 인근의 흥왕사(興王寺)에 머물 때 국왕의 측근 김용(金鏞)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5경에 김용이 몰래 패거리 50여 명을 시켜 왕이 묵고 있던 행궁을 침범하게 하니, 숙위하던 관리와 군사가 모두 도망쳐버렸다. 반적들은 환관 안도치(安都赤) 및 첨의평리(僉議評理) 왕재(王梓),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한룡(金漢龍)을 살해하고, 우정승(右政丞) 홍언박(洪彦博) 집으로 찾아가 그를 살해했다. 밀직사(密直使) 최영, 부사(副使) 우제(禹磾),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상호군(上護軍) 김장수(金長壽) 등이 개경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행궁으로 와 반적들을 공격해 진압하였다.”

이렇게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또한 급박한 상황에서 국왕을 구출한 공로로 최영은 일등공신으로 책봉되어 그 초상을 공신각에 걸어두게 되는 등의 영예를 얻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원 조정에서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을 새로운 국왕으로 삼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고려인 최유(崔濡) 등을 앞세우고 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최영은 고려군을 총지휘하며 이들의 침입을 단박에 격퇴하였다. 이때 최영이 군대의 기강을 엄격히 유지한 것은 전승의 한 요인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 그의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최영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임명하여 정예군을 이끌고 급히 안주(安州)로 가서 전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최영이 명령을 받자 즉시 출정하면서 장졸들을 격려하면서 반드시 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하니 조야가 그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최영이 행군하는 길에 도망병을 만나자 곧바로 참수하여 조리돌리니, 군령이 비로소 엄격해졌다.”

이상과 같이 거듭된 내란과 외침 끝에 즉위 초부터 공민왕을 보좌하였던 그의 측근 세력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를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운 무장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최영은 당대 최고의 무신으로서 정치적으로 우뚝 성장하였다. 그러나 무장들의 입지가 강화된 데에 불안함을 느낀 공민왕은 ‘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선 인물’로 칭해졌던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정계를 개편하였다. 이에 최영은 참소를 입고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무고를 당하여 작위를 삭탈당하고 유배에 처해졌다. 그러다가 신돈이 실각한 1371년(공민왕 20) 이후 다시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1374년(공민왕 23)에는 제주에 남아있던 몽골인 출신 목호(牧戶)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최영은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에 임명되어 반란 진압을 위해 출전하였다. 이때의 전황을 묘사한 기록에 따르면 몽골인 목호들은 최후의 1인까지 매우 거칠게 저항하였다고 하는데, 최영은 몸소 장병을 독려하며 정예군을 이끌고 이들을 섬멸했다고 한다.

그가 제주도에서 반란군을 정리하고 개선하였을 때 고려의 운명을 전환시킬 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공민왕이 자신의 측근으로 조직해두었던 자제위(子弟衛)의 손에 시해당했던 것이다.

3 정권을 장악하다 – 우왕대의 정치적 활동과 집권

우왕대에도 최영은 자신의 무재(武才)와 직접 보유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왜구 토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375년(우왕 원년)에는 직접 홍산(鴻山)에서 대규모의 왜구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홍산대첩(鴻山大捷)이라 부른다. 홍산대첩(鴻山大捷)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된 이후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로도 1377년(우왕 3)에는 서강(西江, 지금의 서울시 마포(麻浦))에, 이듬해에는 승천부(昇天府, 지금의 경기도 개풍(開豐))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퇴하였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우왕은 그가 친히 나서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출전을 자처했다고 한다.

“신은 집안일에 관심이 없으니 비록 적에게 죽을지라도 회한이 없습니다. 다만 신의 이름이 다른 나라에 조금 알려져 있으니 만약 적에게 죽는다면 나라의 체통이 상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왜구들이 이처럼 포악하게 침략하니 신은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 도저히 좌시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안위가 신의 한번 거동에 달려있으니, 청컨대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하게 해주십시오.”

우왕 대에 최영의 정치적 지위는 계속 높아져갔다. 우왕 초기에는 국왕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이인임(李仁任)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공민왕대부터 활약했던 무장들이 권력을 나누고 있었다. 이 무렵 최영은 이인임의 정국 운영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정권에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지윤(池奫) 일파, 양백연(楊伯淵) 일파, 경복흥(慶復興) 일파, 목인길(睦仁吉) 일파 등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데에 자신의 무력을 동원함으로써 최영의 지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나 이인임이 정계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의 일파인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최영은 이들과 반목하게 되었다.

거듭된 전공으로 최영은 우왕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는 그를 공신으로 책봉하면서 우왕이 내려준 교서에서 단적으로 보인다.

“지금 장수들 가운데 전투를 많이 하고 공이 큰 사람을 둘러보니 오직 경 한 사람뿐이다. 또한 충성을 다하고 의기를 떨쳐 임금을 높이고 백성들을 감싸주었으니, 재상 가운데 참된 재상이다. 전민(田民)을 상으로 주는 것이 통례이지만 경의 청백함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니 분명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을 것이므로, 다만 철권(鐵券)만 내려주면서 옥으로 권축(券軸)을 만들어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표시한다. 아아, 공은 큰데 상이 미미하니 내가 실로 성에 차지 않도다.”

이인임의 장기 집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우왕은 마침 친정을 펼칠 뜻을 보이게 되었고, 이때 그가 기대었던 것이 가장 뛰어난 무장이자 중외의 신뢰가 두터웠던 최영이었다. 이에 1388년(우왕 14)에 최영은 임견미와 염흥방이 토지를 둘러싸고 반목한 틈을 타서 이들을 숙청해버렸고, 이로써 이인임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그해 3월, 최영은 자신의 딸을 우왕의 왕비로 들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는 바야흐로 우왕 말기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4 요동정벌 계획과 실권, 죽음

1388년(우왕 14)은 최영의 삶에 있어서도, 고려의 운명에 있어서도, 한국사 전체에 있어서도 매우 다사다난했으며 엄청난 전환점이 되었던 해였다. 그해 초 최영이 집권한 직후 고려 조정은 명과의 관계에서 매우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2월에 명에서 귀국한 설장수(偰長壽)가 명 황제의 성지를 전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원래 원(元)에 속해있었으니 모두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명은 철령(鐵嶺), 즉 지금의 강원도 안변(安邊) 일대 이북에 거주하는 고려인, 한인(漢人), 여진(女眞) 등 모든 인호를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결정을 고려에 통보했던 것으로, 이른바 철령위 사건이 그것이다.

고려 조정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외교를 통한 해결을 주장하였는데, 최영으로 대표되는 강경파는 무력 대결을 통해서라도 철령위 설치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최영은 재상을 지낸 이자송(李子松) 등 반대파를 처형하면서까지 요동 공격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최영은 각 도에서 징병을 다그치고 승려들까지 징발해서 군사로 삼으면서 요동공략군을 편성하였다. 자신은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曺敏修)를, 우군도통사에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를 임명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좌군과 우군을 합친 총 병력은 38,830명이었고, 사역하는 인원이 11,634명이었으며 동원된 말이 21,682필이었다. 요동공략군은 그해 4월 임술일에 출진하였다.

그는 스스로 출진하여 장수들을 지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왕은 “경이 가버리면 내가 누구와 함께 국내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하며 그의 출전을 극구 만류하였다. 이에 출동한 군사의 지휘권은 조민수와 이성계가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 공략의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이 옳지 않다는 점,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 셋째, 북쪽을 공격하는 사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략할 것이라는 점,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라는 점 등이었다.

요동공략군은 압록강까지 북상하여, 압록강의 하중도인 위화도(威化島)에 진을 쳤다. 때마침 큰 비로 물이 불어 강을 건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좌우도통사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시 회군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받아들이지 않고 진군을 독촉할 뿐이었다. 결국 5월 을미일, 이성계는 말머리를 남으로 돌려 회군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고려 왕조의 종말과 조선 왕조의 개창의 단초가 되는 이른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다.

회군 소식을 들은 최영은 급히 개경으로 돌아와 반격을 준비했으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결국 이성계가 이끈 군대는 끝까지 저항하던 최영을 사로잡았다. 포로가 된 최영을 만난 이성계는 “이러한 사변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을 공격하려는 일은 대의를 거스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들을 고되게 하여 그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라고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최영은 곧 고봉현(高峯縣, 지금의 경기도 고양(高陽))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합포(合浦,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馬山))으로 옮겨졌다. 창왕(昌王)이 즉위한 후에는 체포되어 순군에서 심문을 받고, 그해 12월 처형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5 청렴함과 억울함의 아이콘 – 후세의 평가

그가 처형당한 상황을 묘사하여 “형(刑)에 임하여 말과 얼굴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죽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시장의 문을 닫았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말을 전해들은 자와 거리의 아이와 골목의 부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시신이 길가에 있으니 지나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다. 도당에서 쌀과 콩 1백 50석, 베 2백 50필을 부의하였다”라고 전한다.

최영을 제거하고 조선의 개국을 주도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조차 그의 공적과 평판을 인정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시 최영이 세간에서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음을 대변해준다. 위화도회군 이후 최영의 죄를 논할 때에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것은 윤소종(尹紹宗)의 말이었다.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 비록 최후의 순간 요동 공격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실각하였지만, 공민왕 때부터 40년에 가깝게 고려를 왜구와 홍건적 등의 외침으로부터 지켜내고, 국왕과 왕실의 존립을 위해 애썼던 공로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최영을 국가적으로 현창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색(李穡)이나 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이 왕조교체에 반대했던 이들도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복권되고, 나아가 문묘에 배향되는 등 현창되었던 데에 반해 최영에게는 그러한 은전이 베풀어지지 않았다. 다만 1396년(태조 5)에 태조가 그에게 시호를 내려주게 했을 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그를 기념한 일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첫째는 고려 말의 다른 반대파들과는 달리 최영은 조선 개국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었던 위화도회군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최영을 현창할 경우 조선 개국의 명분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그가 무인으로서, 성리학을 익힌 다른 인물들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조선 왕실의 평가는 태종[조선](太宗)의 다음과 같은 말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최영은 불학무술(不學無術)하나, 그의 지기(志氣)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 ‘불학무술(不學無術)’ 즉 학술이 없었다는 점은 그의 성품이 조금 우직하였다는 점과 함께 늘 언급되었다. 이 때문에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남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세우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조정의 그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의 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충직함과 청렴함, 그리고 전쟁에 임해서의 용맹함과 준엄함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려사』에 실린 최영의 열전은 그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최영은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스러웠으며 청렴했다. 전장에서 적과 대치해서는 신색이 온화해 화살과 돌이 좌우에서 날아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대를 지휘할 때는 준엄하여 반드시 승리할 것을 다짐하였고, 군사들이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곧바로 목을 베었으므로 크고 작은 모든 전투에서 이르는 곳마다 공을 세웠고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처음 최영의 나이 열여섯 때 부친이 죽으면서 훈계하여 말하기를, ‘너는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최영이 마음에 깊이 새겨 재산을 늘리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사는 집이 아무리 누추해도 편안하게 거처했고 의복과 음식은 검소했으며 쌀궤가 늘 비어 있었다. 살진 말을 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자를 보면 개나 돼지만도 못하게 여겼다. 비록 일신에 장군과 재상을 겸하고 오래 동안 병권을 장악했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큰일에만 힘을 쏟고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종신토록 군사들을 지휘했으나 휘하의 사졸 가운데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공적인 현창이 비교적 박했던 데에 비해, 민간에서 최영은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화려한 무공과 도덕성, 비극적 최후 등의 요소가 결합하여 그에 대한 동정심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설화로 유명한 것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최영이 형을 받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만약 탐욕의 마음이 있었으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무덤이 고양(高陽)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벌겋게 벗어져 있다. 사람들이 ‘붉은 무덤[赤墳]’이라고 부른다.”

또한 최영은 민간의 무속신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숭앙되고 있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영정은 전해지지 않지만, 인왕산 국사당(仁旺山國師堂)에는 「최영장군도(崔瑩將軍圖)」가 모셔져 있어 무당이나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성심으로 받들고 있다. 또한 황해도 전역에서는 최영장군 당굿이라는 무속의례를 행하며 나라의 평안함을 기원하고 동시에 무당들이 영험력을 얻는 기회로 삼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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