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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崔瑀]

냉혈한 권력자,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다

미상 ~ 1249년(고종 36)

최우 대표 이미지

강화 고려궁지와 강화유수부 좌측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최우(崔瑀)는 최충헌(崔忠獻)의 아들로서 그가 죽은 1219년(고종 6년) 이후로 1249년(고종 36)까지 집권한 최씨 무인정권의 2대째 집정자이다. 최우는 그의 첫 이름이고, 나중에는 최이(崔怡)로 개명하였는데, 언제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도 ‘최우’라는 이름과 ‘최이’라는 이름이 동시에 등장하지만, 열전에는 ‘최이’라는 이름으로 올랐다. 여기서는 편의상 최우로 통일하여 표기하겠다. 그의 집권 기간 중 고려는 몽골의 고려침입을 받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江華島)로 옮기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이 글에서는 최우의 집권과정과 계승과정, 그리고 그가 누렸던 권세와 영예를 주목하여 살펴보겠다.

2 아버지의 우산 아래에서

최우는 최씨 무신정권을 개창한 최충헌의 장남이다. 최충헌은 세 명의 부인에게서 5남 1녀를 두었는데, 최우는 그 중 첫째 부인인 송청(宋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동복 형제로 최향(崔珦)이 있는데, 그는 최우와 후계 자리를 두고 경쟁관계에 있다가 밀려나 최우의 집권 기간 내내 핍박을 받았다.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1230년(고종 17)에 제거되었다.

최우가 몇 년에 출생했는지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최충헌이 1149년(의종 3)에 태어났던 점을 고려하면 최우는 대략 1170년의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전후한 시점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최충헌이 집권한 1196년(명종 26) 당시에는 20대의 장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최충헌의 쿠데타에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그가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02년(신종 5)의 일로, 경주(慶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김척후(金陟侯) 등이 출정군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최충헌이 최우와 함께 출정군을 사열했다는 것이다.

최충헌의 죽음 이전까지 그의 활동으로 눈에 띄는 것은 많지 않았다. 1208년(희종 4)에 국왕이 그의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든지, 그의 집에 행차하여 견룡군들이 격구를 하는 것을 관람했다는 기록 등이 눈에 띌 뿐 그가 특별한 정치활동을 벌였던 흔적은 엿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충헌의 권력이 굳건해지면서 그 역시도 아버지와는 별개로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최우의 가병들은 선죽교(善竹橋)에서 숭인문(崇仁門)까지 이르기까지 늘어서서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면서 전투를 연습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신변을 호위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병을 이 정도의 규모로 보유하고 있었으니, 최충헌에 이어 그가 권력을 쥐게 되었던 일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최우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사실 한 가지는 그가 당대의 명필로 손꼽혔다는 것이다. 이규보(李奎報)는 신라 때의 김생(金生), 고려 때의 탄연(坦然), 유신(柳伸)과 더불어 최우를 신품(新品) 사현으로 꼽기도 하였다. 그 때문인지 국왕 희종은 최우에게 대궐의 선경전과 대관전(大觀殿)의 병풍 글씨를 써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금나라의 책봉사신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했다. 최우가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는 점은 그가 이전의 다른 무신 집정자들과는 달리 문신적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3 정권을 장악하다

1219년(고종 6)에 최충헌이 사망했다. 그는 이미 장남인 최우를 후계자로 지목하여 권력을 계승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눈앞에 둔 최충헌은 최우를 은밀히 집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내 병이 낫지 않으면 집안에서 우환이 일어날까 염려스러우니 너는 다시 오지 말라.” 최우는 병을 핑계로 자신의 사위인 김약선(金若先)을 시켜 아버지의 병시중을 들게 하고 자신은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23년 집권자의 육감은 적중했다. 최충헌의 심복으로 그의 곁을 지키던 4인방이었던 최준문(崔俊文), 지윤심(池允深), 유송절(柳松節), 김덕명(金德明)은 최우가 권력을 잡는다면 그들의 명운이 온전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하면서 둘째 아들인 최향이 대권을 잇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 최우가 문병 오는 틈을 타서 그를 죽이고자 하여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최우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당부를 들은 최우는 낌새를 채고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김덕명이 배반하여 이 음모를 최우에게 알려, 음모는 실패하였다. 최우는 나머지 세 사람을 모두 유배보냈으며, 일을 주도한 최준문을 유배길에서 살해해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최충헌은 사망하였다. 최우는 그의 지위를 계승하여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우선 그는 아버지가 쌓아두었던 금·은과 진기한 보배들을 국왕에게 바치고, 또한 강제로 빼앗은 땅과 노비들을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하면서 인망을 모았다. 그리고는 아버지 대부터 활약하던 조정의 중심인물들을 하나하나 내치기 시작했다. 금의(琴儀), 정방보(鄭邦輔), 문유필(文惟弼) 등이 그 대상이었다. 뇌물을 수수하는 풍토를 일신한다는 그럴싸한 명분까지도 갖추었다. 이렇게 해서 정권은 완전히 최우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4 대를 이은 권세와 영예

최우는 무신정권이 들어선 지 약 50년 만에 최초로 대를 이어 집권자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최충헌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집권 기간 내내 권세를 휘두르면서도 동시에 불안에 떨다가 결국엔 천수를 누리지 못했던 데에 비해, 최우는 아버지가 닦아놓은 단단한 반석 위에서 자신의 시대를 시작했다. 따라서 그가 누렸던 권세와 영예 역시도 그의 아버지에 못지않았다.

1219년(고종 6)에 집권자의 자리에 오를 당시 그의 정식 관직은 정3품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지나지 않았다. 이듬해 연말, 한 단계 승진하여 종2품의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정3품의 이부(吏部) 및 병부상서(兵部尙書),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겸직하였다. 인사권을 가지는 이부와 병부, 그리고 관리의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의 장관직을 독차지하기는 했지만, 고려 관직체계상으로는 그의 위에도 몇 명이나 더 있었다. 놀라운 점은 이후로 30년 가까이 고려의 정권을 독차지하였음에도 최우의 관직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그의 권력은 정식의 관료조직과는 무관하게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1234년(고종 21)에 국왕이 천도의 공을 이유로 그를 진양후(晋陽侯)로 책봉하여 그를 위한 부를 설치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8년 뒤에는 그의 작위를 공(公)으로 올려주었다.

『고려사』에 실린 최우의 열전은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들로 가득하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한번은 그의 다리가 퉁퉁 붓는 병에 걸렸다.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하급의 아전들까지 앞다투어 기도하면서 재(齋)를 올리고 글을 지어 그의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울의 종이가 달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여러 의원들이 달려들었으나 치유하지 못했는데, 본래 의원 집안의 딸이었던 임정(林靖)이라는 자의 처가 고약을 붙여 효험을 보았다. 이에 국왕이 나서서 임정에게 벼슬을 내려 최우의 환심을 사고자 할 정도였다.

최우는 마음속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 음양술로 유명했던 주연지(周演之)라는 인물이 그의 관상을 보고는 은밀히 말하기를 “현 임금은 왕위를 잃을 상인 반면 공께서는 왕후가 되실 상이니 정해진 운수를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최우는 이 말을 심복인 김희제(金希磾)에게 전하면서 주위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으나, 호응이 없자 격노하였다고 한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가산을 풀어 개경의 나성(羅城)을 수축하게 한다든지, 양현고(養賢庫)에 쌀을 헌납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 드는 비용은 그의 막대한 재산 가운데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1229년(고종 16)에 그는 이웃집 1백여 채를 강제로 빼앗아서 격구장을 만들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몇 백 보나 되었으며, 바둑판처럼 평탄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도 계속 남의 집을 헐어 격구장을 확장하니, 강탈한 집이 모두 수백 채에 이르렀다. 최우의 처 정씨(鄭氏)가 죽었을 때에는 장례 절차를 예종[고려](睿宗)의 왕비인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전례를 따르게 하였다. 왕실을 비롯해 상하의 관료들이 다투어 제수를 올리면서 사치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애썼던 탓에 저자의 물가가 폭등할 정도였다.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천도할 때에도 관리의 녹봉을 줄 쌀을 수송하는 수레 1백여 채를 빼앗아 자기 집안의 재물을 먼저 강화도로 실어 보냈다고 한다. 강화도에 머물면서도 그의 호화로운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몽골의 침입이 잠시 중단되어 오랜만에 평화를 맛보던 1245년(고종 32)의 기록을 보면, 5월에 종실과 재추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베푸는데, 채붕을 산처럼 높게 설치하고 비단 장막과 능라 휘장을 둘러치고는 그 가운데 그네를 매달아 다양한 무늬가 수놓아진 비단과 조화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한 네 개의 큰 화분에 산봉우리 모양의 얼음을 담아놓고 그 둘레는 은테와 자개로 꾸몄으며, 큰 항아리 네 개에 붉은 작약 등 10여 종의 꽃을 꽂아두어 얼음과 꽃이 서로 비치면서 겉과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할 정도였다. 이 잔치에 동원된 사람만도 1,350여 명에 이르렀다는 점, 한여름에 가까운 음력 5월에도 얼음 장식을 화려하게 했다는 점 등에서 그의 부와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최항[중기](崔沆)의 묘지명에는 최우의 호칭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공신호만도 26자에 달했다. 금자광록대부·수태사·개부의동삼사·중서령·상주국·상장군·감수국사·판어사대사·진양군개국공(金紫光祿大夫·守大師·開府儀同三司·中書令·上柱國·上將軍·監修國史·判御史臺事·晋陽郡開國公)에 봉해졌으며, 식읍 3000호·식실봉 1000호를 받는 등 문산계와 문관직, 무관직에서 모두 최고위의 호칭을 겸하였고, 광열공(匡烈公)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았다고 한다.

5 최씨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앞서 언급했듯이 최우는 집권에 성공한 이듬해 종2품의 참지정사를 맡았을 뿐, 이후 30년 가까이 특별한 관직을 역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실현되었을까.

최씨 집안의 권력을 지탱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무력이었다. 관군을 훨씬 능가하는, 늘어섰을 때 그 길이가 몇 겹으로 해도 2~3리에 달했다고 하는 대규모의 사병집단이 권력을 넘보는 자들로부터 집권자를 지켜주었다. 이러한 사병집단은 도방(都房)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도방은 원래 경대승(慶大升)이 만든 호위집단이었다. 경대승은 결사대 백 수십여 명을 모아 자기 집에 두고 훈련시키면서 이를 도방이라고 부르면서 언제나 이들의 호위를 받았는데, 때로는 자신이 그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서 성의를 과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대승 사후 그가 양성했던 도방 세력은 철저하게 말살되었으나, 최씨 정권에서도 자신의 사저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항상 집권자의 곁을 지키는 사병집단을 양성하여 이들을 도방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최우가 집권하던 당시에는 대내외로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관군의 존재는 점차 유명무실화 되어가자 각지에서 도적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최우는 이를 우려하여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행하면서 도적들의 횡포를 막게 하였는데, 이 조직을 야별초(夜別抄)라고 불렀다. 이 야별초가 나중에 좌·우별초로 나뉘어졌고, 여기에 신의군(神義軍)이 더해져서 이를 아울러 삼별초(三別抄)라고 불렀다. 삼별초 역시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긴박한 정세 속에서라면 모를까, 장기간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은 무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문인 집단들의 동의와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최우의 집권기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집정자 주위에 문인들을 묶어두는 기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서방(書房)이었다. 서방은 최우가 사저에 설치한 문인집단으로, 그의 문객들 가운데 당대의 명유들을 세 조로 나누어 숙직시켰다고 한다.

최씨 무신정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기구는 교정도감(敎定都監)이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던 1209년(희종 5)에 청교역의 역리(驛吏) 세 명이 최충헌 부자를 제거하기 위한 반란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 최충헌은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특별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했는데, 사건 처리가 마무리된 후에도 그대로 두어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 기구는 점점 업무 범위를 넓혀서 국정 전반에 모두 관여하게 되었다. 특히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교정도감이 세금 징수 등 국정 운영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최씨 정권의 힘은 조정의 인사권을 독점한 데에서도 비롯되었다. 이 기능을 잘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가 정방(政房)이다. 정방은 1225년(고종 12)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최우가 그의 사저에 두었던 것을 보면 국가의 정식 관서라기보다는 최씨 정권의 사적인 기구였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우는 여기에 문사들을 소속시키고서 백관들의 인사를 결정하여 목록을 써서 올리면 왕은 여기에 다만 점을 찍을 뿐이었다고 한다.

6 아들 최항에게 이어진 권력

최우는 일생 동안 세 명의 본처를 두었는데, 이들에게서는 모두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애첩 서련방(瑞蓮房)의 소생이었다. 최우는 이 두 아들이 자신의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에 사위인 김약선에게 권력을 물려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권력투쟁을 염려한 최우는 두 아들의 머리를 깎아 승려로 삼았으니, 첫째는 만종(萬宗)이고 둘째는 만전(萬全)이었다. 이 둘은 순천(順天)의 송광사(松廣寺)로 출가했다가 훗날 만전은 화순(和順)의 쌍봉사(雙峰寺)로, 만종은 산청(山淸)의 단속사(斷俗寺)로 가서 머물렀다. 그러나 이 형제는 두 사찰을 본거지로 삼아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온갖 횡포를 부리며 돌아다녔다.

한편 강화도의 김약선은 1235년(고종 22)에 자신의 딸을 태자, 즉 이후의 원종[고려](元宗)의 비로 들이는 등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약선이 처녀들과 가까이 하는 모습에 질투를 느낀 그의 처가 자신의 아버지인 최우에게 이를 호소하는 일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최우는 결국 사위를 제거해버렸다.

후계자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만종과 만전 형제가 남방에서 부리는 횡포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최우는 박훤(朴暄), 송국첨(宋國瞻)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아들들이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의 수하들을 모두 잡아들여 가두어버렸다. 그리고는 두 아들을 강화도로 소환하였다. 세 부자가 상봉한 자리에서 이들은 “아버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이처럼 핍박을 받으니, 백년 후에는 우리 형제가 죽을 곳도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며 눈물로 호소하였다. 결국 최우는 만전을 환속시켜 최항으로 개명하게 하고, 그에게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게 하였다.

결정적으로 최우는 죽기 1년 전인 1248년(고종 35)에 자신의 가병 5백여 명을 최항에게 나누어주면서 후계자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이듬해 11월 최우는 30년의 집권을 끝으로 사망하였다. 국왕 고종은 곧바로 최항에게 추밀원부사·이병부상서·어사대부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처음 받았던 관직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를 교정도감의 최고 책임자인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 임명함으로써 그의 집권을 정식화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은 3대째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1249년(고종 36년)에 집권한 최항은 8년간 권좌에 있다가 1257년(고종 44)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권력은 다시 그가 비첩에게서 낳은 아들인 최의(崔竩)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최의는 불과 1년을 채우지 못하고 1258년(고종 45) 3월에 유경(柳璥), 김준(金俊), 임연(林衍) 등이 주도한 쿠데타로 제거당하였다. 이로써 4대 60년에 걸친 최씨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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