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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崔冲]

고려의 공자, 9재 학당을 설립하다

984년(성종 3) ~ 1068년(문종 22)

최충 대표 이미지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최충(崔沖)은 고려전기 문벌귀족사회의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고려는 이전의 고대국가들과 달리 출신성분에만 의거하여 개인의 정치적 지위를 결정짓던 사회가 아니었다. 좋은 혈통을 타고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고려 사회에서는 관직에 진출해 공적을 드러내었을 때 비로소 최고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 음서(蔭敍)와 같은 특권을 기존 지배층에게 부여함으로써 지위 세습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지배층 내부에서도 배타적인 계급내혼을 통해 폐쇄적인 신분구조를 유지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개인의 정치적 실패와 성공은 개인의 역량에 크게 좌우되었다.

이러한 문화를 대변하는 제도가 바로 과거시험이다. 다수의 고려 지배층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받았음에도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 과거는 학문적 소양을 평가받는 자리이자 개인의 역량을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확대와 함께 문벌귀족사회의 문화는 보다 고상한 방향으로 발전하였으며, 고려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해소해줄 수 있는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다. 최충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에 부응하였던 인물이다. 사학(私學)을 창시하여 유학 교육을 전사회적으로 확대시켰던 그는 한 시대의 학문풍토를 변화시키는 데 실로 큰 기여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고려전기 통치체제 정비과정과 최충의 등장

최충의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이다. 984년(성종 3)에 해주(海州)의 향리였던 최온(崔溫)의 아들로 태어나 해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가 태어난 성종 시기는 고려가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여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내세웠던 때이다. 성종은 새로운 정치운영원리를 확립하기 위하여 유학 교육을 강조하였다. 학문에 정진하지 않으면 올바른 것을 알 수 없고 현명한 사람을 임용하지 않으면 공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성종은 992년(성종 11) 서울과 지방의 생도들에게 공부를 권장하고 문(文)·무(武)를 통틀어 재능 있는 사람을 뽑도록 하였다. 이윽고 같은 해 12월에는 국자감(國子監)을 설립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고려의 국립교육 시스템을 한층 정비하였다.

성종대에는 지방에 향교(鄕校)가 건립되면서 유학 교육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중앙집권화 정책과 함께 과거 급제자를 우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지방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많은 수의 향리세력이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최충의 등장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어린 시절 행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확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지방 유력인사의 자제였던 최충은 아마도 향교를 통해 처음 학문을 접하고 중앙 정계로의 편입을 위해 과거시험에 몰입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1005년(목종 8)에 최충은 지공거(知貢擧) 최항(崔沆)이 주관하는 과거에서 합격의 기쁨을 만끽한다.

최충이 응시하였던 과거시험은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1년 전인 1004년(목종 7)에 목종은 과거법(科擧法)을 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응시자는 여러 날에 걸쳐 시험을 치러야 했다. 첫 번째 날에는 『예기(禮記)』에 대한 지식을, 두 번째 날에는 시(詩)와 부(賦)를 평가받았으며 하루를 건너뛰어 네 번째 날에는 시무책(時務策)을 보았다. 이와 같이 엄격한 시험에서 최충은 약관의 나이로 장원을 차지하였다. 그의 능력은 한 차례의 과거시험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최충의 정치적 활약

1005년(목종 8)의 과거시험에서 최충을 선발한 최항이 현종[고려](顯宗)의 즉위과정에 기여하게 되자 그의 문생(門生)이었던 최충은 현종 시기에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고려 시대에는 좌주와 문생 간의 유대가 깊었다. 과거를 주관한 지공거와 선발된 급제자 사이에는 마치 부자관계와 같은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곤 하였다. 좌주는 문생을 후원하고 문생은 좌주를 섬기며 서로를 정치적으로 보호하였는데, 최충 또한 좌주였던 최항의 후원으로 수월하게 관료생활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정권을 장악하고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목종의 후사로 삼고자 하는 등 파행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최항은 채충순(蔡忠順)과 함께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손자이자 목종의 사촌인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맞아들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즉위 직후 최항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여 재상의 반열에 올렸다.

이처럼 최항과 그의 주변세력에게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최충은 습유(拾遺), 보궐(補闕),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시랑(禮部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등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관직을 두루 역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왕인 덕종(德宗)의 치세에서는 우산기상시·동지중추원사(右散騎常侍·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가 형부상서·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승진하였다.

정종[고려](靖宗)이 즉위하자 최충은 상서좌복야·참지정사·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叅知政事·判西北路兵馬事)에 임명되어 변경의 성과 해자를 수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영원진(寧遠鎭)과 평로진(平虜鎭)를 비롯해 14개의 요새를 설치함으로써 북방의 수비를 강화하였고, 그 공로를 치하받아 고려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인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제수된다.

이후 문종(文宗) 시기에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하였다. 율령(律令) 연구를 통해 제도를 정비하는 데 힘쓰던 최충은 민생과 외교문제 또한 앞장서서 해결하였다. 흉년으로 인해 궁핍해진 서북지방 백성들에게 부역의 부담을 줄여주고 고려에 억류되어 있던 동여진(東女眞) 추장 염한(塩漢) 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북방의 불안요소를 잠재운 것 모두 그의 공이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는 가운데 최충은 두 차례에 걸쳐 지공거를 맡아 과거시험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 지공거는 학문적 역량이 최고 수준에 이른 사람만 임명될 수 있는 명예로운 직임으로, 두 차례에 걸쳐 지공거가 되었던 최충은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유학자임에 틀림없었다. 1026년(현종 17)에 최충은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서 시험을 관장하여 최황(崔貺)을 선발하였고, 1035년(정종 원년)에는 형부상서(刑部尙書)로서 지공거에 임명되어 김무체(金無滯)를 뽑았다. 이 외에도 홍덕성(洪德成), 최상(崔尙), 최유부(崔有孚), 김정(金正), 김양지(金良贄), 오학린(吳學麟)이 그가 주관하는 과거시험에서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고려전기를 선도하였던 최충이었기에 고려의 국왕들은 그에게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많은 부분을 의지하였다. 1053년(문종 7)에 최충이 70세가 되어 치사(致仕)를 요청하자 문종[고려](文宗)은 “시중 최충은 여러 대에 걸쳐 유종(儒宗)으로서 삼한(三韓)의 덕을 이룩하였다. 지금 비록 늙어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지만 허락할 수 없다”고 하며 더욱 높은 지위를 내려주려고 하였다. 결국 국왕의 간곡한 바람으로 최충은 중서령(中書令)까지 역임한 이후에야 벼슬에서 물러날 수 있었는데, 이후에도 문종은 국가에 중대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를 찾아 자문을 구하였다.

4 사학의 창시와 문헌공도(文憲公徒)

현종대에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고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자 최충은 문치(文治)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다. 이미 대유학자 반열에 오르고 수차례 지공거까지 역임한 최충이 제자를 모은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려 방방곡곡에서는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최충은 학당을 아홉 개로 나누고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를 바로 9재(九齋)라 부른다.

사학의 시초라 할 수 있는 9재는 고려사회에 과거제가 정착함에 따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의 학당에 입학해 공부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학문적 성취가 정치적·사회적 성공과 직결되는 문화가 정착함에 따라 문벌귀족들은 새로운 교육기관을 필요로 하였는데, 최충은 이러한 흐름을 정확히 읽어냈던 것이다.

최충은 생도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들을 초빙하여 9경(經)과 3사(史)를 가르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최충의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文憲公徒)로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의 9경은 학자에 따라 『주역(周易)』·『시경(詩經)』·『서경(書經)』·『효경(孝經)』·『예기(禮記)』·『춘추(春秋)』·『주례(周禮)』·『논어(論語)』·『맹자(孟子)』로 보기도 하고, 『주례』·『예의(儀禮)』·『예기(禮記)』의 3례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3전 및 『주역』·『시경』·『서경』의 통칭으로 보기도 한다. 3사는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를 지칭한다.

이후 고려에서는 여러 관리들이 사학을 설치하였다. 최충의 문헌공도 외에도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南山徒),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의 문충공도(文忠公徒), 황영(黃瑩)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柳監)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文正)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가 세워졌다. 여기에 김의진(金義珍) 혹은 박명보(朴明保)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 양신공도(良愼公徒)와 창립자가 불명인 구산도(龜山徒)를 합치면 총 12개의 사학이 되는데, 당대에는 이를 12도(十二徒)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가장 융성하였던 것은 최충의 문헌공도로서, 최충은 그 영향력을 인정받아 해동공자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다.

5 죽음과 후대의 평가

고려의 유학 교육을 크게 부흥시켰던 최충은 1068년(문종 22)에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들은 문종은 이염(李鹽)을 통해 조문하고 그에게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이윽고 1086년(선종 3)에는 선종[고려](宣宗)이 최충을 정종의 묘정에 배향한다.

최충은 아들로 최유선(崔惟善), 최유길(崔惟吉)을 두었다. 최유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차례 지공거를 맡아 인재들을 선발하였다. 최유길 또한 관료로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그의 아들인 최사추(崔思諏)가 학식이 뛰어나 숙종[고려](肅宗), 예종[고려](睿宗) 시기에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로부터 최충의 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명문가로 자리를 잡아 자손 가운데 재상에 오른 사람이 수십 인이나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가문의 위세 속에서 최충 또한 고려 전시기에 걸쳐 높은 평가를 받는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최충은 학교를 부활시키고 한 시대의 학문을 선도한 인물로서 인정받았다. 1419년(세종 원년)에 세종(世宗)은 권근(權近)을 문묘종사(文廟從祀)하는 문제와 더불어 최충의 종사도 논의해보라는 명을 내렸다. 심지어 1550년(명종 5)에는 주세붕(周世鵬)이 유적지를 탐방하다가 최충의 사당을 발견하고는 그의 뜻을 받들어 추모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명종(明宗)과 중앙의 관료들은 최충을 추숭하는 사업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수양서원에 편액(扁額)과 서적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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